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볼링 치는 시대의 교회: 잃어버린 '제3의 공간'과 진정한 공동체의 회복

존 스톤스트리트 회장. ©기독일보 DB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존 스톤스트리트 회장의 기고글인 ‘외로움은 흡연만큼 해롭다 교회가 답이 될 수 있다' (Loneliness is as deadly as smoking. The Church has an answer)를 9월 23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스톤스트리트 회장은 콜슨 기독교 세계관 센터의 회장을 맡고 있으며 신앙과 문화, 신학, 세계관, 교육 및 변증법 분야에서 인기 있는 작가이자 연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1830년대 초, 프랑스인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미국의 교도소 제도를 연구한다는 명목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알고 싶었던 것은 미국이 어떻게 전제주의로 타락하지 않고 민주주의 사회로 번영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는 그 관찰의 결과를 훗날 고전이 된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에 기록했다.

토크빌이 특히 주목한 것 가운데 하나는 미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시민 결사체(civil associations)’를 만들어내는 방식이었다. 그는 “모든 연령과 모든 조건, 모든 성향의 미국인들은 끊임없이 결사한다”며 상업적·산업적 모임뿐 아니라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모임, 진지하거나 사소한 모임, 거대한 것에서 아주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형태의 결사체가 존재한다고 관찰했다.

토크빌은 미국인들이 이러한 결사체를 통해 자유를 실천하고 지키는 법을 배운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처럼 자유를 함께 살아내는 과정은 단순히 정치적 제도를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 자체를 형성한다고 평가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이러한 삶은 “마음을 넓히고 인간의 지성을 발달시킨다.” 공동체에 참여하고 타인과 협력하는 삶이 인간의 내면을 빚어내는 형성적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오늘날 미국을 다시 찾는다면 토크빌은 이러한 자발적 공동체와 결사체가 눈에 띄게 약화된 모습을 보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최근 카테리나 조이노(Catherina Gioino)가 <포춘(Fortune)>에 기고한 글에서 지적했듯, 미국에서는 사회학자들이 ‘제3의 공간(third places)’이라고 부르는 장소들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제3의 공간이란 가정과 직장을 제외하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만나고 교류하는 공간을 뜻하며, 커피숍과 영화관, 도서관, 박물관, 식당, 여가시설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여파와 온라인 쇼핑, 스트리밍 서비스의 확산, 가상 공간의 성장 등 여러 요인이 이러한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과거에는 집 밖으로 나가야만 할 수 있었던 많은 일을 이제는 집 안에서도 해결할 수 있게 됐고, 사람들은 점점 다른 사람과 직접 마주치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팬데믹이나 인터넷의 등장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작됐다.

‘나 홀로 볼링’의 시대

약 25년 전 하버드대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넘(Robert Putnam)은 『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에서 미국 사회의 시민적 유대가 약화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의 유명한 사례는 볼링이었다. 볼링을 즐기는 사람의 수 자체는 줄지 않았지만, 전통적인 볼링 리그에 참여하기보다 혼자 또는 소규모로 볼링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퍼트넘이 우려했던 것은 볼링이라는 스포츠의 미래가 아니라 미국 시민사회의 미래였다. 그가 바라본 것은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협력하며 공동의 목적을 위해 일하는 경험 자체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현상이었다. 퍼트넘의 연구를 돌아보며 한 학자는 현대 사회와 기술의 변화가 타인과 연대하는 인간의 능력 자체를 약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점점 더 고립된 사람들과 소파에 앉아 화면만 바라보는 사람들의 사회로 변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했다. 오늘날 그 질문은 더욱 절실하게 들린다.

외로움이 건강을 위협할 때

제3의 공간이 사라지는 현상은 단순히 사람들이 만날 장소가 줄어드는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의 건강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조이노는 자신의 글에서 사회적 고립과 외로움이 인간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지적한다. 널리 인용되는 연구에 따르면 만성적인 사회적 고립이 건강에 미치는 위험은 하루에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과 비교될 정도로 심각할 수 있으며, 미국 의무총감(Surgeon General) 역시 사회적으로 고립된 사람들의 조기 사망 위험이 크게 높아질 수 있다고 경고해 왔다.

심리학자 줄리안 홀트-런스타드(Julianne Holt-Lunstad)는 이러한 문제를 설명하면서 현대 사회가 인간의 관계적 필요보다 효율성과 경제적 이익을 우선해 설계돼 왔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빠르고 편리하며 생산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반드시 인간의 번영과 행복을 위한 사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기술은 많은 일을 더 편리하게 만들었지만, 편리함이 인간관계를 자동으로 깊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타인과 부딪히고 기다리고 대화하며 서로에게 의존해야 할 필요가 줄어들면서, 인간을 공동체로 묶어주던 일상의 접점들도 함께 사라질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교회가 가진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모이는 공동체’다

오늘날의 사회적 흐름은 역설적으로 교회가 세상에 참되고 선하며 더 나은 삶의 방식을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다. ‘교회’를 뜻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ekklesia)’는 기본적으로 ‘모임’ 또는 ‘회중’을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 교회는 추상적인 종교 개념이 아니라 특정한 장소에서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삶을 나누는 사람들의 공동체로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고전 1:2)라고 편지할 수 있었다.

기독교 신앙에는 개인적인 차원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개인적이라는 말이 곧 사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신앙은 개인의 마음속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내는 삶으로 표현된다. 그리스도인은 혼자서만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성도와 함께 예배하고 식탁을 나누며 서로의 짐을 지고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도록 부름받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단순히 일주일에 한 번 종교적인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기관이 아니라, 인간이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성장하며 사랑을 배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인간의 번영을 위한 공동체

교회에는 인간의 진정한 번영을 가꾸어야 할 특별한 책임이 있다. 기독교 세계관 연구기관인 콜슨 센터(Colson Center)의 마이클 크레이븐(Michael Craven)은 신자들이 성경을 통해 깊이 형성되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높이며, 복음을 말과 행동으로 살아낼 때 공동체와 가족, 제도와 문화까지 변화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문화적 영향력 자체를 교회의 최우선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자신의 본래 사명에 충실할 때 그 결과로 주변 사회에 선한 영향이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에 대한 비전은 사람을 끌어모으기 위한 이벤트나 경품, 세련된 커피숍, 화려한 공연보다 훨씬 깊은 차원을 요구한다. 물론 이러한 요소들이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인간의 외로움과 사회적 단절이라는 더 깊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진정한 제자훈련과 영적 형성이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실제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법을 배울 때, 교회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 교회 건물의 담장을 넘어설 수 있다. 외로운 사람을 찾아가고, 상처 입은 가족을 돌보며, 도움이 필요한 이웃과 함께하고, 지역사회가 다시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함께 모인다는 것의 의미

오늘날 교회 역시 출석률 감소라는 자체적인 위기와 씨름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함께 모이는 교회’의 의미는 더욱 중요하다. 히브리서 10장 24~25절은 성도들에게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교회는 단순히 설교를 듣는 장소가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누군가의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살피며, 서로를 붙들어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온라인 예배와 디지털 콘텐츠는 여러 상황에서 유익한 도구가 될 수 있지만, 화면을 통해 설교를 시청하는 것과 실제 사람들과 한 공간에 앉아 예배하고 관계를 맺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 기독교의 공동체성은 단순한 정보 전달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자신을 아는 사람이 필요하고, 함께 식사할 사람과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며, 자신이 보이지 않을 때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아플 때 찾아오고, 슬플 때 함께 울며, 기쁠 때 함께 기뻐할 사람들이 필요하며, 이것이 교회가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되면서도 동시에 가장 절실한 선물 가운데 하나다.

외로운 시대에 교회가 답이 되려면

교회가 외로움의 시대에 하나의 대안이 되려면 단순히 “교회에 나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실제로 외로운 사람이 들어왔을 때 그가 관계를 경험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새로운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식탁으로 초대하며, 세대와 계층을 넘어 관계를 맺고, 혼자 사는 사람과 가족이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예배가 끝난 뒤 곧바로 모두가 흩어지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의 삶에 머물러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형성된 이러한 관계는 교회 밖으로도 흘러가야 한다. 이웃과 지역사회를 섬기고, 고립된 노인과 청년을 돌보며, 가족과 공동체가 다시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교회의 사명 가운데 포함된다. 토크빌이 보았던 시민 결사체의 힘은 사람들이 단순히 같은 공간에 모인다는 데 있지 않았고,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서 인간이 변화된다는 데 있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교회는 사람들이 그저 일요일마다 잠시 지나가는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을 배우고, 다른 사람을 섬기며, 자신의 삶이 더 큰 공동체와 연결돼 있음을 경험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점점 더 개인화되고 디지털화되며 고립되어 가는 사회에서 이러한 공동체의 가치는 오히려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교회는 기독교인들만을 위한 사적인 종교 공간이 아니다. 건강한 교회는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 전체에 관계와 돌봄, 소속감과 희망을 공급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 오늘날 외로움과 사회적 단절이 개인의 정서적 문제를 넘어 공중보건의 문제로까지 이야기되는 시대라면, 교회가 가진 공동체적 사명 역시 새롭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회의 건강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다시 함께 모이고 서로를 알고 서로의 짐을 지며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공동체가 살아 있는가의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미래는 인간의 번영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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