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네 서있는 곳이 어디냐?

목회·신학
편집부 기자
이선규 목사(서울 금천교회)ㅣ창세기 3:1~9
▲이선규 목사ㅣ금천교회

우리 성도들이 교회에서 듣는 말 중에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은혜의 색깔을 아십니까? 물으면 대답을 잘못합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의 보혈을 생각 하면서 붉은 빛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환희와 기쁨이 있기 때문에 한 가지 색보다는 무지개 색으로 나탄 낸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이해에 따라 다르게 설명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분명한 것이라고 단정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은혜를 무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무런 대가없이 그냥 주시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은혜란 신앙과 생활 속에서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 아 그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은혜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닫는 것도 막연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과 그 범죄 한 인간을 버리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극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깨달을 것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것이 바로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다가 기도 하다가 찬송을 부르다가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서 생활의 모든 면에서 하 나님의 사랑이 깨달아지면 그것이 바로 은혜의 역사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바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은혜 받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 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더러 동산 중안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을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하여 사단이 뱀의 모양으로 인간을 범죄 하도록 유혹 하였습니다.

말도 안 되는 질문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단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 하나만을 제외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였느냐? 엉뚱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나님이 다 주시고 하나만 금하신 것을 마치 다 금하신 것처럼 착각하여 범죄 하게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받은 은혜와 사랑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탄은 조금만 어려움만 와도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히 버리신 것처럼 생각 하 게 만듭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고 버리신 것처럼 오해하여 실망케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자는 자기 멋대로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덧붙일 뿐 아니라 먹는 날에는 죽을까 하 노라라고 하는 하나님이 하지도 않은 말까지 포함시켜 과장 왜곡함으로 이미 유혹에 넘어가 죄를 범하고 "내가 숨었나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악을 저지른 인 생들은 자신을 하나님으로 부터피할 수 있으리라. 착각을 합니다.

시편 13편7절에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 앞에서 어디로 피 하리이까?"
그러므로 우리들 자신이 행하는 죄악들이 은폐 될 수 있다는 착각 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아담이 왜 숨었습니까? 죄지은 인간은 하나님의 눈을 피하려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피하려 해도 하나님의 눈은 피할 수 없습니다. 마태10:26 감 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계17:2절에 보면 심판직전의 인간들을 물위에 앉은 음녀에게 취한 것으로 묘사 했습니다.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 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 하였다고 했습니다. 물위에 앉은 음녀는 향락, 사치, 방종, 폭력, 등의 웅집된 도시 문명을 가리킵니다.

이런 것에 왕들도, 장군도, 장사꾼도 종교인도 취하여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범한 인간은 그 숨어 살려는 것 때문에 자기의 존재를 상실하고 자기의 목적을 상실하고 보면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불안에 떠는 실존만 남습니다.

이렇게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 하게 만듭니다.

6절에 보면 사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여인은 시험에 넘어 갔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 암 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 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고 하였습니다. 먹으면 분명 독인데도 시험에 빠진 어리석은 인간은 그것이 마치 인간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시험은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풍부하게 만들고 삶의 질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 줄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경고하기를 "근신 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했습니다.

동물 중에 굶주린 사자처럼 무서운 동물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탄의 세력이 얼마나 위협적 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와서 사탄의 책략은 죄의 개념을 없애는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하나님께로 부터 떼어놓는 것입니다.

현대의 탕자는 단순히 재물을 날려버리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알콜 마약 성적타락 질병 정신적 파괴 동성애 같은 것으로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어렴풋한 의식조차 못 갖게 될 정도로 완전히 파멸된 인격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새 생명은 이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을 계속 바르게 간직해가며 새 생명을 가진 자로 살아가는 길은 계속적인 영적 투쟁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2:16절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핵심 구절인 9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 디 있느냐.?고 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담 이란 말은 '흙 먼'지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아 하신 것은 사람아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고가는 모든 인간들 범죄 한 조상의 피를 받아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아담아라고 부르신 말씀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실 때 아담이 있는 곳을 모르셔서 부르신 것입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 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아담을 부르셨습니까?

범죄 하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기에 죽어야 마땅하고 형벌을 면치 못하는데 그래서 왜 부르셨습니까?
거기에는 인간을 포기하지 못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결코 버릴 수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신 것입니다.

로마서 5: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고 하신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 하십니다. 아무리 죄를 범 하였어도 포기하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깨닫지도 못하고 범죄하고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게 하신 것입니다.

카드 빛으로 고생하는 자식들 때문에 부모들까지 함께 희생당하고 있다는 보도를 읽어 보았습니다. 철없는 아들이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현찰이 없어도 되는 카드로 고가 물품을 사들여 빛이 천만 원 2천만 원 어느 경우는 억대까지 간다고 합니다.

물론 법적으로 부모가 갚아야 한다는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식이 신용 불량자가 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어서 고민하다 심지어는 자살까지 한 부모까지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육신의 부모도 어리석은 자식이 잘못되는 것을 보지 못하여 자신이 책임을 걸머지려 고 합니다.
그 자식이 불행하게 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고민하다 자살까지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까지 내어주신 사랑의 하나님 이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지금도 우리를 부르시는 하늘 아버지께서도 분명 우리를 사랑 하시고 구원하여 그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하늘의 상속자가 되기를 원 하시기에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아담이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주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아담은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우리의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예배 드리는 자리 말씀 듣는 자리 기도하는 자리 봉사하고 헌신하는 자리와는 거리를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쫒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시1:1-3)

아담은 말씀 앞에 순종하는 자리 믿음의 자리를 떠나므로 아담뿐만 아니라 아담의 후예인 전 인류를 무덤 속에 집어넣는 조상이 되고만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때 아담이 하나님의 심정을 깨달았다면 나무 뒤에 숨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와 솔직하게 잘못을 내어놓고 회개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아담은 이러한 좋은 기회를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놓치고 말았습니다. '너는 지금가야 할 곳으로 가고 있느냐? 감당해야 할 사명의 자리를 지키고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 앞에 대답 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시고 아무개야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때 예 제가 여 기 있습니다. 라고 떳떳이 말 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하며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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