[이슬람 전문칼럼] 이슬람의 영적 실체 (2)

교회일반
교단/단체
편집부 기자
press@cdaily.co.kr
  •   

▲이만석 목사(한국이란인교회·한장총 이슬람선교훈련원 원장) ©이지희 기자

[지난 글에 이어] 셋째: 아랍인들이 모두 무슬림은 아니다. 아랍인들 중에도 기독교인이 있다. 이집트에는 꼽틱 기독교인들이 인구의 10% 정도 되고 레바논 같은 나라는 지금부터 반세기 전만 하더라도 기독교인들이 더 많았던 나라인데 지금은 40%정도의 기독교인들이 있다. 이들은 대대로 아랍어를 사용하는 아랍인들이지만 종교는 이슬람이 아니라 기독교다. 이들이 사용하고 있는 아랍어로 된 성경책을 보면 “태초에 알라(Allah)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라고 시작하면서 알라께서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예수 ... 등 선지자를 보내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책에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알라(Allah)라고 기록되어 있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같은 신이라고 믿는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속게 된다.

넷째: 그러나 그래도 속지 않는 믿음이 좋은 기독교인들을 속이는 방법이 있다. 그것이 바로 같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는 방법이다. 즉 아브라함이 섬기던 그 하나님을 기독교 유대교인들은 이삭을 통해서 받았고 이슬람에서는 이스마엘을 통해서 받았다는 주장이다. 전달 경로가 달라서 그렇지 원래는 아브라함이 섬기던 같은 하나님을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뿐이라는 주장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거짓말에 속고 있는지 모른다. 웬만한 목사나 대학교수들도 이슬람에 대한 특별한 연구가 없었다면 이렇게 속고 있다.

* 성경의 아브라함과 꾸란의 아브라함 비교

혹자는 아니 무슬림들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무슨 근거로 부인하는 것이냐고 반문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슬람권에서 20년을 살면서 그리고 귀국 후에도 지금까지 10년 이상 근 30년이 넘도록 꾸란과 성경을 비교하면서 연구해 왔다. 꾸란과 성경을 비교해 보니 성경의 아브라함과 꾸란의 아브라함은 유사점이 거의 없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물론 다르다는 것도 어떤 교수가 그러더라. 혹은 어떤 책에 보니 그렇게 말하더라는 것은 전혀 신뢰할 수 없는 근거다. 왜냐하면 무슬림들은 타끼야를 통해서 자신들의 경전인 꾸란까지 미화시켜 번역하면서 거짓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자료는 오직 성경 말씀이다. 그리고 무슬림이라면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꾸란과 비교해 보면 명백한 자료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아브라함과 꾸란의 아브라함은 무엇이 다른 것일까?

* 아버지 이름이 다르다: 성경의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데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창11:26):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그러나 꾸란의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아자르’라고 기록되어 있다.

(꾸란6:74):일러가로되 아브라함이 그의 아버지 ‘아자르’께 우상을 신으로 모시나이까 당신과 그리고 당신의 백성은 분명히 잘못하고 있습니다.

* 성경의 아브라함의 이름은 원래는 아브람이었는데 99세 때 하나님께서 바꿔주신 이름이다. 그러나 꾸란의 아브라함은 어려서부터 아브라함이었다.

(창17:1-5):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꾸란21:60): 그들이 말하길 아브라함이라는 청년이 그것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 성경의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던 사람이었지만 꾸란의 아브라함은 메카에서 이스마엘을 번제로 드리려던 사람이었다. 꾸란에는 번제로 드리려던 아들의 이름을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이슬람 학자들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이를 이스마엘이라고 가르친다. 최영길역 한글 꾸란의 각주에 보면 모리아는 이스마엘이 어린시절을 보낸 “마르와”동산임이 밝혀졌다고 주장한다.(p844)

(창22: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꾸란37:102): 아들의 나이가 그와 함께 일할 나이에 이르렀을 때 그가 말하길 내 아들아 너를 제단에 올리라는 명령을 내가 꿈에서 보았노라. 너희 생각이 어떤지 알고 싶구나 라고 하니 아들이 말하길 아버지 당신께서 명령 받은 대로 하옵소서. 알라께서 인내하는 종으로부터 원하신다면 당신께서 저를 발견할 것입니다 하였더라... 알라께서는 훌륭한 희생으로 그를 대신하였노라.

* 성경의 아브라함은 어려서 이스마엘을 쫓아내고 죽을 때까지 그를 만난 일이 없다. 그러나 꾸란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카아바 신전의 기초를 놓았다고 주장한다.

(꾸란2:127):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그 집의 주춧돌을 세우며 주여 저희들로부터 우리의 기도를 받아 주소서. 주여 당신이야말로 들으시고 아시는 분이시옵니다.

* 성경의 아브라함은 경전을 받은 일이 없는데 꾸란의 아브라함은 경전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꾸란 87:16-19): 그래도 너희가 현세의 삶을 좋아하나 내세가 더 좋으며 영원하니라 실로 이것은 옛 성서에도 계시되어 있으며 아브라함과 모세의 성서에도 그러하니라.

* 성경의 아브라함은 불속에 던져진 일이 없는데 꾸란의 아브라함은 이교도들에 의해 불속에 던져진 것을 알라께서 구해 주셨다고 주장한다.

(꾸란21:68-69): 그러자 그들이 말하길 승리하려면 그를 불태워 버리고 신들을 보호하라 하더라. 알라께서 명령하사 불아 식어라 그리고 아브라함을 안전케하라 하였노라.

성경의 아브라함과 꾸란의 아브라함은 족보에서부터 이력서까지 한 가지도 공통점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름이 비슷하다고 해서 같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속는다면 결국 이슬람의 알라는 성경의 하나님과 같은 신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는 십계명 중 제 1계명을 범하는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꾸란의 알라는 어떤 신인가?

우리가 무조건 성경의 하나님은 꾸란의 알라와는 다르다고 목청을 높여 외친다고 하더라도 꾸란에 등장하는 알라의 정체를 모르면 그것은 근거없는 주장으로 치부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꾸란에 등장하는 알라는 어떤 신인가를 알아야 한다.

* 알라는 진과 혈연관계가 있는 신이었다.

(꾸란37:158): 그들은 알라와 진 사이에 혈연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들은 자신들이 알라 앞에 재판을 받기 위해서 서지 않으면 안 됨을 잘 알고 있노라.

여기서 진(Jinn)이란 아라비안 나이트에 등장하는 알라딘의 요술램프를 문지르면 등장하여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도깨비 같은 존재라고 볼 수 있다. 꾸란에는 인간과 천사의 중간 쯤 되는 존재라고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흙으로 창조했으나 진은 불로 창조했다고 한다.(꾸란15:27) 그런데 여기서 그들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누가 알라와 진이 혈연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일까? 이들은 특정인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상식이나 보편적인 통념이나 진리를 설명할 때 그들이라는 가주어를 삽입해서 문장을 만드는 것은 영어나 아랍어를 비롯한 대부분의 언어에서 사용되는 공통된 용법이다. 보통 모두가 다 그렇게 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알라는 진과 함께 숭배되는 파트너였다.

(꾸란6:100): 그런데 그들은 그분과 나란히 진을 숭배하고 있다. 저것은 원래 알라께서 만드신 것이다. 또 그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알라께 아들이나 딸이 있다고 날조한다. 알라께 영광이 있으시라. 알라께서는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을 초월하여 높이 계시는 분이다.(김용선 역 한글 꾸란)

이것은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이 알라와 진을 나란히 숭배하고 있는 현상을 기술한 것이다. 김용선 교수는 ‘나란히’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들은 파트너(Partner) 즉 협력자, 동반자, 배우자로 함께 섬기고 있다는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 물론 최영길 역에는 “그런데도 그들은 알라께서 창조한 영마(진)을 그분께 비유하여 거역하고 있다”고 번역하고 있다. “파트너로 숭배한다”는 말과 “그분께 비유하여 거역하고 있다”는 말은 전혀 다른 말이다. 이것은 실수로 그렇게 번역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아랍어 사전까지 만드신 분이 몰라서 그렇게 번역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미화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것을 소위 ‘타끼야 번역’이라고 부른다.

* 이슬람의 신 알라(Allah)에게는 라트(Lat), 우짜(Uzza), 마나트(Manat)라고 불리는 세 딸이 있었다.

(꾸란53:19-23) 너희들은 그래도 라트나 웃짜의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가? 그리고 세 번째인 마나트의 일도. 너희들에게는 사내애가 있고 알라에겐 계집애가 있다고 하는 건가? 그렇다면 공평하지 못한 몫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것들은 너희들이나 너희들의 조상이 그렇게 부른 흔한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알라께서는 그런 것에는 아무 권위도 내리시지 않았다. 그들은 억측과 욕정을 따르고 있음에 불과하다. 이미 그들에게는 주로부터 인도자가 파견되고 있는데도.(김용선 역 한글 꾸란)

여기서 너희와 너희 조상들이 부른 흔한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너희란 무함마드와 동시대에 살던 아랍 사람들이며 너희 조상들은 아라비아에 살던 모든 조상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그렇게 불러왔었다는 것을 무함마드가 꾸란에서 인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사실은 알라께서는 그들에게 아무런 권위를 내리지 않았다고 무함마드는 알라(Allah)와 그 딸들과의 관계에 선을 긋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왜 그럴 필요를 느꼈던 것일까? 대대로 인정되어 왔던 알라와 그 딸들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는다면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인들을 속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알라는 세 딸이 있는 신이고 여호와는 유일신인데 어떻게 같은 신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때 답변이 궁색해질 것이기 때문에 세 딸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계시가 내려왔다고 선포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알라와 하나님을 같은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그런 주장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10계명 중 제 1계명(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을 범하는 죄가 되는 것이다.

* 알라는 카아바 신전 안에 들어 있던 360개 우상들 중에 하나였으며 꾸라이시 종족의 대상무역을 지키던 신이었다.

(꾸란106:1-3) 꾸라이시 족의 안전을 위해 겨울과 여름의 여행이 그들에게 안전하도록 하기 위해 굶주리는 그들에게 음식을 주시고 공포로부터 안전함을 베풀어 주신 분이시니 그들은 이 집에 계신 주님을 경배하여야 하노라.(이슬람국제출판국 번역 한글 꾸란)

김용선 번역 한글 꾸란에 보면 이 신전의 주인을 숭배하게 하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집이나 이 신전으로 번역된 것은 물론 꾸란의 어떤 주석을 봐도 카아바 신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알라는 꾸라이시 종족의 대상무역을 보호해 주시는 카아바 신전 안에 계신 카아바 신전의 주인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슬람의 영

많은 사람들이 확인해 보지도 않고 무슬림들이나 이슬람 학자들의 주장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 결과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우주의 통치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아라비아의 한 종족신과 같은 신이 되어버리는 것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인정하고 있다.

* 이것은 이름의 문제가 아니라 영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름은 같을 수 있다. 그러나 이름이 같다고 다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래 전 전화기가 신기하게 보이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통화를 할 수 있다는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전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적은 두꺼운 전화번호부 인명부가 있었는데 필자는 호기심에 나하고 이름이 같은 사람 중에 전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하여 찾아보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필자와 같은 이름의 사람들이 깨알만한 글자로 몇 쪽이나 수록되어 있는데 전화번호와 주소가 모두 다른 사람들이었다. 이름이 같다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니다. 이를 동명이인(同名異人)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이름이 같다고 다 같은 신(神)은 아니다. 예를 들면 아랍, 인도네시아, 말레시아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에는 모두 성경의 하나님을 알라(Allah)라는 이름으로 번역해 놓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 열렸던 GMS선교대회에서 이슬람 세미나를 할 때 동남아에서 온 어떤 선교사는 “그들에게 알라(Allah)를 포기하라는 것은 엘로힘(Elohim)하나님을 포기하라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는 소리를 지면을 통해 읽었다. 그는 이름의 문제와 영의 문제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명칭이 무엇이든 언어마다 다를 수 있지만 그 명칭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 신을 같이 부르며 섬길 수 있다. 비록 그 신의 이름이 알라(Allah)가 아니라 ‘깡통’이나 ‘꿀밤’이라도 우리는 같이 섬길 수 있다. 왜냐하면 이는 이름의 문제가 아니라 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여호와’나 ‘엘로힘’ 혹은 ‘아도나이’라고 부르는 신일지라도 그 신이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신이라면 그것은 다른 영이라는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영을 분별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 예수를 주님이라고 시인하는가?

(고전12:3)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로 시인할 수 없느니라.

(마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꾸란5:17) ‘알라는 즉 마리아의 아들 메시아이다’라고 말하는 자는 이미 신앙을 버린 자이다.(김용선 역 한글 꾸란)

(꾸란5:17) 알라가 마리아의 아들 예수라 말하는 그들에게 저주가 있으리라.(최영길역 꾸란)

(꾸란5:72) ‘신은 즉 마리아의 아들 구세주이시다’라고 말하는 자는 이미 믿지 않는 자이다. 그러나 구세주(메시아)는 말하고 있지 않는가, ‘이스라엘 자손들아, 내 주이면서 너희들의 주이신 알라를 숭배하라’ 알라와 나란히 다른 어떤 것을 숭배하는 자에게 알라께서는 낙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금하셨다. 그가 살 곳은 지옥의 불이다. 불의의 무리에게는 아무도 도울 자가 없다.(김용선 번역 한글 꾸란)

이 구절들을 비교해 보면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가 성령이라면 하나는 악령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계시를 내려 보낸 알라(Allah)는 악령이라는 것을 분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다.

(행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꾸란4:157) 그뿐인가. ‘우리들은 구세주, 산의 사도, 마리아의 아들 예수를 죽였다’고 말하고 있다. 어째서 잡혀 죽었겠는가, 어찌하여 십자가에 매달렸겠는가, 단지 그와 같이 보였을 뿐이라, 본래 이 점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은 그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다. 이에 관해서 그들에게 어떤 확실한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제 나름대로의 억측에 불과하다. 아니 그들은 절대로 예수를 죽이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알라께서 그를 자기 곁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알라께서는 위력 있고 총명한 분이시다.(김용선 역 한글 꾸란)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서 열어 놓은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보혈로 인류의 죄를 씻어버리고 이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꾸란 4:157절에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만든 억측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꾸란을 계시한 영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유일한 인류 구원의 길을 원천봉쇄하여 인류를 지옥에 던져 넣으려고 하는 악한 영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예수가 그리스도(구세주)이심을 부인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다.

(요일2:22상)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꾸란61:6)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여, 진실로 나는 너희 있는 곳에 파견된 알라의 사도인 것이다. 나보다 먼저 내려진 율법을 확증하고, 또 나보다 나중에 아흐마드(무함마드)란 이름의 사도가 오는 걸 예고하는 자다’라고 말하고, 그들에게 분명한 표적을 갖다 보였을 때, 그들은 말했다. ‘이것은 틀림없는 마법이다.’(김용선 역 한글 꾸란)

성경과 꾸란의 이 두 구절을 비교해 보면 성경은 예수께서 그리스도, 메시아, 구세주이심을 부인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단언하고 있는데 꾸란에서는 예수가 자신의 입으로 자신이 알라의 파송을 받아 이 땅에 온 목적은 구약이 진리라는 것을 확증하고 무함마드가 올 것을 미리 예고하기 위해서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영은 거짓말하는 영이라는 것이 성경을 통해서 확인되지 않는가?

*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마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요일2:22하)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꾸란19:88-92) ‘자비로운 분(알라)이 자손(아들)을 두셨다’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진실로 너희들은 터무니없는 말을 하였다. 그 대문에 바로 하늘은 찢어지고 대지는 쪼개지고 산들을 무너지려고 한다. ‘자비로우신 분에 자손(아들)이 있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자비로우신 분은 자손을 가지시는 일이 없다.(김용선 역 한글 꾸란)

여기서 자비로운 분은 알라(Allah)를 말하는 것이고 자손이라고 번역된 왈라다(Walada)는 아들이라고 번역해야 맞는 단어다. 영문번역 꾸란은 대부분 아들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라고 하는데 꾸란은 하나님께 아들이 있다고 하는 자들 때문에 하늘이 찢어지고 대지는 쪼개지고 산들이 무너지는 재앙이 임할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고백하는 이들은 기독교인들뿐이 없다. 기독교인들 때문에 인류의 대 재앙이 임하니 그런 자들을 죽여 없애는 것이 알라의 진노를 멈추는 일이고 알라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는 것은 원리주의자들의 자연스런 해석이다. 그러므로 IS(이슬람국가) 대원들은 기독교인들을 죽이는 일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며 신앙적 자부심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영은 적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맺는 말

* 이슬람과 무슬림은 다른 개념이다.

이슬람의 악한 영의 정체는 분별하여 알려줘야 하지만 무슬림들은 우리의 이웃이며 우리의 형제자매들이며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다. 우리의 싸움은 사람들과의 육적인 전쟁이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 이슬람의 영은 악령이요 거짓말하는 영이요 인류구원을 원천봉쇄하여 인류를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 영이요 적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이 분별되었다면 우리 주위에 모여들고 있는 무슬림들은 우리가 어떤 시각으로 봐야 할 것인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정부가 이슬람의 정체를 모르고 경제 살리기에 매달리다보니 분별력이 없어 이슬람의 오일머니에 눈독을 들이며 할랄 장려 정책이니 이슬람 기도처를 많이 늘려 무슬림 관광객들을 더 유치해야 한다는 등 친이슬람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날마다 유럽에서 무슬림들이 저지르는 테러의 소식을 들으면서도 마치 도박에 미치면 손가락을 잘라도 도박장을 찾아간다고 하는 것처럼 무슬림들이 저지르는 테러에는 눈과 귀를 막고 그들의 주머니에 있는 돈에 눈독을 들이며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무슬림들과 싸워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모여드는 무슬림들을 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영적인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이슬람의 악한 영에 속고 있는 불쌍한 형제자매로 여겨야 한다.

* 혈과 육의 싸움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다.

사실 영적인 시각으로 보면 무슬림들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다. 구원의 길에서 원천봉쇄 당한 채로 거짓 영에 속아서 선악의 분별을 못하고 이슬람 율법에 손발이 묶여서 진정한 기쁨과 감사 대신에 두려움의 영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불쌍하다는 말 외에 다른 표현이 불가능하다.

한국교회가 이슬람의 악한 영을 분별하고 정치인들이나 국가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이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이슬람의 정체를 알 수 있도록 적극 홍보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가족들을 지키고 한국교회를 지키고 국가의 안보를 지키며 후손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미래를 물려줄 수 있어야 하겠다.

그러나 이슬람의 악한 영에 속고 있는 무슬림들은 불쌍히 여기면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참 주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여 그들도 예수를 믿고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할 것이다.

* 이 길만이 그들도 살고 우리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유럽처럼 아무리 그들에게 복지 혜택을 주고 잘 대해줘도 교리적으로 비무슬림들은 이슬람의 적이기 때문에 힘이 없을 때는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유럽처럼 힘이 생기면 노골적으로 선량한 국민들을 대상으로 테러를 가하고 중동에서처럼 기독교인들과 교회 및 유대인들의 회당을 공격하게 될 것이다. 꾸란의 내용을 이해하고 심취하게 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방해하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적그리스도적인 세력인 이슬람의 악한 영의 정체를 분명히 밝혀 주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동시에 그 영에 속고 있는 무슬림들을 불쌍히 여기며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은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여 영혼을 수술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무슬림들의 눈을 뜨게 해서 인류의 유일한 참 구세주 예수를 영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무슬림들이 예수 믿고 죄 사함 받고 구원받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길 기원한다. 이 길만이 그들도 살고 우리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끝)

/위 글은 한국이란인교회(4him.or.kr)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임을 밝힙니다.

#이슬람 #무슬림 #이만석 #이만석목사 #이만석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