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규 칼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목회·신학
목회
편집부 기자
veritas@cdaily.co.kr
▲이선규 목사(대림다문화센터 대표ㅣ대림중국교포교회 담임)

[기독일보=칼럼] 매년 이맘때가 되면 8.15 광복절을 맞게 되고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솔로몬의 지혜서라고 일컫는 구약 성서의 잠언에는 인간 생활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평화라는 사실을 구구절절이 언급하고 있다.

“마른 떡 한 조각을 놓고도 화목 하는 것이 육선이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낫다”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송아지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 보다 낫다”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 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다”

아무튼 일생 나라의 제왕을 부귀와 영화를 한 몸에 지니고 살아온 솔로몬의 인생 경험에 의하면 인간 생활에 있어서 최상의 것은 평화롭게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토록 소중한 평화를 삶의 현장에 정착 시키는 일은 요원한 것일까? 평화의 저해 요인은 무엇이 평화보다는 전쟁 연습과 다툼과 불화만이 판을 치는 것일까?

전쟁과 사회적 독점, 그리고 미움이 아닐까? 전쟁과 독점 행위는 그것이 정치권력이든 경제력이든 강자가 일으키거나 저지르는 죄악이지 약자가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도구라는 기도로 유명한 성 프란시스도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심게 하소서” 라고 기도했으리라.

인류의 소망은 ‘패러다이스’(Paradise)의 실현이다. 마태복음 기자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과 ‘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천국을 차지하게 된다는 패러다이스의 구현을 말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미움이 도사리고 있다. 이 미움을 제거하는 데는 오직 사랑만이 가능하다. 미움의 독소는 사랑을 초췌하게 만들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과의 단절과 파멸의 길로 인도한다.

전쟁의 화에 시달려 왔던 예언자 이사야는 그 전쟁과 정치 그리고 경제의 독점 행위 때문에 “평화는 전쟁의 결과”라고 외치지 않았던가?

그런데 평화의 파괴자인 미움은 무서운 적대관계를 초래하며 사람의 마음을 철옹성 같은 굳은 장벽으로 상쇠 시켜 버린다. 이 미움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원한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처절한 보복이 반복 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복병은 그것은 원한에 찬 미움이 아닐까? 원한에 찬 미움은 반드시 보복을 불러 올 것이다. 이 보복은 잡을 수 없는 불길처럼 한 지역을 초토화 시킨 쓰나미와 같이 우리 사회를 삼켜 버리고 말 것이다.
이 불길을 가라앉힐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다. 마땅히 죽음의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복의 공포에 사로잡힌 가인의 머리에 ‘가인을 죽이는 이는 자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표를 붙여 주셨다.

특히 요즘 사드배치 문제로 이론이 분분하다. 부분 그 정당성을 차치 하고 라도 이제 남북이 화해와 대화의 장이 마련되기를 이 소인은 기도할 뿐이다.

‘살인의 폭염’이라 할 정도로 무더위의 기승이 한창이다. 이런 가운데 남미의 브라질 리우에서는 세계의 제전이 열리고 있다. 경기의 승부도 중요 하겠지만 화합과 포용의 제전이기를 기원 한다.

전쟁의 참상도 인간의 모든 불안과 소란도 결극은 평화를 위한 것이다. 전쟁 없는 평화는 있어도 평화 없는 전쟁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평화의 요체는 참된 정의의 실현이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주장하였다 무폭력의 대명사 였던 마하트마 간디도 비슷한 말을 남겼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복 있는 자다(마태 5:9).

#이선규목사 #이선규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