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교회로 성장한 '집단개종운동', 하류계층 문맹 농부로부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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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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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파트너스, 슬라밧 성경신학교 아쉬케나즈 아시프 칸(Ashkenaz Asif Khan) 총장 초청 강연
파키스탄의 슬라밧 성경신학교 아쉬케나즈 아시프 칸(Ashkenaz Asif Khan) 총장(왼쪽). ©홍은혜 기자

[기독일보 홍은혜 기자] 극단주의 무슬림들의 지구촌 테러로 말미암아 이슬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커진 요즘, 미션파트너스(상임대표 한철호 선교사)가 '무슬림과 함께 살아가는 소수 크리스천들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을 마련해 관심을 모았다.

지난 23일 신반포교회 비전센터에서 열린 이번 자리에는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의 슬라밧 성경신학교 아쉬케나즈 아시프 칸(Ashkenaz Asif Khan) 총장을 초청, 소수자의 진솔한 삶과 사역에 대해서 듣고, 이슬람 국가 안에서 무슬림과 함께 사는 소수 기독교인들의 지혜와 전도를 배우고 토론했다.

아쉬케나즈 아시프 칸 총장은 먼저 파키스탄 교회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결코 인간의 생각과는 같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는 "놀라운 일이 이교도들 가운데 교회개척을 하고자 하는 잘 계획된 전략에 의해서가 아니라, 펀잡 지방의 시골 농부이자 복음을 하류계급 사람들에게 전하고 다니던 '디트'라고 하는 새로운 개종자로 인해 일어났다"고 했다.

디트는 평범한 기독교인 농부로, 시알코트에 있었던 장로교 선교사회의 사무엘 마틴 목사에게 세례를 받은 인물이다. 그는 문맹에 다리를 저는 하류계급 출신의 시골사람이었고, 동물의 가죽을 얻어서 파는 것이 직업이었다. 사무엘 목사는 처음 세례를 그에게 주는 것을 주저했지만, 디트가 질문에 올바르게 대답하는 것을 보고 교리공부를 시키지 않고 세례를 줬다고 한다. 그러나 디트는 선교본부에 머무는 것을 거절했고, 돈을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이후 3달 동안 4인의 첫 개종자를 데리고 왔다.

아쉬케나즈 아시프 칸 총장은 "이 새로운 바람은 집단개종운동(Mass Movement)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그리스도께 돌아왔기 때문"이라 했다. 전략적 측면에서 보면 이 운동은 토착적 교회개척 운동인데, 추흐라(Chuhra)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펀잡지역 어디든지 번져나갔다. '추흐라'는 인도의 카스트 중 하나로, 파키스탄의 한 부족으로 펀잡지역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청소가 이들의 주된 직업이었는데, 하는 일로 인해서 힌두의 카스트 제도에서는 불가촉 천민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당시 장로교 선교사를 포함한 선교사들은 이 운동의 결과를 회의적으로 바라봤다고 한다. 디트의 회심이 일어난지 12년이 지난 1885년이 되서야 한 선교사는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의 지혜로서가 아닌 주님의 지혜롭고 은혜로우신 인도하심에 의해 '근본적인 실수'를 수정하고, 주님께서 손수 힘쓰신 그 수준으로 내려가서야 이 길에 들어서게 됐다. 우리가 처음 시도했던 것처럼, 큰 도시에서 주요한 선교본부와 상류계급의 사람들로 부터 시작하는 위에서 아래로의 방법이 아닌, 우리는 추흐라 사람들에게 내려가서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당시 많은 선교사들과 선교단체들이 이 운동을 의심했고, 때로는 '청소부 선교'라며 조롱을 당하기도 했다. 아쉬케나즈 아시프 칸 총장은 "추흐라 출신의 디트가 속한 지역이 시알코트 선교회의 지역에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하류계급의 사람들을 개종하는 것은 선교회의 전략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히 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모든 선교회들이 현재 파키스탄 교회를 가져온 추흐라의 전도가 그들의 어떠한 전략으로 부터 비롯된 것이 아님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쉬케나즈 아시프 칸 총장은 "이 집단 개종이 서양 선교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지역 출신의 읽고 쓸줄 모르는 한 남자에게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디트와 그의 친구들에 의해서 시작되고 주도된 집단개종에 대한 장로회 연례회의 기록(1884)을 소개했다.

"연례회의에서 추흐라 개종자에 대한 보고서가 수십 수백개가 발표됐고, 이 모든 일은 디트와 그의 친구들에 의해서 집에서 집으로 마을에서 마을로 복음이 전해진 결과이다. 그들은 식민지 세력에 복속되기를 거부했고, 자신들의 집과 마을로 돌아가 살아가며 복음을 증거하기를 원했다."

이후 디트는 선교사에게 훈련을 받거나 고용되지 않고 스스로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고 한다. 7년이 지난 후 고용되기는 했는데, 월급은 6루피(약 3달러) 정도로, 그 당시 선교사 월급은 1,200달러 정도였고 추가로 집 등의 시설을 제공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본다면 정말 열악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디트는 선교본부에 머물지 않고 돈이나 직업을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마을로 돌아가 온갖 모욕과 구타를 견뎌내고 집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는 마을 우물에서 같이 물을 마시는 것조차 거절 당할 정도로 하류계급 중 더 천한 계급의 사람이 됐지만, 믿음을 지켰으며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했다. 그는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했고, 자신의 가족들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개종 3개월 만에 아내와 딸 그리고 세 명의 가까운 친척들을 마틴 목사에게 데려와 세례를 받게 했다.

결국 60년 간 열심을 통해서 1930년 모든 추흐라 계급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됐다고 한다. 이 일은 파키스탄이 독립국가가 된 1947년 이전에 이뤄졌다. 그리고 나서 파키스탄은 '이슬람 공화국'으로 선포됐다.

역사적 배경을 설명한 아쉬케나즈 아시프 칸 총장은 이후 무슬림을 대할 때의 자세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다. 그는 ▶무슬림들의 상처(실제이든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든 간에) 공감해야 한다 ▶과거 기독교인들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 ▶눈 높이에 맞는 공동체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무슬림들을 프로젝트가 아니라, 사람으로 봐야 한다 ▶우리가 경전의 사람, 기도의 사람으로 인식되어야 하고, 그들과 함께 기도할 기회를 찾아야 한다 ▶사회적 문제에 공동으로 대처할 기회를 찾아야 한다 ▶상처를 나눠야 한다(장례 등)고 주장했다.

한편 아쉬케나즈 아시프 칸 총장은 1959년 파키스탄의 아보타바드에서 출생했으며, 같은 도시의 기독교 학교와 정부학교에서 고등교육까지 마쳤다. 마닐라의 Asian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학위를 받았고, 지난 20년간 사역을 통해 학교를 빛낸 동문의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5년부터 현재까지 파키스탄 스라밧성경신학교의 학장을 맡고 있으며, 무슬림 주류인 지역에서 소수 기독교인 목회자로 살면서 무슬림 이웃과 분리보다는 더불어 사는 삶을 지향하고 있다.

행사는 인터서브, 설악포럼, FmnC, GMF, OMF, GP, SIM, 열방네트웍, WEC 등이 함께 했다.

23일 신반포교회 비전센터에서 열린 미션파트너스 세미나. 많은 이들이 이슬람 국가 내 소수 기독교인들의 삶을 알고자 했다. ©홍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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