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배타적 무기가 될 때: 아우슈비츠의 교훈과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연대

살림 J. 무나이어 교수. ©reconciledworld.net

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살림 J. 무나이어 교수의 기고글인 '다른 이들이 희생될 때 ‘다시는 안 된다’는 다짐의 의미'(What does "never again" mean when others become victims)을 8월 12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살림 J. 무나이어 교수는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인, 그리고 중동 지역의 다른 분열된 공동체들 사이의 화해를 증진하는 데 헌신해 온 단체 ‘무살라하’의 설립자다. 현재 세계복음주의연맹(WEA) 산하 평화와화해네트워크(PRN)의 중동·북아프리카 지역 코디네이터로 섬기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2024년 독일을 방문했을 때 필자는 존경받는 한 독일 목회자와 대화를 나누게 됐다. 전 세계 텔레비전 화면을 가득 채운 파괴와 민간인들의 고통스러운 모습 때문에 대화는 자연스럽게 가자지구(Gaza) 문제로 이어졌다.

필자는 그에게 단순한 질문을 던졌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도덕적·윤리적 책임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저 고통에 대해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을까요?” 그의 대답은 즉각적이었고 깊은 감정이 배어 있었다. “우리는 영원히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의 편에 설 것입니다.”

그 대답은 많은 것을 시사했다. 유별난 반응이어서가 아니라, 필자가 유럽과 북미의 여러 교회 지도자들과 나눠온 대화에서 반복해서 들었던 목소리와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 이면에는 깊은 도덕적 딜레마가 자리하고 있었다.

많은 서구 그리스도인에게 ‘유대인의 고통에 연대하는 것’은 도덕적 상상력의 중요한 일부가 됐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에 연민을 표하는 일조차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배반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있다. 반유대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수십 년 동안 쌓아온 유대교-기독교 간 화해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우려, 어렵게 구축한 관계가 손상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많은 교회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다른 인도주의적 위기 앞에서는 분명했던 도덕적 목소리가 가자지구 앞에서는 유독 주저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불편하지만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아우슈비츠에서 태어난 보편적인 도덕적 비전은 어디로 갔는가.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다(Never Again)”는 결의가 왜 어떤 경우에는 하나의 역사적 비극에만 강하게 적용되고, 다른 민족의 고통 앞에서는 머뭇거리는 원칙으로 축소되는가.

‘다시는 안 된다’는 약속의 본질

20세기가 인류에게 남긴 윤리적 명령 가운데 “다시는 안 된다”만큼 강력한 것은 드물다. 아우슈비츠와 절멸수용소의 잿더미에서 태어난 이 문구는 애초부터 어느 한 국가나 민족만의 전유물로 남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체성을 이유로 어떤 인간 공동체도 다시는 조직적인 비인간화와 대량 학살, 파괴를 겪어서는 안 된다는 보편적인 다짐이었다. 아우슈비츠가 지닌 도덕적 권위는 인간의 존엄성이 위협받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인류의 양심을 깨우는 힘에 있다.

엘리 위젤(Elie Wiesel)만큼 이러한 기억의 윤리를 강하게 구현한 인물도 드물 것이다. 회고록 『나이트(Night)』와 수십 년에 걸친 공개 활동을 통해 위젤은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홀로코스트 기억의 수호자가 됐다. 그는 희생자를 잊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으며, 무관심은 억압을 방조한다고 여러 세대에 걸쳐 강조했다.

“중립은 억압자를 도울 뿐, 결코 희생자를 돕지 않는다.”

이러한 신념은 홀로코스트 이후 시대의 중요한 윤리적 교훈 가운데 하나가 되어 정부와 교회, 개인의 양심에 지속적으로 도전을 던졌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가자지구는 바로 그 원칙을 시험하는 불편한 사례가 됐다.

위젤은 세계가 유대인의 고통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촉구했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같은 정도의 도덕적 절박함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스라엘의 점령과 군사 작전을 둘러싼 그의 침묵은 그의 유산을 평가할 때 가장 논쟁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문제는 이스라엘을 향한 위젤의 사랑 자체가 아니다. 그의 개인적인 역사와 상상하기 어려운 트라우마를 생각하면 그러한 충성심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아우슈비츠의 윤리적 교훈이 자신의 공동체를 넘어 일관되게 적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여전히 보편적인 원칙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더욱 중요하다.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목적은 희생자 사이에 새로운 서열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고통이 인류에게 가르쳐준 것이 있다면, 비인간화의 모든 과정은 돌이킬 수 없는 단계에 이르기 전에 저항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아우슈비츠를 기억한다는 것은 연민의 범위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하는 일이어야 한다. 그 기억의 지속적인 의미는 과거를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 인간성을 부정당하는 이들을 향한 우리의 도덕적 책임을 형성하는 데 있다.

유대인 지성계 안의 다양한 목소리

물론 유대인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하나의 목소리만 존재한 것은 아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아들인 노먼 핀켈스타인(Norman Finkelstein)은 홀로코스트의 기억이 정치적 자본이나 도덕적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오랫동안 주장해 왔다. 그는 『홀로코스트 산업(The Holocaust Industry)』에서 희생자를 기리는 것과 그 기억을 정부 비판을 차단하는 방패로 사용하는 것은 구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모든 결론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핀켈스타인이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 대한 진정한 존중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인권을 포함한 보편적 인권을 지키는 데까지 이어져야 하지 않는가. 그의 관점에서 부모 세대의 고통은 연민을 좁히는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넓히는 책임이 된다.

이처럼 유대인 사상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목소리는 중요하다. 아우슈비츠를 기억한다는 것이 반드시 특정한 정치적 입장에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억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기억은 궁극적으로 민족주의에 복무하는가, 아니면 인류애에 복무하는가.”

오메르 바르토브의 경고: 보편성을 잃어버린 기억

이 질문은 오메르 바르토브(Omer Bartov)의 연구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홀로코스트와 제노사이드 연구로 잘 알려진 바르토브는 현대 사회가 어떻게 대량 폭력으로 미끄러져가는지,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극단적인 잔혹성에 가담하게 되는지를 오랫동안 연구해 왔다. 그렇기에 가자지구에 대한 그의 최근 분석은 더욱 주목을 받았다.

바르토브는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참사를 단순히 2023년 10월 7일의 잔혹 행위에 대한 ‘반응’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사태를 이스라엘의 국가 형성 과정과 장기간의 군사 점령,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배제와 비인간화가 점차 정상화되어온 더 긴 역사적 맥락 안에서 바라본다.

그의 경고가 주목되는 이유는 그가 유대인의 역사를 부정하거나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적대하는 인물이 아니라, 홀로코스트의 역사적 기억을 연구하고 보존해 온 학자이기 때문이다. 바르토브에게 아우슈비츠를 기억하는 가장 깊은 목적은 유대인의 고통을 과거에 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이 서서히 박탈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도덕적 경계심을 갖도록 만드는 데 있다.

그는 최근 저서 『이스라엘: 무엇이 잘못되었나(Israel: What Went Wrong?)』에서 현재의 위기가 하루아침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고 분석한다. 장기간의 점령과 정착촌 확대, 민족주의의 성장, 팔레스타인 배제의 정상화 등이 이스라엘의 민주적·도덕적 토대를 점차 약화시켰으며, 오늘날 가자지구의 파괴를 가능하게 한 정치적 환경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그의 문제 제기는 단순히 군사 전략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스라엘 사회의 더 깊은 정치적·도덕적 방향을 향한다.

바르토브는 또한 이스라엘 정치문화 안에서 “다시는 안 된다”는 말의 의미가 변해왔다고 지적한다. 제노사이드에 대한 보편적인 경고였던 말이 점차 “유대인에게 또 다른 제노사이드는 결코 일어나게 하지 않겠다”는 국가적 자기보호의 명령으로 좁아졌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생각하면 이러한 결의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바르토브는 이것이 이른바 ‘또다시 신드롬(again and again syndrome)’​으로 이어질 위험을 경고한다. 또 다른 홀로코스트가 언제라도 임박할 수 있다는 뿌리 깊은 두려움 속에서 모든 외부 위협을 실존적 절멸의 렌즈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역사적 트라우마가 압도적인 군사력과 결합하면 두려움이 대규모 폭력을 정당화하고, 도덕적 주저함마저 약화시킬 수 있다.

바르토브의 문제 제기는 선택적 기억을 지적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홀로코스트를 완전히 독특하고 비교 불가능한 역사적 사건으로만 다루려는 태도에도 비판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 전례 없는 참혹함을 축소하지 않으면서도, 홀로코스트를 식민주의와 인종차별, 제국주의, 근대 제노사이드라는 더 넓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관점에서 아우슈비츠를 이러한 역사적 흐름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은 오히려 그 도덕적 의미를 약화시킬 수 있다. 유대인이 겪은 고통의 특수성이 다른 이들의 고통을 축소하거나 부정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홀로코스트의 기억은 오히려 비인간화와 민족적 박해, 강제이주, 대량 파괴로 이어지는 모든 역사적 과정에 빛을 비추는 등대가 되어야 한다.

그가 던지는 문제의식은 깊다. “다시는 안 된다”는 결의가 실패하는 이유는 단지 그것이 선택적으로 적용되기 때문만이 아니다. 홀로코스트의 기억 자체가 국가 정체성이나 정치 이데올로기의 도구가 될 때 그 보편적인 윤리도 함께 무너지기 때문이다.

기억이 한 공동체만 보호하고 다른 공동체를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든다면, 그것은 보편적 윤리로서의 목적을 잃는다. 아우슈비츠는 더 이상 인류 전체를 향한 경고가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 서사 안에 갇힌 기억이 되고 만다.

바로 이것이 가자지구가 그토록 혹독한 도덕적 시험이 되는 이유다. 유대인의 고통을 계속 기억해야 하는가가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당연히 기억돼야 한다. 진짜 질문은 유대인의 고통을 기억하는 바로 그 행위가 우리로 하여금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 역시 동일한 인간적·도덕적 무게로 바라보게 하는가 하는 것이다.

기억이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현장에서 연민을 깨우지 못한다면 그 기억은 본래의 목적에서 멀어진다. 그러나 아우슈비츠가 인류에게 비인간화가 재앙으로 이어지기 전에 그 모든 과정에 저항하라고 계속 가르칠 수 있다면, 그 기억의 도덕적 권위는 오늘도 살아 있을 것이다.

기억과 도덕적 용기 사이에서 길을 잃은 기독교

아우슈비츠와 가자지구가 던지는 질문은 역사가나 정치 지도자들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교회 역시 그 앞에 서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서구 기독교는 오랜 반유대주의의 역사와 맞서 의미 있는 변화를 이루었다. 많은 교회는 유대인을 향한 수 세기의 신학적 적대감을 회개했고, 홀로코스트 교육은 기독교적 신앙 형성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유대교-기독교 간 대화 역시 겸손과 회개, 상호 존중에 기초한 새로운 관계를 열었다.

이는 현대 기독교가 이뤄낸 중요한 도덕적 성취이며,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자산이다.

그러나 가자지구의 비극은 예상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문제를 드러냈다. 일부 그리스도인에게 이러한 화해의 성취가 정서적·정치적으로 너무 중요해진 나머지 이스라엘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거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을 공개적으로 애도하는 일이 마치 유대교-기독교 화해 자체를 위협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반유대주의자로 몰릴까 두려워 침묵한다. 또 어떤 사람은 유대인 공동체와 수십 년 동안 쌓아온 관계가 무너질까 걱정한다. 기독교 시오니즘(Christian Zionism)과 연결된 정치적·신학적 신념이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다.

이유는 서로 다르지만 결과는 비슷하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고통받는 민족들에게 보여온 공적인 연민과 예언자적 관심을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보이는 데에는 유독 깊은 주저함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비는 우리의 기억이 선택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게 한다. 교회는 아우슈비츠를 신실하게 기억하면서도 가자지구 앞에서는 동일한 도덕적 일관성을 보여주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다시는 안 된다”는 명령이 역사적 기억을 형성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것이 기독교 윤리를 충분히 변화시키지 못했다면 기억은 도덕적 용기의 원천이 아니라 단순한 기념 행위로 남게 된다.

성경적 기억과 십자가의 길

성경이 말하는 ‘기억’은 전혀 다른 비전을 제시한다. 성경에서 기억은 과거를 회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고대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을 기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목적은 단순히 자신의 고통을 잊지 않는 데 있지 않았다. 자신들이 나그네였음을 기억함으로써 이방인과 과부, 고아를 억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성경에서 기억은 곧 정의를 향한 부르심이다. 출애굽 사건이 보존된 이유도 이스라엘의 해방 자체만을 기념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경험한 고통이 다른 이들을 향한 연민으로 이어지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구약성경에서 기억은 언약의 신실함과 윤리적 책임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선지자들은 정의와 단절된 예배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끊임없이 경고했다. 종교의식과 신성한 역사, 민족적 정체성은 공의와 자비, 겸손을 대신할 수 없다.

권력이 연민의 목소리를 억누르고 종교적 확신이 억압을 정당화할 때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정의의 길로 불러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기억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삶으로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영적 망각이다.

이 비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른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끊임없이 민족적·종교적·정치적·사회적 경계를 넘어가셨다. 사람을 단순히 ‘적’이라는 범주로 축소하는 것을 거부하셨고, 권력을 가진 자들보다 고통받는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다.

그분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책망하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해 눈물을 흘리셨다. 외부인을 받아들이고 소외된 사람들의 존엄성을 회복시키셨으며, 종교적·정치적 질서에서 밀려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기쁜 소식임을 선포하셨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그리스도교적 기억을 해석하는 중심이 된다.

갈보리에서 하나님은 제국의 힘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으시고 불의와 폭력을 당하는 자의 자리로 내려가신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 속으로 들어오시며, 타인의 비인간화를 통해 스스로를 보존하려는 정치적·종교적 권력의 본질을 폭로하신다. 그리고 부활은 죽음과 증오, 폭력이 결코 마지막 말을 할 수 없음을 선언한다.

결단의 기로에 선 교회

이러한 관점에서 가자지구는 단순한 정치적 위기를 넘어 기독교적 기억을 향한 뼈아픈 영적 시험이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진정 믿는다면, 이스라엘인의 생명과 팔레스타인인의 생명 모두를 같은 인간적 존엄성을 지닌 존재로 바라봐야 한다.

반유대주의를 거부한다는 것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비인간화를 묵인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존엄성을 옹호하는 일이 유대인을 향한 적대감으로 변질되어서도 안 된다.

참된 제자도는 이 두 가지 비인간화를 모두 거부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민족과 종교, 국적에 따라 나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살아 있는 도덕적 나침반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현대의 불의 앞에서 목소리를 잃은 채 정체성의 경계 안에 갇힌 기억으로 남겨둘 것인가.

신실한 기억은 희생자들 사이에 서열을 만들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의 고통을 축소하지 않으면서 유대인의 고통을 온전히 기억할 수 있다. 반유대주의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동시에 인종차별과 점령, 집단적 처벌, 강제이주, 그리고 인간의 동등한 존엄성을 부정하는 모든 이데올로기에 맞설 수 있다.

오메르 바르토브가 강조하듯, 아우슈비츠의 지속적인 의미는 어느 한 민족의 독특한 역사적 기억을 보존하는 데만 있지 않다. 비인간화의 징후가 돌이킬 수 없는 재앙으로 번지기 전에 그것을 알아보고 저항할 수 있도록 인류의 도덕적 감각을 깨우는 데 있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의 답은 아우슈비츠에서 멈추지 않고 갈보리까지 나아가야 한다. 아우슈비츠는 인간이 서로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부정할 때 얼마나 끔찍한 결과가 나타날 수 있는지를 가르쳐준다. 갈보리는 그 참극을 향한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리스도 안에서 기억은 화해와 정의, 회개와 희망으로 변화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지 과거를 보존하는 공동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 기억이 용기를 낳고, 신학이 연민을 빚어내며, 예배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모든 인간의 동등한 존엄성을 증언하는 살아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다시는 안 된다”는 말은 특정한 과거만을 가리키는 구호가 아니라 오늘의 모든 희생자를 향해 살아 움직이는 기독교적 양심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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