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데일 모로의 기고글인 '성찬은 은혜를 더하는 의식이 아니라, 받은 은혜를 기념하는 자리다'(The Lord's Supper doesn't give grace. It celebrates it)를 9월 20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데일 모로(Dale Moreau)는 성서학 학사(BA), 목회학 석사(MDiv), 성서신학 및 성경언어학 박사(PhD) 학위를 취득했으며, 30년 동안 목회자로 섬겼다. 또한 대학과 신학교에서 강의했으며, 55년 넘게 글을 써왔다. 그의 저술은 학술 문헌에서도 인용되고 있다. 현재 그는 서브스택(Substack)에서 ‘Theological Voice’를 운영하며, 목회자와 학자, 학생들을 위해 성경이 담고 있는 초자연적 세계관을 재조명하고 회복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고대의 족보는 대체로 여성을 굳이 기록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한 마태복음은 네 명의 여성을 특별히 언급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의 삶이 모두 당대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논란과 상처, 사회적 경계와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마태의 실수나 우연한 삽입으로 보기 어렵다. 오히려 이 이름들이 족보에 등장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신약성경의 첫 페이지를 펼치면 아브라함에서 시작해 그리스도까지 이어지는 아버지와 아들들의 긴 행렬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마태는 그 족보의 사슬 사이에 다말과 라합, 룻, 그리고 밧세바를 끼워 넣는다. 당시의 관습을 생각하면 이보다 더 눈길을 끄는 인물들을 선택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말은 자신의 시아버지 유다를 속이기 위해 창녀로 위장했던 인물이다. 라합은 멸망을 앞둔 여리고에서 살았던 창녀였다. 룻은 이스라엘과 오랜 갈등의 역사를 지닌 모압 출신의 이방 여성이었다. 그리고 마태는 밧세바의 이름을 직접 쓰지 않고 굳이 “우리아의 아내”라고 표현한다. 이를 통해 다윗이 저지른 간음과 우리아의 죽음이라는 어두운 사건을 독자의 기억 속에 다시 불러낸다.
이 족보는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자 약속된 메시아임을 보여주는 왕의 족보다. 그런데 마태는 가문의 불편한 기억들을 깨끗하게 지워버리기는커녕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첫 페이지에 그대로 남겨 놓는다.
이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이 여성들은 여러 방식으로 사회적 경계에 서 있던 사람들이며, 일부는 이방인이었고 그들의 이야기는 성적 스캔들과 가족의 비극, 사회적 낙인과 연결돼 있다. 마태는 복음서의 첫 페이지부터 메시아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들의 깨끗한 역사만을 통해 오신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메시아의 족보 깊숙한 곳에서 죄와 수치, 이방인과 주변인을 통과하며 역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네 여성의 이야기를 고대 유대교의 ‘감시자들(Watchers)’ 전승과 연결해 읽는다면 또 하나의 흥미로운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마태복음 해석의 유일하거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설명은 아니지만, 고대 유대 문헌의 배경 속에서 족보를 읽을 때 생각해 볼 만한 하나의 해석적 관점을 제공한다.
감시자들의 타락과 오래된 반역
이 관점은 창세기 6장의 이른바 ‘하나님의 아들들’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들을 아내로 취했으며, 그 결과 네피림과 ‘고대의 용사들’이 등장했다고 기록한다.
후대 유대 문헌, 특히 『에녹1서』와 같은 문헌에서는 이 이야기가 더욱 구체적으로 전개된다. 그 문헌에서 타락한 천상의 존재들은 하늘의 영역을 떠나 인간 세계로 내려와 금지된 지식을 전한다. 무기를 만드는 기술과 전쟁의 기술, 주술과 점성술, 장신구와 화장을 통한 유혹의 기술 등이 그들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묘사된다.
이 전승에서 핵심은 단순히 어떤 특정 기술 자체가 악하다는 데 있지 않다.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를 넘어 욕망과 권력, 지식을 왜곡해 사용하는 반역이 문제다. 그 결과 인간 사회에는 폭력과 탐욕, 성적 타락과 유혈이 확산되고, 결국 홍수 심판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마태가 언급한 네 여성의 이야기를 다시 살펴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메아리가 눈에 들어온다.
다말, 라합, 룻 그리고 밧세바
다말의 이야기는 위장과 성적 유혹,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이어지는 혈통의 이야기다. 창세기 38장에서 유다는 길가에 앉아 있던 다말을 보고 그녀를 창녀로 생각하고 관계를 맺으며, 다말은 그 일로 임신한다. 이러한 장면에는 ‘보고 욕망하고 취하는’ 창세기의 오래된 패턴을 연상시키는 요소가 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이야기는 다말을 단순한 악인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유다는 마지막에 “그는 나보다 옳도다”라고 인정한다. 인간의 죄와 불의가 뒤엉킨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약속의 혈통을 이어가신다.
라합의 경우에는 그 연결이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그는 여리고에서 창녀로 살아가던 여성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관한 소식을 듣고 그분의 능력을 인정하며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준다. 이후 여리고가 무너질 때 라합과 그의 가족은 살아남고, 그는 이스라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온다.
여리고라는 장소 역시 흥미롭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맞닥뜨린 요새화된 도시 가운데 하나이며, 이후의 정복 이야기에서는 아낙 자손과 같은 거인족 전승도 나타난다. 감시자 전승의 렌즈로 읽는다면 라합의 이야기는 어둠과 심판의 영역에 속했던 한 사람이 믿음을 통해 언약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으로 읽힐 수 있다.
룻은 모압 여인이다. 창세기에서 모압 민족의 기원은 롯과 그의 딸 사이의 근친관계라는 매우 불편한 이야기와 연결된다. 이후 모압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우상숭배와 갈등의 기억을 남긴민족이기도 하다. 그러나 룻기는 바로 그 모압 여인 룻을 믿음과 충성의 모범으로 제시한다.
룻기의 결정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인 타작마당 이야기에서 룻은 나오미의 지시에 따라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옷을 갈아입은 뒤 보아스를 찾아간다. 이것을 감시자 전승의 ‘미화’ 모티프와 연결해 읽으려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룻기 자체는 이를 타락한 유혹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룻과 보아스는 서로의 ‘헤세드’, 곧 인애와 신실함을 보여주는 인물들로 묘사된다.
여기에는 흥미로운 언어적 연결도 있다. 보아스는 히브리어로 ‘이쉬 깁보르 하일(איש גבור חיל)’, 곧 능력 있고 유력한 사람으로 소개된다. 여기에서 사용된 ‘깁보르(gibbor)’는 창세기 6장의 ‘고대의 용사들’을 표현할 때 등장하는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가진다. 그렇다고 보아스가 거인족과 연결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동일한 언어가 전혀 다른 성격의 ‘힘’을 묘사하는 방식은 흥미로운 대조를 만들어낸다. 폭력과 찬탈의 힘이 아니라 보호하고 기업을 무르는 힘이다.
밧세바의 이야기는 더욱 분명하게 ‘보고 취하는’ 욕망의 구조를 보여준다. 사무엘하 11장에서 다윗은 왕궁 옥상에서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 사람을 보내 그가 누구인지 알아본 뒤 밧세바를 데려온다. 다윗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왕권을 보호와 정의를 위해 사용하는 대신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아름다운 여인을 본 뒤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취하는 다윗의 모습은 창세기 6장의 오래된 반역을 연상시킨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가 다윗의 충성스러운 용사들, 곧 그의 ‘깁보림(gibborim)’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왕은 자신의 힘으로 충성스러운 용사를 죽음으로 보내고 그의 아내를 취한다.
그러나 바로 그 실패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구속사는 끝나지 않는다.
오래된 반역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족보
네 여성의 이야기를 이렇게 읽으면 흥미로운 공통점이 나타난다. 인간의 욕망과 성적 타락, 이방 민족과 전쟁, 폭력과 권력 남용처럼 성경의 가장 오래된 반역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이 예수의 족보 곳곳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요소들을 모두 감시자 전승과 직접 연결하는 것은 하나의 해석적 제안이며, 각각의 본문이 본래 전달하려는 의미를 넘어 지나치게 연결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마태가 메시아의 족보를 인간적으로 깨끗하고 이상적인 역사로 정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메시아의 혈통은 인간의 죄와 실패를 피해 흐르지 않는다. 유혹과 폭력, 이방인의 역사와 가족의 비극, 왕권의 타락과 사회적 수치를 통과한다. 하나님은 메시아를 이러한 역사 밖에 안전하게 격리해 두지 않으셨다. 오히려 바로 그 역사의 한가운데로 들어오게 하셨다.
이것은 복음 전체의 방향과도 맞닿아 있다. 예수는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다. 타락한 세상 안으로 들어와 그것을 구속하기 위해 오셨다. 죄인과 세리의 식탁에 앉고, 부정하다고 여겨진 사람에게 손을 내밀며, 인간의 죄와 죽음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십자가 한가운데로 들어가셨다.
그런 점에서 메시아의 족보에 죄와 수치, 실패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복음과 어울리지 않는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이 무엇을 하려는지를 보여주는 전조처럼 읽힌다.
메시아는 자신의 족보에 있는 스캔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 족보는 오히려 그분이 어떤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는지를 보여준다. 인간이 망가뜨린 바로 그 역사 속으로 하나님이 들어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해석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조는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과 신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아들’ 사이에서 나타난다.
고대 유대 전승에서 타락한 ‘하나님의 아들들’은 자신의 자리를 떠나 인간 세계로 내려와 창조 질서를 훼손한다. 그들의 하강은 욕망과 폭력, 금지된 권력과 혼란을 가져온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참된 ‘하나님의 아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내려오신다. 그는 취하기 위해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기 위해 오며,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오고, 인간을 타락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 오신다.
한쪽의 하강이 세상을 더럽혔다면 다른 한쪽의 하강은 세상을 회복시킨다. 바로 여기에서 마태복음의 족보는 단순한 가족 명단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길게 이어지는 “낳고 낳고”의 반복 속에는 하나님이 인간 역사의 실패를 어떻게 자신의 구속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이시는지가 압축돼 있다.
다말과 라합, 룻과 밧세바는 그 이야기의 오점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이름들은 인간의 죄와 실패가 하나님의 약속을 좌절시키지 못했다는 증거다. 각자의 이야기는 상처와 위험, 사회적 경계와 인간의 잘못을 품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통과해 약속의 계보를 이어가신다.
어둠이 독을 퍼뜨리려 했던 바로 그 역사에서 구원자가 태어난다.그래서 마태가 이 여성들의 이름을 호명한 것은 스캔들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이 어디까지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족보는 존경할 만한 조상들만 모아놓은 영웅 명단이 아니다. 죄와 실패, 이방인과 주변인, 인간의 반역까지도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좌절시키지 못한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그 길고도 흠 많은 혈통의 끝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다. 인간 역사의 오염된 자리를 멀리 피해 오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한가운데로 들어오신다.그것이 마태가 신약성경의 첫 페이지에서 들려주는 복음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