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그들만의 역사가 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한 예언자적 부르심

살림 J. 무나이어 교수. ©reconciledworld.net

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살림 J. 무나이어 교수의 기고글인 '사람을 고정관념으로 바라보지 말고,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Humans not stereotypes: we must uphold the dignity of all people)을 최근 게재했다.

살림 J. 무나이어 교수는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인, 그리고 중동 지역의 다른 분열된 공동체들 사이의 화해를 증진하는 데 헌신해 온 단체 ‘무살라하’의 설립자다. 현재 세계복음주의연맹(WEA) 산하 평화와화해네트워크(PRN)의 중동·북아프리카 지역 코디네이터로 섬기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팔레스타인 사람으로서 필자는 삶의 많은 시간을 폭력에 관한 대화를 나누며 보냈다. 대학교 강의실에서, 교회에서, 콘퍼런스에서,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그리고 세계 곳곳의 친구와 동료들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놀랍도록 일관된 하나의 패턴을 반복해서 목격했다.

대화의 주제가 ‘이스라엘의 폭력’으로 향할 때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 폭력의 ‘역사’를 찾으려 한다. 홀로코스트, 수 세기에 걸친 반유대주의, 집단적 트라우마, 실존적 불안감, 자살폭탄 테러, 로켓 공격, 그리고 자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의 책임을 이야기한다. 결론이 어떻게 나든, 역사적 배경이 이스라엘의 두려움과 행동을 어떻게 형성했는지 이해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뒤따른다.

반면 화제가 ‘팔레스타인의 폭력’으로 바뀌면 질문의 양상은 종종 완전히 달라진다. 나크바(Nakba·팔레스타인 대재앙), 군사 점령, 토지 몰수, 정착촌 확대, 반복되는 전쟁, 봉쇄, 투옥, 그리고 군사 통제 아래에서 살아가는 일상의 현실과 같은 역사적 배경은 순식간에 뒷전으로 밀려난다.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규모 인명 피해와 공동체 파괴, 반복되는 강제 이주, 굶주림, 생존 조건의 붕괴조차 이를 형성해 온 긴 역사의 맥락과 분리해 논의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많은 이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어떤 일을 ‘겪어왔는가’를 묻기보다, 그들이 과연 ‘어떤 부류의 인간인가’를 묻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폭력은 역사가 낳은 비극적 결과라기보다 그들의 ‘정체성’이 표출된 결과로 해석된다. ‘테러리스트’, ‘극단주의자’, ‘광신도’라는 꼬리표가 역사를 이해하려는 인내심의 자리를 손쉽게 대신한다.

30년 넘게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유럽, 북미의 학생들을 가르치며 필자는 이러한 패턴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스라엘의 폭력을 역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대개 책임 있는 학문적 태도로 받아들여진다.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 전에 역사를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폭력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빈번하게 ‘테러리즘을 변명하려는 것’으로 취급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적용될 때는 정당한 역사적 탐구로 인정받던 방법론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순간 의심의 대상이 된다.

필자는 여기서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국가가 자행했든 비국가 단체가 자행했든 민간인을 의도적으로 공격하는 행위는 도덕적 규탄을 받아야 한다. 모든 희생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 모든 생명은 동등한 존엄성을 가진다. 무고한 사람을 고의로 겨냥한 모든 행위에는 도덕적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필자가 다루려는 것은 폭력 자체라기보다 폭력이 ‘어떻게 해석되는가’의 문제다. 어떤 행위를 비난하거나 이해하기에 앞서 우리는 이미 그 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이 ‘역사를 가질 자격이 있는가’를 판단해 버리곤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선행 판단이 이후의 모든 도덕적 판단을 규정한다.

따라서 필자의 문제의식은 단순히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것이다. 왜 우리는 한 민족의 폭력 이면에 있는 역사와 기억, 트라우마는 본능적으로 탐구하려 하면서 다른 민족의 폭력은 단순한 꼬리표나 문화, 종교의 문제로 축소하는가. 왜 한 민족에게는 ‘서사(biography)’를 허락하면서 다른 민족에게는 굳어진 ‘정체성(identity)’만을 부여하는가.

이러한 비대칭성은 우리의 더 깊은 도덕적 습관을 드러낸다. 우리는 어떤 이들에게는 역사적 호기심을 허락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그것을 거부한다. 한 민족의 인간성은 그들의 고유한 이야기를 통해 인정하면서, 다른 민족의 인간성은 고정관념 속에 납작하게 가둔다.

가자 지구는 이러한 인지적 습관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팔레스타인의 역사와 인간성이 지워질 때 그들이 겪는 고통은 쉽게 무시되거나 정당화되고, 도덕적 시야에서 사라질 수 있다. 폭력을 해석하는 이러한 불평등한 방식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맥락뿐 아니라 우리의 판단을 형성하는 무의식적인 도덕적 전제까지 계속 오해하게 될 것이다.

하나의 폭력에는 ‘서사’가 따라붙고, 다른 폭력에는 ‘꼬리표’가 붙는다.

누가 ‘이유’를 가질 자격이 있는가

필자가 학생이었을 때, 그리고 훗날 교사가 된 뒤에도 가장 중요하게 배운 교훈 가운데 하나는 ‘이해하는 것’이 곧 ‘동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역사학자와 심리학자, 사회과학자는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려 노력하지만 그것이 곧 해당 행동에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왜 전쟁이 시작되는지, 왜 사회가 양극화되는지, 두려움이 어떻게 정치적 결정을 형성하는지, 그리고 왜 개인이 이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끔찍한 행동을 저지르게 되는지 묻는다. ‘설명’은 승인의 행위가 아니라 ‘이해’의 시작점이다.

이 원칙은 많은 분쟁 상황에서 거의 본능적으로 적용된다. 국가와 공동체가 위험과 정의, 생존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행동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학자들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대한 기억을 통해 유럽 정치를 설명하거나, 진주만과 9·11 테러의 트라우마를 통해 미국의 외교정책을 설명하거나, 홀로코스트로 정점을 찍은 수 세기의 반유대주의를 통해 유대인의 의식을 설명할 때 이를 문제 삼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해하는 것은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행동이 역사적 경험 속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러나 대화의 주제가 팔레스타인으로 넘어가는 순간 이 원칙은 종종 달라진다. 누군가 나크바, 군사 점령, 정착촌 확대, 반복되는 전쟁, 수십 년에 걸친 군사 통제하의 삶을 언급하면 대화의 기류가 바뀐다.

역사적 맥락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익숙한 질문이 등장한다. “지금 테러를 정당화하려는 겁니까?” 팔레스타인의 경험을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행위로 취급되는 것이다.

왜 한쪽의 역사적 탐구는 환영받고, 다른 쪽의 역사적 탐구는 배척받아야 하는가.

모든 민족은 현재를 이해하는 방식을 형성한 각자의 기억을 품고 살아간다. 이스라엘도 그렇고 팔레스타인도 그렇다. 역사는 어느 쪽의 폭력도 정당화하지 않으며 도덕적 책임을 면제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한 민족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역사적 설명이 필요하다면, 지적 정직성은 동일한 원칙을 다른 민족에게도 적용할 것을 요구한다.

한 민족에게는 일관되게 행동의 ‘이유’가 허락되는 반면 다른 민족은 ‘꼬리표’로 환원될 때 우리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도덕적 틀을 만들어낸다. 한쪽의 폭력은 기억과 역사를 통해 해석되고, 다른 쪽의 폭력은 정체성과 고정관념을 통해 해석된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불일치가 아니라 도덕적 일관성의 문제다. 정의는 어디에서 벌어지든 민간인을 향한 폭력을 규탄할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설령 그 대답이 우리의 기존 전제를 흔들더라도 모든 민족에게 동일한 역사적 질문을 던질 것을 요구한다.

역사가 오직 한 민족의 전유물이 될 때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역사는 공동체가 자신이 누구인지, 왜 두려워하는지, 무엇을 희망하는지, 그리고 현재를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이해하도록 하는 거대한 이야기다.

집단적 기억은 정치적 결정을 형성하기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의 도덕적 상상력을 빚어낸다.

홀로코스트가 현대 유대인의 정체성과 이스라엘 국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사라는 사실에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홀로코스트는 오늘날에도 많은 이스라엘인이 취약성과 안보, 유대인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책임을 인식하는 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역사를 무시한 채 이스라엘을 논한다면 역사적으로 피상적이고 도덕적으로 무감각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원칙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도 일관되게 적용되는 경우는 드물다. 나크바, 수십 년에 걸친 강제 이주, 군사 점령, 정착촌 확대, 가자 지구에 대한 반복적인 군사작전, 그리고 존엄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역사는 팔레스타인의 행동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현재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는 참상 역시 이러한 역사와 완전히 분리해 바라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그 역사를 직접 살아온 이들에게는 여전히 생생한 기억이 외부 관찰자에게는 종종 불필요한 배경처럼 취급된다.

이러한 불균형은 심각한 도덕적 결과를 낳는다. 한 민족의 역사는 인정하면서 다른 민족의 역사는 지울 때 우리는 인간성을 불평등하게 부여하기 시작한다.

한 민족은 기억과 트라우마, 구체적인 경험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로 이해되는 반면 다른 민족은 고정된 정체성과 물려받은 선입견의 렌즈를 통해 평가된다. 한쪽에는 역사적 깊이가 허락되고, 다른 쪽에는 본질주의적인 꼬리표가 붙는다.

이러한 불균형은 우리의 도덕적 상상력을 빈곤하게 만든다. 사람은 역사적으로 설명된 두려움에는 쉽게 공감하지만 정치적으로 단순화된 고통에는 무감각해질 수 있다. 연민은 인식에서 비롯되며, 인식은 우리가 기꺼이 들으려 하는 이야기에 영향을 받는다.

역사를 인정한다고 해서 도덕적 책임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홀로코스트도 나크바도 민간인을 의도적으로 공격하는 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다.

그러나 두 역사 모두 폭력이 역사적 진공 상태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인간은 선택뿐 아니라 기억에 의해서도 형성되는 존재다. 역사를 진지하게 다룰 때 도덕적 책임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무거워진다.

문제는 ‘누구의 역사가 더 중요한가’가 아니다. 모든 민족에게 마땅히 경청할 가치가 있는 고유한 역사가 있음을 인정할 수 있는 도덕적 일관성이 우리에게 있는가의 문제다.

폭력에 대한 정의로운 해석은 역사를 가질 존엄성을 오직 한쪽에게만 특권처럼 허락하는 태도를 거부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모든 것을 바꿔놓는 ‘언어’

폭력은 결코 진공 상태에서 해석되지 않는다. 사실관계가 충분히 파악되기도 전에, 증거가 조사되기도 전에, 도덕적 판단이 형성되기도 전에 ‘언어’는 이미 이야기의 틀을 만들기 시작한다.

우리가 선택하는 단어는 현실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실을 해석하는 방식까지 형성한다. 언어는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지, 누구의 두려움에 주목할 것인지, 누구의 행동에 설명이 필요하다고 여길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맥락에서 이러한 언어는 때때로 불평등한 도덕적 지형을 만든다.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은 흔히 ‘안보’, ‘자위권’, ‘억지력’, ‘대테러 작전’과 같은 언어를 통해 설명된다.

이러한 표현은 사건을 역사적 취약성과 방어의 맥락 안에 놓는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위협이 이러한 대응을 낳았는가”, “그 이면에는 어떤 두려움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도록 만든다.

반면 팔레스타인의 폭력을 둘러싼 어휘는 종종 다르게 작동한다. ‘테러리즘’, ‘극단주의’, ‘광신’, ‘급진화’와 같은 단어가 곧바로 등장한다.

물론 민간인에 대한 고의적인 공격은 규탄받아야 하며, 테러리즘은 실제 행위를 평가하는 데 필요한 도덕적·법적 범주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꼬리표가 팔레스타인 사람들 전체를 이해하는 주된 언어로 굳어질 때 발생한다. 그 순간 꼬리표는 역사적 설명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대신한다. 진정한 대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질문의 문이 닫힐 수 있다.

언어의 이러한 차이는 중요한 윤리적 결과를 낳는다. 한 가지 언어 체계는 질문을 장려하지만 다른 언어 체계는 질문을 억제할 수 있다.

전자는 “어떤 일이 있었기에 저런 반응이 나타났는가”라고 묻게 하지만 후자는 “어떤 부류의 인간이기에 저런 행동을 하는가”라고 단정하게 만들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역사는 꼬리표에 자리를 내주고, 꼬리표는 고정관념으로 굳어진다.

핵심은 특정 행위를 테러리즘이라고 부를 것인가, 혹은 국가가 자국민을 보호할 권리가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두 민족 모두에게 동일한 해석의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가이다.

역사적 맥락이 한쪽의 행동에 대한 이해를 풍성하게 한다면 다른 쪽의 행동을 평가할 때도 그 맥락이 사라져서는 안 된다. 도덕적 일관성은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 양쪽 모두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질 것을 요구한다.

언어는 단순한 묘사의 도구만이 아니다. 언어는 권력과도 연결돼 있다. 정치와 군사, 문화, 미디어에 큰 영향력을 가진 이들은 대중의 기억을 형성하는 데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다.

어떤 역사가 기억될지, 어떤 두려움이 보편적인 공감을 얻을지, 어떤 경험이 대중의 의식 밖에 머물지를 결정하는 데 언어의 힘이 작용한다.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남성, 여성, 어린이가 단순한 ‘숫자’로만 보도될 때 그 숫자 뒤에 있는 이름과 가족, 역사와 미래는 쉽게 사라진다.

언어는 폭력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누구의 고통을 인정할 것인지, 누구의 역사를 의미 있게 다룰 것인지, 누구의 인간성을 온전히 바라볼 것인지에도 영향을 미친다.

언어는 역사적 이해로 가는 문을 열 수 있고, 하나의 꼬리표로 그 문을 닫을 수도 있다.

한 민족의 이야기가 가진 존엄성을 인정할 수도 있고 침묵시킬 수도 있다. 언어가 한 민족에게는 역사를 가질 권리를 허락하면서 다른 민족을 고정관념으로 환원한다면, 그것은 이해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수단이 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인간’으로 읽어내기

이 문제를 깊이 성찰할수록 필자는 비극이 폭력 그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폭력이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까지 왜곡한다는 데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평가하기도 전에 그 행동을 한 사람에 대한 이미지를 마음속에 이미 만들어 놓곤 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가 우리가 역사를 탐구할지 고정관념에 머물지, 질문을 던질지 꼬리표를 붙일지를 결정한다.

이스라엘의 행동은 강한 비판의 대상이 될 때조차 대개 더 넓은 역사적 서사 안에서 이해된다. 수 세기에 걸친 박해와 홀로코스트, 실존적 불안, 그리고 취약성을 경험한 민족의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과 연결해 설명된다.

이스라엘의 정책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 결정이 복잡한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은 널리 존재한다.

반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이와 같은 인간적 복잡성이 충분히 허락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나크바와 강제 이주, 군사 점령, 반복되는 전쟁, 이동의 자유에 대한 제한, 존엄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의해 형성된 민족으로 이해되기보다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듯한 하나의 ‘꼬리표’로 환원되곤 한다.

꼬리표가 이야기를 대신하는 순간 역사는 사라진다. 역사가 사라지면 공감의 가능성 역시 약해진다.

이것이 더 깊은 윤리적 문제다. 핵심은 단지 폭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아니라 폭력 한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다른 모든 민족과 마찬가지로 기억과 슬픔, 희망과 열망을 가진 인간으로 마주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역사에 귀 기울일 필요조차 없는 의심의 대상으로 남겨둘 것인가.

팔레스타인 기독교인으로서 필자는 그 답이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성경의 가르침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성경은 사람을 단순한 범주로 축소하는 태도를 거부한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꼬리표보다 이웃을 먼저 보고, 고정관념보다 사람을 먼저 보며, 정치적 정체성 뒤에 있는 인간의 이야기를 보도록 요구한다.

한 민족의 역사를 부인하는 것은 그들의 인간성 일부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원칙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경계를 넘어선다. 어느 민족이든 그들의 역사를 지워버릴 때 우리는 그들의 존엄성을 훼손한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를 거부하면 연민은 더 어려워지고 정의는 더 선택적으로 작동하게 된다.

선택적 기억 위에서는 지속적인 평화를 세우기 어렵다. 평화는 우리가 본능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부여하는 역사적 존엄성을 다른 민족에게도 동일하게 인정할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결론: 예언자적 부르심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폭력을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의 문제에만 머물지 않는다.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선택하는 문제다.

한 민족에게만 역사의 존엄성을 허락하고 다른 민족은 꼬리표로 축소할 것인가. 아니면 모든 민족에게 마땅히 경청해야 할 고유한 이야기가 있음을 인정할 것인가.

그리스도인은 다른 이들이 넘기를 거부했던 경계를 끊임없이 넘어가셨던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예수는 사회가 만들어놓은 ‘범주’보다 ‘사람’을 보았다. 정죄하기 전에 들었으며, 침묵당하고 배제되고 두려움의 대상이 된 이들의 존엄을 회복했다.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그러한 태도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한쪽의 역사는 인정하면서 다른 쪽의 역사는 지우는 불평등한 도덕적 틀을 그대로 두고 교회가 세상에 ‘화해’를 선포하기는 어렵다. 오늘날 가자 지구의 현실은 이러한 질문을 교회 앞에 무겁게 던지고 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고백하면서 정치적 충성심이나 국가적 정체성, 세습된 편견에 따라 누구의 고통이 더 많은 연민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는 고통과 그것이 놓여 있는 팔레스타인의 역사적 맥락을 직시하지 않은 채 신뢰할 수 있는 평화를 말하기도 어렵다.

정의를 향한 첫걸음은 다른 민족의 이야기에 무조건 ‘동의’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그들만의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반대 의견도 더욱 정직해질 수 있고, 판단도 공정해질 수 있으며, 평화를 향한 추구도 단순한 수사를 넘어설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인 예언자적 과제는 분명하다.

다른 민족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언어와 이데올로기, 정치적 서사에 저항해야 한다. 정죄하기 전에 듣고, 심판하기 전에 이해하려 노력하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모든 인간의 동등한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

역사가 권력자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역사는 모든 민족이 지닌 고유한 유산이다.

다른 민족의 역사를 부정할 때 우리는 그들의 인간성만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인간성 역시 손상시킨다.

그러나 진실과 겸손, 용기를 가지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로 선택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화해를 가능하게 하는 정의와, 그 이름에 걸맞은 평화를 향해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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