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의 말씀은 매우 감동적이고 가슴 뭉클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요셉은 형들을 만났지만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다. 무언가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셉은 형들의 진실된 마음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은잔을 가지고 시험을 한다. 은잔을 베냐민의 양식 자루에 숨겨 놓은 후 청지기에게 명령한다. 가나안으로 향하는 형들을 뒤쫓아가 그들 가운데 은잔을 훔친 자가 있다고 말하게 한다.
이 말을 들은 형들은 자신들이 정직하다고 말한다. 9절에서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이 결백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된다. 결국 그들은 요셉 앞에 돌아오게 된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왔으니 그들은 큰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때 유다가 나서서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16절)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라는 말은 과거에 요셉을 노예로 판 죄악을 하나님이 지금 물으신다는 고백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 자신들 모두가 당신의 종이 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은잔이 발견된 자만 자신의 종이 되고, 나머지는 평안히 돌아가라고 한다(17절).
요셉이 이렇게 하는 것은 형들의 마음을 시험하기 위해서이다. 베냐민은 요셉의 친동생이다. 형들은 과거에 요셉을 몹시 미워하여 노예로 팔아 버린 사람들이다. 그런 형들이 지금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동생 베냐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요셉은 그것을 알고자 했던 것이다.
요셉이 형들의 마음을 시험했던 것은 복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단지 형들의 변화된 모습을 보기 원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죄의 실체가 드러나는데도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다. 모두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변명을 늘어놓는다. 이런 상황은 기독교 안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잘못된 일이 만천하에 드러나도 “나는 책임이 없다”, “나는 피해자이다”, “억울하다”라고 말하며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회피하는 경우를 수없이 보게 된다.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습니다”라고 시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기를 소원한다. “실패하고 풍랑이 일어난 것이 바로 나 때문이다. 내가 책임을 지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기를 소원한다.
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낮다는 소식은 안타까움을 더한다. 그러나 신뢰가 추락한 원인을 두고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요나와 같은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본문에서 책임을 지려는 유다의 태도에 요셉은 감동을 받게 된다. 형제의 사랑이 확인됨으로써 위기는 마침내 전화위복이 된다. 우리는 삶에서 연약함으로 죄를 지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시인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본문에서는 요셉의 형들이 누명을 쓰는 장면도 볼 수 있다. 우리는 누명으로 곤란에 처할 때 어떻게 대처하는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사람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자신의 운명이라 여기며 체념해 버리지는 않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마음이다. 억울함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십자가 아래에 엎드려, 누명이 벗겨질 때까지 인내하며 하나님을 의지해야 함을 잊지 말자.
본문 말씀에서 배우는 것은 무엇인가? 유다의 살신성인의 정신을 배운다. 자신이 대신 종이 되어서라도 베냐민을 구하겠다는 희생적 제안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그 결과 우리의 현실은 투쟁과 불신으로 점철돼 있다. 이러한 현실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할 수 있는 길은 살신성인의 정신을 온전히 실천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셨던 정신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형제를 위해 나의 시간과 재물, 나아가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내어주는 희생정신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정신이라 믿는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이 말은 야곱이 단순히 자포자기하여 한 말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붙들고 있던 마음을 내려놓는 결단이었다. 야곱의 편애가 이스라엘 가문을 불행하게 만든 시작이었다면, 편애를 내려놓는 것은 이스라엘 가문을 회복으로 이끄는 시작이었다.
공부를 잘하는 자식이라고 편애하지 말고, 막내라고, 장남이라고 편애하지 말자. 아들이라고 편애하지도 말자. 편애는 가정을 파괴하는 비뚤어진 사랑이다.
죽으면 살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낮아지면 높아지고, 버리면 얻고, 주면 받는 삶은 기독교의 역설적인 진리이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려는 순종을 통해 여호와 이레의 은혜를 경험했다. 야곱은 베냐민을 보내는 결단을 통해 요셉과 재회하고 가족이 다시 하나 되는 길로 나아갔다.
요셉은 형들의 우애와 베냐민에 대한 사랑이 어떠한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요셉의 계획대로 형들은 당황하게 된다.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은 형들은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때 유다는 이 일에 책임을 지고 모두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말한다(16절).
자신만을 위해 살던 삶에서 형제가 함께 사는 삶으로 바뀐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죄 짐을 대신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떠올리게 한다. 유다는 훗날 자신의 계보에서 메시아가 탄생하는 복을 누리게 된다.
요셉을 감동시키는 유다
은잔이 발견된 베냐민만 자신의 종이 되고 나머지는 돌아가라는 요셉의 명령이 떨어졌지만, 유다는 나서서 애원한다. 권력자 앞에 나서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베냐민을 꼭 데려가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그는 베냐민을 두고 떠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형들은 과거에 요셉을 노예로 팔았던 잘못을 돌아보고 있었다. 이제는 베냐민을 두고 떠날 수 없었고, 더욱이 베냐민이 종이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함께 종이 되기를 원했다(16절). 나아가 유다는 베냐민 대신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간청한다.
유다의 이런 탄원에 요셉은 큰 감동을 받게 된다. 시험은 우리의 마음과 실력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시험을 통과한 자에게는 합격의 기쁨이 따른다. 이와 같이 신앙의 시험도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고 자라게 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다가오는 시험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택을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한다.
우리는 여기서 변화된 유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마태복음 1장 3절에는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라는 말씀이 기록돼 있다. 유다의 이름이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것이다. 이는 장자권을 물려받았다는 뜻과는 구별되지만, 하나님께서 유다의 계보를 통해 메시아를 보내셨음을 보여 준다.
요셉을 노예로 팔자고 제의했던 유다가 지금은 사랑의 유다가 되어 동생 대신 자신이 노예가 되겠다고 나선다. 그와 같은 변화가 나에게도 이어지기를 바라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