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예수: 위로자이신 주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을 회복하라

로빈 슈마허(Robin Schumacher) ©기독일보 DB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로빈 슈마허의 기고글인 "요한계시록 속 두려운 예수님의 모습에서 배우는 교훈"(What we learn from the scary Jesus of Revelation)을 10월 12일(현지시각) 게재했다.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슈마허는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많은 책을 냈고 미국 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얼마 전 필자는 “우리는 예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글을 썼다. 많은 사람이, 심지어 챗GPT도 그 대답은 ‘아니오’라고 생각했다. 필자 역시 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사랑과 긍휼, 자비와 용서를 보여주신다. 길 잃은 사람들에게 평안과 치유, 소망을 주시며 구원의 은혜를 선포하신다. 이 모든 것은 분명한 진리다.

그러나 성경을 계속 읽다 보면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예수님의 또 다른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이곳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일곱 교회에 말씀하신다. 그 말씀에는 칭찬뿐 아니라 준엄한 책망도 담겨 있다. 주님은 교회들의 행위와 실패, 타협과 인내를 아시며, 그들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영적 상태까지 꿰뚫어 보신다. 불순종에 따르는 경고 역시 실제적이고 엄중하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라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이 메시지를 단순한 지식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의 영적 상태를 살펴야 한다.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예수님은 교회들을 향해 “내가 아노라”는 말씀을 반복하신다. 그분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그렇기에 주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책망하시는지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른 교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문제를 설명하면서 사랑의 질서를 중요하게 다뤘다. 잘못된 대상을 사랑하는 것뿐 아니라 사랑해야 할 것들의 우선순위가 뒤바뀌는 것도 문제라는 뜻이다. 에베소 교회의 모습은 이러한 문제를 돌아보게 한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의 수고와 인내를 칭찬하셨다. 그들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고, 거짓 사도들을 분별했으며, 주님의 이름을 위해 견디고 낙심하지 않았다. 이러한 신실함은 오늘날 교회도 본받아야 한다.

그러나 칭찬이 책망을 없애지는 않았다. 예수님은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고 말씀하셨다. 교리적 분별력과 열심이 있더라도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상태를 가볍게 볼 수는 없었다. 주님은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경고하셨다.

바른 가르침을 지키고 잘못을 분별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사랑의 실천이 밀려나서는 안 된다. 세상에 빛을 비추어야 할 교회는 자신이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만 아니라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도 살펴야 한다.

고난이 곧 하나님의 책망을 뜻하지는 않는다

시련이 끊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진노하셨거나 자신을 외면하신 것은 아닌지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고난 자체가 하나님의 불신임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서머나 교회는 예수님께 책망받지 않았다. 주님은 그들의 환난과 궁핍을 아셨으며, 앞으로 겪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어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고 약속하셨다. 이 말씀은 고난 가운데 있는 신자들에게도 위로와 소망을 준다.

고통을 겪는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신앙이 실패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찰스 스펄전도 질병과 깊은 고뇌, 아내의 건강 문제와 여러 비판 속에서 사역했다. 그럼에도 그의 설교와 사역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다. 신실함과 고난은 서로 양립할 수 있다.

교리와 삶의 타협을 경계해야 한다

‘모든 길이 하나님께로 통한다’는 말은 구원의 길이 모두 같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다만 누구나 결국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는 의미에서는 우리의 믿음과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하는 표현이다. 중요한 질문은 그분 앞에 섰을 때 어떤 판단을 받게 되는가이다.

신약성경 곳곳에는 거짓 가르침에 대한 경고가 담겨 있다. 잘못된 믿음이 드러날 때까지 문제를 미루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버가모와 두아디라 교회를 엄하게 책망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버가모 교회는 박해 속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붙들었고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두아디라 교회 역시 사랑과 믿음, 섬김과 인내를 보였으며 이전보다 더 많은 일을 행했다. 그러나 두 교회는 우상숭배와 음행으로 이끄는 가르침을 용납하는 문제에서 책망받았다. 신앙적 열심이나 과거의 충성이 현재의 타협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다른 교회나 교단의 잘못을 지적하는 일은 비교적 쉽다. 그러나 같은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살피는 일은 더 어렵다. 성경에 어긋나는 가르침이나 생활 방식을 자신도 편의에 따라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지 정직하게 점검해야 한다.

살아 있다는 평판과 실제 영적 상태는 다를 수 있다

필자는 산상수훈의 다음 말씀을 읽을 때마다 깊은 경각심을 느낀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모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이 말씀은 사데 교회를 향한 경고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사데 교회에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평판과 주님께서 보시는 영적 실상은 다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녔다고 해서 삶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가치와 방식에 무비판적으로 동화되고 신앙의 열매를 잃었다면, 자신의 상태를 돌아봐야 한다. 예수님은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계 3:2)고 촉구하신다. 이 경고는 절망에 머물라는 말이 아니라 깨어나 회복하라는 부르심이다.

작은 능력 가운데서도 신실할 수 있다

머시미의 찬양 ‘Even If’에는 산을 옮길 만큼의 작은 믿음을 이야기하며, 지금 자신에게 남아 있는 것이 그 작은 믿음뿐이라는 고백이 등장한다. 믿음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는 대목이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한 말씀도 비슷한 위로를 준다. 예수님은 그들이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말씀을 지키고 자신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셨다(계 3:8). 그들의 능력이 크지 않다는 이유로 책망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제한된 여건 속에서도 지켜온 신실함을 인정하셨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능력의 크기보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태도다. 자신이 강하지 않다고 느끼더라도 그리스도께 충실할 수 있다.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말씀을 붙들고 주님의 이름을 저버리지 않는 삶이 중요하다.

풍요와 자기만족이 신앙을 가릴 수 있다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고 말씀하시며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셨다. 이 가르침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말씀과도 연결된다.

우리에게 가장 큰 위험은 박해나 가난, 육체의 연약함만이 아닐 수 있다. 안락함과 자기만족에 빠져 자신의 영적 상태를 살피지 않는 신앙이 더 치명적인 위험이 될 수 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이 부유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곤고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상태임을 알지 못한다고 지적하셨다. 주님은 그들의 미지근함을 책망하시며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고 경고하셨다.

필자 역시 이러한 말씀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스스로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주님께서 보시는 상태는 전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평가와 주님의 판단이 일치하는지 말씀 앞에서 살펴야 한다.

우리는 성령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는가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의 일곱 서신은 고대 교회들에 주어진 말씀이다. 동시에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도 자신의 믿음과 삶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가르침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그저 위로하고 기분 좋게 해주는 온화한 선생님으로만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그분은 사랑과 긍휼의 주님이시며, 교회의 죄와 타협을 드러내고 회개를 요구하시는 주님이기도 하다. 일곱 교회에 주어진 엄중한 경고가 오늘날 우리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3:13).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귀 기울여 듣고, 자신을 살피며, 주님의 말씀에 응답할 것을 요구한다.

#크리스천포스트 #기독일보 #기독일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