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조지 아크허스트의 기고글인 '용서가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처럼 느껴질 때'(When forgiveness feels like the problem, not the solution)를 10월 13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조지 아크허스트는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 출신의 사역자이자 저자로, 군 통신부대에서 복무하던 중 거듭남을 경험하고 에반젤 성경학교에서 공부했다. 1990년대 후반 미국으로 이주한 뒤 정보기술(IT) 전문가로 일하면서 기독교 교육과 사역을 이어왔다. 1980년대 초부터 어린이와 성인을 대상으로 주일학교를 가르쳤으며, 기독교 교육 분야에서 여러 상을 받았다. 현재 에벤에셀 하나님의성회 교회 영어부의 사역자이자 수석 장로로 섬기며, 거듭남과 용서, 하나님, 죄를 주제로 한 저서 네 권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성경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용서는 널리 미덕으로 여겨진다. 종교 공동체는 용서를 가르치고, 가정에서도 이를 권장한다. 사람들은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으로 용서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가치에 동의하는 것과 실제로 용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용서는 여전히 실천하기 어려운 원칙 가운데 하나다.
어떤 사람에게 용서는 분노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갈 기회를 준다. 반면 다른 사람에게는 이미 충분히 고통받았는데도 감당해야 하는 또 하나의 짐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용서는 문제의 해결책인가, 아니면 그 자체로 또 다른 문제가 될 수 있는가.
그 답은 용서 자체보다 우리가 용서를 어떻게 이해하고 접근하며, 무엇을 기대하는지에 달려 있다.
해결책이 또 다른 부담이 될 때
용서는 상처를 치유하고 원한을 내려놓으며, 가능하다면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는 ‘용서’라는 말 자체가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다.
굳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경우를 생각해 보자. 배신은 극심한 고통을 안기고 자존감을 흔들며 소중한 관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 그런 사람에게 “이제 용서하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들리겠는가. 자유를 향한 초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고통을 덮어두라는 요구로 느낄 수도 있다.
문제는 용서를 가해 행위를 인정하거나 묵인하는 일로 받아들이는 데서 생긴다. 피해자는 무슨 일이 있었고 얼마나 깊이 상처받았으며 그 경험이 얼마나 부당했는지 기억한다. 따라서 용서하라는 권유가 억울함을 표현할 권리마저 내려놓으라는 요구처럼 들릴 수 있다.
용서가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거나 책임을 면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다시 상처받을 위험을 감수하며 관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러한 오해가 해소되지 않으면 용서는 치유의 길이 아니라 또 다른 고통으로 다가온다.
상처가 마음을 지배할 때
용서의 가치를 이해하려면 상처와 원한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살펴야 한다. 상처를 받은 뒤 분노와 실망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이러한 감정은 자신의 경계가 침해됐거나 부당한 일이 일어났음을 알려주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건이 지나간 뒤에도 그 기억이 일상을 지배하면 고통은 계속된다. 당시의 대화를 반복해서 떠올리고, 수치스러웠던 순간을 곱씹으며, 다르게 대응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기도 한다. 상대가 어떻게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는지 생각할 때마다 분노와 슬픔이 되살아난다.
그사이 상처를 준 사람은 이미 자신의 일상을 이어가고 있을 수 있다. 사건은 끝났더라도 피해자의 생각과 감정에는 그 영향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통을 겪는다는 이유로 피해자를 탓해서는 안 된다. 다만 과거의 일이 앞으로의 삶까지 계속 지배하지 않도록 회복의 길을 찾을 필요가 있다.
용서는 그 과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부당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복수심과 원한에 삶 전체를 내주지 않도록 돕는다. 과거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데서 벗어나 치유와 미래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상처받았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지만, 남은 삶이 반드시 그 사건에 얽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용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용서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무엇을 요구하는지에 대한 오해다. 용서는 상대의 행동이 괜찮았다고 인정하는 일인가. 과거를 기억에서 지우는 일인가. 관계를 상처받기 이전의 상태로 반드시 되돌리는 일인가.
용서는 이러한 요구와 구별해야 한다. 용서한다고 과거의 사실이 바뀌거나 잘못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잃어버린 신뢰도 용서하겠다는 결정만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신뢰를 다시 세우려면 상대가 책임을 인정하고 실제로 변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용서와 화해 역시 같은 의미가 아니다. 화해는 관계를 다시 세우는 과정이므로 양측의 참여가 필요하다. 건강하지 않거나 위험한 관계로 돌아가지 않고도 용서할 수 있다. 자신을 보호하는 경계를 유지하면서 원한을 내려놓는 길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은 중요하다. 용서를 이유로 피해자를 다시 위험한 상황에 밀어 넣거나 관계 회복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용서가 안전과 존엄을 포기하라는 요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 신앙에서 용서를 가르치는 방식
기독교에서 용서는 어려운 관계를 관리하기 위한 실용적인 방법을 넘어 신앙의 중요한 원리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14~15절에서 다른 사람을 용서할 것을 강조하셨다. 에베소서 4장 32절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친절하게 대하고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라고 권면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을 전할 때는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의 현실도 헤아려야 한다. 용서하기로 결심했다고 고통스러운 감정이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슬픔과 실망, 분노를 다루고 마음을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성경의 용서에 관한 가르침을 피해자의 입을 막는 도구로 사용해서도 안 된다. 복음은 복수심을 내려놓고 자비를 베풀도록 부르지만, 악을 선으로 포장하거나 해로운 행동을 묵인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잘못을 밝히고 책임을 묻는 일은 용서와 함께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의미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 채 용서만 요구하면, 용서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에게 정죄감만 더할 수 있다. 용서를 가르치는 공동체는 피해자가 또 다른 부담을 떠안도록 하기보다, 진실과 안전을 지키며 자유와 회복을 향해 나아가도록 도와야 한다.
용서를 만병통치약처럼 제시해서는 안 된다
용서는 가치 있는 일이지만 모든 상처를 즉시 해결하는 방법으로 제시해서는 안 된다. 비교적 작은 갈등은 솔직한 대화로 풀릴 수 있다. 그러나 깊은 배신이나 오랜 학대,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에게는 충분한 시간과 지속적인 지지가 필요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용서하라”는 말만 건네면 상대가 겪은 복잡한 고통을 가볍게 취급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용서는 가해자의 책임을 덮거나 피해자에게 침묵을 요구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용서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피해자가 자신의 상처까지 죄책감으로 받아들이게 해서도 안 된다.
동시에 용서가 어렵다는 사실만으로 그 가치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용서를 격려하는 일과 상처가 이미 나은 것처럼 행동하도록 강요하는 일을 구별하는 것이다. 회복을 위해서는 상처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용서의 의미를 이해하며, 자신을 보호할 경계를 세울 수 있어야 한다.
용서는 해결책의 중요한 일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유일한 해결책은 아니다. 필요한 돌봄과 지원, 안전 확보와 책임 규명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용서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 한다
용서가 해결책인지 문제인지 묻기 전에, 우리가 용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용서를 악행을 묵인하거나 정의를 포기하는 일, 과거를 잊거나 모든 관계를 억지로 복원하는 일과 혼동하면 상처받은 사람에게 또 다른 짐을 지우게 된다.
반면 일어난 일의 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원한이 삶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면, 용서는 치유와 자유의 길을 열 수 있다. 그 과정에는 시간이 걸릴 수 있고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다. 관계를 정리하거나 경계를 다시 세우는 어려운 선택이 따를 수도 있다.
용서의 가치는 상처가 없었던 것처럼 만드는 데 있지 않다. 과거의 고통이 미래 전체를 결정하지 않도록 돕는 데 있다. 그 의미를 이해할 때 용서는 또 하나의 의무를 넘어, 자유롭게 앞으로 나아가는 길의 일부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