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칼럼 66] 한일합병(경술국치)

오피니언·칼럼
105인 사건과 3·1운동, 그리고 봉오동·청산리 전투로 이어진 독립운동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독립군. 맨 앞 앉아 있는 사람이 김좌진 장군

1910년 8월 22일 오후 2시, 창덕궁 흥복전에서 조선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총리대신 이완용은 일본과 합병을 해야 한다고 한 시간 넘게 설명했고 대신 누구 하나 반대도 항의도 없었다. 이완용은 한일합병을 가결시키고, 데라우치 통감의 관사로 찾아가서 합병조약을 체결했다. 이완용은 합병의 공으로 훈1등 백작, 수당 60원, 퇴직금 1,458원, 총독부 공채 15만 원을 받았다.

1910년 8월 29일, 제27대 조선왕조는 519년간의 국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리고 36년간의 국권 상실로 자유 박탈, 인권 유린, 국혼 상실, 말·글·이름을 빼앗겼다.

105인 사건은 다음과 같다. 안명근 선생은 안중근 의사와 동갑내기 사촌 동생으로, 항일청년들을 서간도로 보내서 독립군을 양성하려고 황해도 지역의 부자들에게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1910년 11월 신민회의 민병찬 등이 이 일을 일제 헌병에게 밀고했고, 그해 12월 안 선생이 일경에게 붙잡혔다.

일제는 혹독하게 고문을 했고 신민회 회원 160명을 구속시키고, 1910년 11월 27일 압록강 철교 낙성식에 참석하는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고 조작해서 기독인을 중심으로 한 105명을 유죄로 구속시켰다.

고종황제는 1919년 1월 21일 새벽 6시, 67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다. 고종의 독살설이 나라 잃은 설움으로 울분에 차 있던 백성들을 한마음으로 뭉치게 했다.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에 힘을 얻은 기독교 중심의 지도자들은 고종의 국상일에 독립선언을 발표하기로 하고, 1919년 3월 1일 2시에 탑골공원에서 5천 명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다. 이 선언서는 최남선이 1919년 2월부터 3주에 걸쳐 작성한 것으로, 내용의 서두는 이렇다.

“기미독립선언서. 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된 나라인 것과 조선 사람이 자주하는 국민임을 선언하도다. 이것으로써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밝히며 이것으로써 자손만대 앞에 겨레가 스스로 존재하는 권리를 영원히 누리도록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면 이것을 선언하는 터이며 이천만 민중의 충성을 모아 이것을 널리 알리는 터이며 사람 된 양심의 발로로 말미암은 세계 개조의 큰 기운에 순응해 나가기 위하여 이것을 드러내는 터이니 이는 하늘의 명령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같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므로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것을 막고 누르지 못할 것이다.”

1919년 2월 27일 밤, 서울의 보성인쇄소에서 밤새도록 독립선언문 22,000장을 찍었다. 그리고 교회를 중심으로 서울 시내와 지방으로 비밀리에 전달하기 시작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시작으로 3월 초 북부, 3월 중순부터 중부와 남부에서, 그리고 만주, 연해주, 미국 등 재외까지 독립운동의 불길이 뜨겁게 타올랐다. 전국 211개 군에서 1,542회의 만세 시위가 유생, 학생, 종교인, 상인, 농민, 노동자 등 남녀노소를 불문한 200여만 명이 지역과 종교, 신분을 초월해서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열망 하나로 피를 토해 내는 듯한 대한독립만세를 오직 태극기 하나만을 들고 맨주먹으로 외쳤다. 3·1 독립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부정하고 비폭력으로 독립을 요구한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대내외에 선포한 것이다.

3·1 독립운동 직후 러시아, 상해, 서울에 임시정부가 세워졌는데 1919년 9월 상해임시정부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국무총리에 이동휘를 선출했다. 3·1 독립운동은 전 세계에 알려지고 약소 민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북경대 학생들은 1919년 5월 4일 운동 선언문에서 ‘독립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한국을 본받자’고 했다.

1919년 6월 미국의 식민지 필리핀의 마닐라와 영국 식민지 이집트의 대학생들이 독립운동을 펼쳤다. 3·1 독립운동 이후 1920년 6월 7일 대한독립군과 군무도독부 등의 연합군, 대한북로독군부가 봉오동에서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일본군 19사단과 격전을 벌여서 기습 공격으로 큰 승리를 기록했다.

이범희 목사

봉오동에서 대패한 일본군이 독립군을 소탕한다고 진격해 올 때, 독립군 부대들은 청산리 계곡으로 집결하여 ‘김좌진 부대가 독립군은 무기도 없이 도망갔다’고 허위 정보를 흘리고 백운평 골짜기 좌우에 매복하고 있다가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꼬박 6일간 천수평, 어랑촌, 맹개골, 완루구, 천보산, 고동하 계곡 등에서 10여 차례 전투를 벌였다. 이때 일본군 전사자가 1,200명, 부상자가 2,100명 등이었고, 독립군은 전사 60명, 부상 910명으로, 독립군 사상 가장 큰 격전이면서 최대 승리를 가져온 전쟁이었다.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의 승전은 일제의 만행으로 고통당하는 전 국민에게 구국 총궐기의 정신을 불어넣는 크나큰 계기가 되었다.

이범희 목사(㈔한국보훈선교단 이사장, 6.25역사기억연대 역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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