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로빈 슈마허의 기고글인 "삶으로 전하는 ‘다섯 번째 복음’을 점검하는 체크리스트"(A checklist for presenting your 5th gospel)을 10월 5일(현지시각) 게재했다.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슈마허는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많은 책을 냈고 미국 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오랜 시간 기독교 변증을 해온 사람으로서 필자는 이른바 ‘누적 논증 방식(cumulative case approach)’을 사용하는 데 익숙하다. 이는 기독교가 참일 가능성이 그렇지 않을 가능성보다 높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철학적, 경험적, 역사적 논증들을 서로 연결해 제시하는 방식이다. 이 접근법은 우리가 제시하는 모든 주장이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맞아떨어지거나 논리적으로 반박 불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각각의 논증이 서로를 보완하고 강화하면서 전체 결론에 더 큰 설득력을 부여한다는 의미다.
이론적으로는 매우 훌륭한 방식이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이성보다 감정의 영향을 더 강하게 받는 ‘탈진실(post-truth)’ 문화 속에 살고 있다는 데 있다. 사람은 감정적으로 강한 거부감을 느끼면 아무리 설득력 있는 사실과 논리를 제시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기독교에 등을 돌리게 만드는 요인을 말하자면, 때로는 기독교 신앙 자체보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더 큰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회의론자들이 기독교 신앙을 비판할 때 지적으로 가장 자주 제기하는 문제 가운데 하나는 ‘악의 문제(problem of evil)’다. 그러나 그 이면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리스도 자신’보다는 그분을 따른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 실망한 경우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얼마 전 바나 그룹(Barna Group)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30%만이 복음주의자들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일부 비판은 기독교 신앙이 요구하는 도덕적 기준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비판을 그렇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그들이 전하는 복음과 충분히 일치하지 않을 때, 그 자체가 복음의 신뢰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신론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의 제자들이 조금 더 구원받은 사람처럼 보였다면, 나도 구원자를 믿었을지 모른다”는 취지의 말을 남긴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마하트마 간디에게도 “나는 당신들의 그리스도는 좋아하지만 당신들의 기독교인은 좋아하지 않는다. 당신들의 기독교인은 당신들의 그리스도와 너무 다르다”는 말이 흔히 인용된다. 필자가 아는 한 유명한 기독교 변증가에게 복음을 듣던 한 힌두교인 역시 “당신이 말하는 회심이 정말 초자연적인 기적이라면, 왜 내가 아는 수많은 기독교인의 삶 속에서는 그 기적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가”라고 질문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이라면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에서도 어떤 변화가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기대한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 교사들은 세상을 향해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개인적인 증언을 ‘제5 복음서(fifth Gospel)’라고 부르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보다 더 자주 읽는 복음서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일 수 있다는 의미다.
사도 바울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자신이 복음을 어떻게 전했는지를 설명하면서, 말뿐 아니라 삶으로 복음을 보여주었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 이것이 바로 변증가들이 말하는 ‘인간적인 체취가 묻어나는 변증(apologetics with a human touch)’, 곧 논증을 넘어 삶으로 드러나는 살아 있는 증거다. 그렇다면 우리의 ‘제5 복음서’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필자는 바울의 삶에서 다섯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변화된 삶
다소 사람 사울이 사도 바울로 변화된 사건은 그의 삶에서 가장 강력한 증거 가운데 하나다. 폭력적인 박해자였던 사람이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은 그를 알던 이들에게 충격적인 변화였다. 사도행전은 사람들이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행 9:21)고 놀랐다고 기록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기 위해 자신의 과거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행 22:4)라고 고백했고, 갈라디아서에서는 사람들이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갈 1:23~24)고 기록했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이 바울처럼 극적인 회심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삶에는 어떤 형태로든 변화의 흔적이 나타나야 한다. 이전과는 다른 가치와 애정, 죄를 대하는 태도, 사람을 대하는 방식, 삶의 방향이 조금씩 드러나야 한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우리의 삶에는 ‘사울에서 바울로’ 변화된 흔적이 남아 있는가.
겸손한 삶
다메섹 도상에서 쓰러진 바울은 자신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내려놓게 된다. 그는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묻는다. 존 칼빈은 이 장면을 두고, 바울이 자신의 사나움과 교만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멍에를 기꺼이 메기 위해 자신을 낮춘 장면으로 해석했다. 바울에게 회심은 단지 새로운 종교적 지식을 얻은 사건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삼던 삶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예수의 종”(롬 1:1, 딛 1:1)으로 살아가는 전환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신앙은 이기적인 교만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으로 나아가도록 요구한다. 바울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고전 9:22)이라고 고백했다. 이것은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과 구원을 위해 자신의 편의와 자존심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의미다.
모범이 되는 삶
이 대목은 필자에게도 가장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고 말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매우 대담하고 심지어 오만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최종 기준으로 세운 것이 아니다.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사실을 믿었고(갈 2:20),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만큼 다른 이들도 그 삶을 따라오도록 권면한 것이다. 그는 신자들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5)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빌 4:9)고 권면했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는 자신을 본받아 다른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었다고 칭찬했다. 반대로 경건하지 못한 삶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 있다는 점도 엄중하게 경고했다(롬 2:24). 그렇다면 불편하지만 피할 수 없는 질문이 남는다. 지금 당장 누군가에게 “나의 삶을 따라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우리는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롬 8:29) 살아가고 있는가.
오래 참는 삶
바울의 삶이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의 서신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이 당한 고난을 길게 열거한다. 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에 맞고, 파선을 당했으며, 여행 중에는 강과 강도, 동족과 이방인, 도시와 광야와 바다, 거짓 형제들로부터 끊임없이 위험을 겪었다. 배고픔과 목마름, 추위와 헐벗음도 견뎌야 했다(고후 11:23~27). 이 모든 고난은 예수님께서 바울의 회심 직후 하신 말씀, 곧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 9:16)는 말씀과도 맞닿아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특히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놀라운 인내를 보여주었다.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고전 4:12~13)라고 고백한다. 필자 역시 이 영역에서는 여전히 많이 씨름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고난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삶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어떤 태도로 그리스도를 붙드는지를 보여주는 삶이어야 한다.
사랑하는 삶
무엇보다 바울은 하나님과 교회, 그리고 길 잃은 영혼들을 향한 사랑으로 특징지어진 사람이었다. 그는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 8:1)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사랑은 말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에베소 교인들을 3년 동안 눈물로 훈계했고(행 20:31), 갈라디아 교인들을 “나의 자녀들”(갈 4:19)이라고 불렀으며, 빌립보 교인들을 마음에 품고 있다고 고백했다(빌 1:7).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서도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기를 기도했다(살전 3:12).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는 말씀이 진리라면, 그 하나님을 따른다고 말하는 사람의 삶에서도 사랑이 나타나는 것이 자연스럽다. 신앙의 진위를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표지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는가에 있다.
우리의 ‘제5 복음서’를 어떻게 쓰고 있는가
여기까지가 세상을 향해 우리의 ‘제5 복음서’를 보여주기 위해 점검할 수 있는 다섯 가지 기준이다. 변화된 삶, 겸손한 삶, 본이 되는 삶, 오래 참는 삶, 사랑하는 삶이다. 이러한 삶은 당시의 문화 속에서도 분명한 차이를 만들어냈다. 초대교회는 개인의 영적 체험만을 강조한 공동체가 아니었다. 서로를 돌보고, 가난한 이들을 돕고, 병든 자와 버림받은 자를 돌보며, 당시 사회가 쉽게 외면하던 사람들에게까지 사랑을 확장했다.
역사가 안토니아 트리폴리티스(Antonia Tripolitis)를 비롯한 여러 연구자는 초기 기독교의 성장 배경 가운데 하나로 강한 공동체 의식과 적극적인 자선 활동을 지적해 왔다. 기독교는 단순히 새로운 사상 체계를 제시한 것이 아니라, 사랑과 돌봄이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공동체를 통해 보여주었다.
오늘날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세상은 우리가 무엇을 믿는다고 말하는지뿐 아니라 그 믿음이 우리의 성품과 관계, 행동 속에서 실제로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지켜본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은 매일 한 장씩 쓰여가는 ‘제5 복음서’와도 같다.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겸손, 인내와 변화를 보게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와 삶 사이의 모순을 보게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복음을 말로 전하는 일과 삶으로 증언하는 일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말은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고, 삶은 그 복음이 실제로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진실하다는 사실을 가장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증거 가운데 하나는, 결국 그 복음으로 변화된 우리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