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크리스토퍼 라이먼의 기고글인 '기도에 응답이 없다고 해서 믿음이 약하다는 뜻은 아니다'(Unanswered prayer isn't proof of weak faith)를 10월 13일(현지시각) 게재했다.
크리스토퍼 라이먼은 기독교 작가이자 교육자이며 여섯 자녀의 아버지다. ‘원 스텝 포워드(One Step Forward)’를 통해 신앙과 고난,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이야기하는 방식에는 때로 미묘한 위험이 숨어 있다. 우리는 더 간절히 기도하고 굳게 믿으며, 의심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을 기대하라고 격려한다. 성경이 구하라고 가르치며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사실도 강조한다. 이는 중요한 성경적 진리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러한 진리를 원하는 응답을 얻어내는 공식처럼 받아들일 수 있다.
충분히 기도하고 강하게 믿으며 합당한 믿음을 보이면 하나님께서 원하는 결과를 주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다 바라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무엇이 잘못됐는지 찾기 시작한다. 기도가 부족했는지, 숨겨진 죄가 있는지, 누군가 의심했거나 믿음이 모자랐던 것은 아닌지 묻는다. 이 과정에서 신앙의 확신은 하나님의 주권에서 기도하는 사람의 행위로 옮겨간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올바른 조건을 갖추는 우리의 능력에 달린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번영신학은 이러한 가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올바르게 믿고 확신에 차서 말하며 후하게 헌금하면 건강과 부, 성공이 따라온다고 가르치는 방식이다. 하나님의 축복이 영적 투자에 대한 보상으로 바뀌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번영신학을 표방하는 교회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 가르침을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도 비슷한 가정을 은연중에 받아들일 수 있다.
특정한 결과를 위해 기도하고 그 일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한다. 그러나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신의 기도나 믿음에 무엇이 부족했는지 의심한다. 심각한 질병을 앓던 아이가 회복됐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렇다면 회복되지 않은 아이의 부모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들이 덜 간절히 기도했거나 충분히 믿지 않았기 때문인가.
이러한 결론에 동의할 그리스도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심코 던지는 질문이 같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믿음이 의지하는 하나님보다 눈앞의 결과로 믿음을 평가하는 것이다. 이는 이미 고통받는 사람에게 자신의 상황이 영적 상태를 드러내는 증거라는 또 하나의 짐을 지울 수 있다.
치유를 구하는 가족이 마주한 질문
필자의 딸 클로이(Cloe)는 삶의 대부분을 심각한 심장 합병증과 함께 보냈다. 여러 차례 개흉 수술을 받았고, 시술의 실패와 장기 입원, 생사를 장담하기 어려운 위기를 견뎠다. 아내 로라와 필자도 하나님께서 개입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시간을 보내왔다.
그동안 교인과 사역 지도자를 비롯한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익숙한 질문을 받았다. “딸의 치유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 보았는가.”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필자 가족은 치유를 위해 기도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도를 부탁했다. 병실과 대기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지금도 딸의 치유를 위해 기도한다.
그러나 때로는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딸이 정말 치유될 것이라고 믿는가.” 그 질문에 담긴 선한 의도를 이해한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지 확인하고 격려하려는 뜻일 것이다. 그 점에서 필자 가족의 확신은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클로이를 치유하실 수 있다고 믿는다.
딸의 삶에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경험하기도 했다. 불가능해 보였던 위기를 이겨내는 모습을 보았고, 길이 보이지 않을 때 필요한 힘과 자원, 사람과 기회가 주어지는 순간을 지켜봤다. 그러나 합병증이 악화되고 시술이 실패하는 때도 있었다. 한 위기가 지나면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으며, 오랜 기도에도 클로이는 아직 완전한 치유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러한 현실은 중요한 구분을 요구한다. 하나님께서 치유하실 수 있다는 사실과 특정한 상황에서 치유하시기로 뜻하셨다는 확신은 같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딸을 고치실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그분의 능력을 신뢰하는 일이다. 그러나 필자가 굳게 믿는다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반드시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하셔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기대를 그분의 주권보다 앞세우게 된다.
욥의 친구들이 범한 오류
욥기는 이러한 혼동을 돌아보게 한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으로 소개된다. 그러나 그의 신실함이 고난을 막아주지는 않았다. 그는 재산과 자녀를 잃었고 건강마저 잃었다.
친구들은 처음에 욥에게 귀한 위로를 제공했다. 고통받는 그의 곁에서 이레 동안 말없이 함께했다. 그러나 이후 고난의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의에 보상하고 악을 심판하시므로, 욥의 고난에는 그가 인정하지 않는 죄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들의 설명은 눈에 보이는 상황이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 상태를 직접 반영한다는 가정에 기초했다. 그러나 욥기 앞부분은 독자에게 친구들이 알지 못했던 사실을 보여준다. 욥의 고난은 숨겨진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었다. 친구들은 하나님의 공의에 관해 아는 바를 개별 상황에서 그분이 하시는 일에 대한 완전한 지식으로 착각했다. 욥기 마지막에서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에 관해 옳게 말하지 않았다고 책망하신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도 경고가 된다. 건전한 신학적 신념이라도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범위를 넘어 모든 상황에 적용하면 잘못된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능력이 있으시며 백성의 기도에 귀 기울이신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그것이 개별적인 고난의 이유와 목적까지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고난을 믿음이 부족하다는 증거로 단정하면 욥의 친구들이 범한 오류를 되풀이하게 된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의 신앙을 입증해야 한다는 부담까지 더하는 것이다.
기도의 확신은 하나님의 뜻에 기초한다
성경은 기도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로 가르친다. 예수님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씀하셨고, 야고보는 의인의 간구가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가르침은 인내하며 기도하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의지하도록 격려한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분의 역사에 참여하는 통로다.
그러나 응답의 방식과 때를 결정하는 권한은 하나님께 있다. 요한일서 5장 14절은 기도하는 담대함의 근거를 밝힌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그 확신은 감정의 강도나 기대의 크기보다 하나님의 성품과 지혜, 뜻에 기초한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간다. 그러나 개별 상황에서 그분께서 무엇을 이루고 계시는지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따라서 신실한 기도에는 진실한 간구와 함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신뢰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겟세마네에서 드리신 예수님의 기도는 이를 보여준다. 주님은 다가올 고난 앞에서 잔을 옮겨주시기를 간절히 구하셨다. 동시에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기도하셨다. 그 기도에는 고난을 앞둔 깊은 번민과 아버지의 뜻을 향한 순종이 함께 담겨 있었다.
잔은 거두어지지 않았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셨다. 그분의 고난은 구속의 역사에서 유일한 의미를 지닌다. 동시에 그분의 기도는 간절히 구하는 일과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일이 함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참된 신뢰는 가장 절실한 소원까지도 하나님의 지혜와 권위에 맡기는 데서 드러난다.
완전한 회복을 기다리는 시간
필자 가족에게 이러한 진리는 추상적인 신학 원리에 머물지 않는다. 완전한 치유를 기다리면서도 매 순간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 속해 있지만 여전히 고통이 있는 세상에서 몸의 회복을 기다린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광을 소망하는 동안 삶을 빚어가시는 그분의 사역도 계속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십자가에서 완성됐지만 피조 세계의 최종적인 회복은 아직 기다리고 있다. 신자들도 질병에 취약한 몸으로 살아가고, 관계의 어려움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겪는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것과 아직 온전히 경험하지 못한 것 사이의 긴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존재한다. 우리의 소망은 그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에 뿌리를 둔다.
클로이의 합병증이 계속되는 구체적인 이유를 필자는 알지 못한다. 어떤 시술은 성공하고 다른 시술은 실패한 이유, 어떤 기도에는 즉각적인 응답이 주어진 듯하지만 다른 간구에는 여전히 기다림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성경은 모든 사건의 목적을 낱낱이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을 신뢰할 근거를 제공한다.
모든 이유를 아는 것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다르다. 이 차이를 인정하는 일은 필자 가족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중요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을 신뢰할 근거까지 사라졌음을 뜻하지는 않았다.
원하는 응답과 다른 모습의 공급하심
필자가 증언할 수 있는 것은 날마다 가족을 붙드신 하나님의 공급하심이다. 의료진과 가족, 친구와 교회 공동체,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 필요한 돌봄을 받았다. 두려움과 탈진 속에서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경험했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을 고난의 길에서 다른 사람의 아픔을 더 깊이 이해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워왔다. 고통이 계속된다고 해서 그동안 경험한 사랑과 도움, 새 힘이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경험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이해를 깊게 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변함없는 성품에 기초한다. 공급하심은 간절히 구했던 것과 다른 모습으로 주어질 수 있으며, 하나님의 목적은 즉각적인 결과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그렇기에 기도와 다른 결과를 마주할 때, 무엇에 믿음을 두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치유라는 결과만을 확신의 토대로 삼으면 질병이 계속될 때 믿음도 흔들릴 수 있다. 재정적 형편이 나아지는 것만을 기대한다면 궁핍 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기 쉽다. 관계 회복만을 믿음의 증거로 삼는다면 갈등이 지속될 때 평안을 잃을 수 있다.
이러한 흔들림은 고통 속에서 실제로 경험하는 어려움이다. 그때 필요한 것은 믿음이 약하다는 책망보다, 믿음의 기초를 다시 바라보도록 돕는 위로와 돌봄이다.
믿음은 결과를 얻어내는 능력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이다.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길이 열렸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근거는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는 영적 능력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그분의 은혜에 있다. 복음은 우리의 시선을 자신의 확신이나 성취에서 그리스도의 충분하심과 하나님의 약속으로 돌린다.
필자 가족은 지금도 클로이의 완전한 치유를 위해 기도한다. 딸의 몸이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기를 소망하며, 그동안 허락된 회복과 도움에 감사한다. 앞으로 또 다른 합병증이 생길지, 예상하지 못한 회복이 찾아올지, 어떤 상황을 마주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 가족을 붙드신 하나님의 성품을 계속 신뢰하려 한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어디에 믿음을 두고 있는가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면서도 그 능력이 반드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기대를 내려놓기는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은 특정한 응답에 대한 확신보다 더 깊은 의존으로 나아간다.
이해가 한계에 이르러도 하나님의 지혜를 신뢰하고, 상황이 여전히 고통스러워도 그분의 선하심을 의지하며, 앞날이 보이지 않아도 그분의 신실하심을 붙드는 것이다. 믿음은 모든 결과를 이해하거나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능력이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그분을 계속 신뢰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