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신학칼럼] 우리 민족 최초 지동설은 누구에게서 어떻게 나왔을까

교회일반
교단/단체
편집부 기자
press@cdaily.co.kr
'지구는 돈다' 말한 '조선의 코페르니쿠스' 홍대용 그리고 김석문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지금의 충남 천안에서 태어난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남양(南陽) 홍씨로 조선 영조-정조 시대를 살았던 조선 후기의 실학자요 과학사상가였다.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한 주자(朱子)는 불교를 허학(虛學)이라 하고 자신의 학문을 실학(實學)이라 부르기는 하였으나 보통, 실학은 조선 후기 정약용, 최한기, 박지원, 홍대용 등의 학문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 실학이라는 말은 사실 훗날 정인보, 안재홍 같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만들어낸 말이었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정약용이나 홍대용이야말로 실학이라는 말에 딱 어울리는 학자들이었다. 홍대용의 할아버지는 사간원 대사간이었고 아버지는 나주(羅州) 목사를 역임하였다. 하지만 그는 선조들과는 달리 별로 과거(科擧)에 연연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성리학의 사회였던 조선 땅에서 그것이 오히려 그의 사상에 자유로운 날개를 단 이유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노론(老論) 집안이었던 그가 자신의 스승이었던 김원행이 가장 존경하는 노론의 대표였던 송시열을 비판한 데서도 알 수 있다.

홍대용의 과학적 소양은 일찌감치 나타났다. 그는 나주 목사로 내려간 아버지를 따라 전라도 나주로 가서는 혼천의 제작의 명인(名人) 나경적을 만나 그와 함께 혼천의(천체의 운행과 위치 관측 기구)와 자명종(일종의 시계)을 만들만큼 과학기술인의 소양을 보인다. 그런 그가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은 북경 방문을 통해서였다. 35세 되던 1765년 11월, 그는 매년 한 차례 정기적으로 청나라로 떠나는 동지사의 사신 일행으로 따라나섰다. 작은 아버지 홍억(洪檍)의 수행관 자격이었다. 작은 아버지 홍억이 서장관(외교문서 및 사건 기록관, 서열 3위)이었던 것이 수행관이 되는 데 작용했다고 본다.

일행은 11월 초 중국으로 떠나 그해가 가기 전 북경에 도착했다.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홍대용은 본격적으로 자신이 북경에 온 목적을 실천하기 시작한다. 바로 선진 학문에 대한 갈증이었다. 그는 엄성(嚴誠) 반정균(潘庭均), 육비(陸飛)와 같은 중국 학자들과 교분을 나누는가 하면 북경 천주당을 여러 번 방문하게 된다. 드디어 서양 종교와 조우를 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종교가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천주교 자체보다는 선교사들이 가진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과 그들의 과학 문명과 책이었다. 그는 서양 건축물과 응접실 벽면에 그려진 천하지도와 천문도를 보고 감탄한다.

서양 선교사들을 여러 번 방문하여 필담을 통해 대화하던 그는 선교사들이 지닌 책에서 천동설(天動說)과 지전설(地轉說)을 비교해 놓은 것을 보았다. 이미 서양에서는 지전설이 널리 퍼져 교회의 천동설과 대립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혹 중국 사람들이 지전설을 믿을까봐, 천동설과 지전설을 비교해 천동설의 옳음을 설파했다. 그 바람에 고대 그리스에서 지전설을 설파한 헤라클레이토스 등의 주장과 다양한 천체관을 담은 '오위력지(五緯曆指, 1638년 간행) 같은 책이 중국에서 간행됐다. 그런데 홍대용은 선교사들의 주장과 여러 책들을 읽고는 선교사들의 강력한 주장을 무시하고, 오히려 지전설이 옳다는 입장에 서게 된다. 눈앞에 펼쳐진 온갖 새로운 과학문물을 체험하고 조선 땅으로 돌아오는 날 그의 손에는 망원경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생각을 글로 남기기 시작한다. 유포문답(劉鮑問答)은 당시 독일계 선교사로 중국의 흠천감정(欽天監正)인 유송령(劉松齡, August von Hallerstein)과 부정(副正)인 포우관(鮑友管, Anton Gogeisl)을 만나 필담을 통하여 천주교와 천문학의 이모저모를 기록한 내용으로, 서양문물에 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과학사상을 담은 의산문답(醫山問答) 역시 북경여행을 배경으로 쓰였다. 의무려산(醫巫閭山)에 숨어 사는 실옹(實翁)과 조선의 학자 허자(虛子) 사이에 대화체로 쓰인 이 글은 그가 북경 방문길에 들른 의무려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홍대용이 볼 때 하늘이 도는 것보다는 지구가 도는 것이 간편할 뿐 아니라 합리적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지구가 하루에 한 바퀴 돌며 땅은 당기는 힘이 있음도 분명히 말한다. 그가 쓴 의산문답을 보면 지구는 둥글고 쉬지 않고 돌며 무한한 우주에서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나의 점으로 표시할 수 없을 만큼 작은 세계이고 사람은 그런 작은 지구의 어느 한 곳에 사는 하찮은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땅은 네모지고 하늘은 둥글다는 당시 동양의 세계관이 모두 중국의 중화사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성리학의 세계관과는 반대로, 땅은 둥글며 중국이 결코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없으며 양반 제도나 신분계급 차별도 순리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사실 이것은 만물에 귀천이 없음을 주장한 천지개벽과도 같은 놀라운 선포였다. 다만 사람들이 그 엄청난 의미를 잘 몰랐을 뿐이다. 홍대용은 이렇게 독창적인 지전설과 우주무한론과 만인만국평등설을 주장했던 것이다.

홍대용은 과거시험이 아닌 음보(蔭補)로 1774년(영조 50)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 및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이 되었고, 이어 1777년(정조 1) 사헌부감찰, 그뒤 태인현감·영천군수를 지냈다. 과거시험을 통한 높은 벼슬 자리보다도 작은 벼슬에 만족하며, 오히려 거문고를 좋아하고 음악과 수학, 기하학,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그는 당대의 주류가 아닌 비주류 학문에 심취하였다. 당시 홍대용이 수학했던 석실서원은 지금의 눈으로 보면 일종의 비주류 학당(서원)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학문이 꿈틀대던 실학의 시발점이 되는 곳이었다. 당시 홍대용은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학자들과 교제하며 새로운 사상 즉 북학(北學)의 바람을 일으킨 사상가요 시대를 성큼 앞서간 탁월한 과학자였다.

그러면 홍대용이 지구가 스스로 돈다고 말한 최초의 한국인일까? 그렇지는 않다. 홍대용이 태어나기 전 이미 지전설을 주장한 또 한사람의 한국인이 있었다. 바로 김석문(1658∼1735)이다. 군수를 지낸 그는 새로운 학문에 열심인 성리학자였다. 홍대용 보다 73년 먼저 태어난 김석문도 중국의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 역(易)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중국 주자학(朱子學)의 대가들이 주장한 삼라만상의 형성과 변화의 이치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선교사가 쓴 한 권의 책을 보았는데 그것이 바로 위에서 소개 된 '오위력지'였다. 이 책에는 천동설을 주장한 프톨레미와 지전설을 주장한 위대한 개신교 천문학자 케플러의 스승 티코 브라헤의 생각이 소개되어 있다.

브라헤는 지구를 중심으로 달과 태양 및 행성이 회전하며, 태양 둘레를 수성, 금성, 목성, 화성, 토성 등이 회전하고 있다고 보았다. 지금 보면 미숙한 천체관이었지만, 김석문은 자신의 성리학적 관점에서 이해한 역을 토대로 브라헤의 견해를 수용한다. 그리고 김석문은 자신이 쓴 '역학도해(易學圖)'에서 여러 행성들이 태양의 주위를 궤도를 따라 돌 뿐 아니라 지구도 남북극을 축으로 1년에 360번 자전한다고 주장했다. 성리학적 관점에서 만물을 움직이게 하는 기(氣)의 흐름으로 볼 때 지구도 움직인다고 본 것이다.

본질로서의 형상과 질료를 다루다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넘어 온 서양 초기 철학과 우주적 차원의 이(理)와 기(氣)를 가지고 인간의 (선한) 본성을 따지러 들었던 성리학은 결국 인간의 철학이라 어느 정도 서로 상통하는 면이 있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인간 중심의 세계였던 조선의 학자들과 관리들은 지구가 돌든 하늘이 돌든 그 문제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만 서양에서는 지동설이 천주교의 신의 입지를 위협한다고 본 점이 달랐다. 이것은 사실 성경 해석에 대한 카톨릭 지도자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와 달리, 조선의 성리학 체계는 우주 질서에 대해 큰 관심을 둘 처지도 아니었고 지동설을 위협하지도, 지동설에 위협을 받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조선 성리학자들의 심각한 주제가 아니었다.

이런 토대 가운데 등장하여 성리학과는 전혀 한 차원 다른 우주의 질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그에 따른 인류와 생명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재구성해보고자 했던 홍대용과 김석문의 놀라운 앞선 생각들이 얼마나 시대를 뛰어 넘는 탁월한 혜안들이었는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큰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를 만났던 홍대용이나 선교사의 책을 접했던 김석문이 모두 결국은 성리학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은 유교 국가의 유교 학자들이었기에 기독교 신앙의 울림에는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이 조금은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창조신학칼럼 #조덕영 #조덕영박사 #창조신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