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속도가 아닌 뿌리의 속도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지혜로운 연대

데이비드 슈미드갈. ©linkedin.com

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데이비드 슈미드갈의 기고글인 '더 깊이 뿌리내리고 온전히 성장하려면 복지 지원을 넘어야 한다'(We must move beyond welfare for deeper roots and flourishing)를 8월 6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는 점점 커져가는 불편함이 있다.

세상에 선을 행하려고 애써온 우리의 방식이 때로는 지나치게 서둘렀고, 파편화돼 있으며, 어딘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조용하지만 뼈아픈 깨달음이다.

기계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역설적으로 무엇이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지 다시 묻게 된다. 하나님 나라의 인내하고 변함없는 방식에 더욱 깊이 귀 기울이며, 빠른 성과보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충실하게 관계를 쌓아가는 삶에 마음이 끌린다.

수세대 동안 자선과 선교를 위한 선의의 노력은 상당 부분 시장의 언어와 사고방식을 빌려왔다. 우리는 규모 확장과 영향력, 파이프라인, 산출량, 투자 대비 수익률(ROI)을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시장의 속도로 움직이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뿌리의 속도’로 움직인다. 산업혁명과 컴퓨터, 스마트폰, 그리고 이제 AI 혁명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끊임없이 더 빠른 속도를 향해 달려왔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오히려 더 인간적인 속도에 다시 끌리고 있다.

현대 사회는 기가바이트의 속도로 질주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흙 속의 씨앗처럼 자란다. 조용하고 유기적이다. 때로는 한 계절 내내 아무 변화도 보이지 않는 듯하지만, 그 안에는 생명을 낳는 잠재력이 가득하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실 때에도 효율성과 확장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씨를 뿌리는 농부와 반죽 속에 스며드는 누룩, 감추어진 보화를 말씀하셨다. 씨앗 대부분은 오래 지속되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땅에 떨어지기도 했다.

하나님의 생명은 본질적으로 생명을 낳고 퍼져가는 성질을 지닌다. 그러나 그것은 관계와 신뢰, 시간이라는 토양 안에서 자란다.

의존에서 상호의존으로

오늘 우리가 직면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선교’와 ‘원조’라고 부르는 많은 활동이 여전히 시혜적 복지의 상상력 안에서 작동한다는 점이다. 의도는 선하지만 구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시혜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면 우리는 흔히 상대방의 ‘필요’에서 출발해 결국 ‘의존’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 대안이 차갑고 고립된 개인주의적 독립성인 것은 아니다. 복음이 우리를 초대하는 곳은 훨씬 더 풍요로운 삶의 방식이다. 바로 ‘상호의존(interdependence)’이다. 상호의존은 관대함과 존엄성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 관계다. 서로 주고받으며 함께 성장하고, 함께 인간다움을 회복해 가는 언약적 삶의 방식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관대함은 단순한 관리나 지원을 넘어 지혜로운 행위가 된다. ‘지혜로운 자선’은 인내한다. 관계를 중심에 두며, 이미 존재하는 가능성을 살려내는 촉매 역할을 한다. 문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출발한다.

‘무엇을 해결해야 하는가’보다 ‘누구와 함께하고 있는가’를 먼저 묻는다. 행동하기 전에 듣고, 이끌기 전에 배우며, 하나님께서 이미 그 공동체 안에서 일하고 계심을 인정한다.

지혜로운 자선은 의존성을 강화하지 않는다. 베푸는 사람을 중심에 세우지도 않는다. 대신 지역 공동체가 가진 역량을 강화하고, 이미 존재하는 자원을 돌보며, 장기적인 번영에 투자한다. 그것은 ‘구원자’가 아니라 ‘종’의 자리에서 시작한다.

신뢰가 쌓이는 속도로 움직이고, 결과를 통제하려는 충동을 내려놓으며, 상대를 단순한 수혜자가 아니라 동역자로 세운다. 그때 관대함은 누군가를 ‘구출하는 행위’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인내하며 생명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행위’가 된다.

우리의 모델을 다시 바라보다

최근 동료 앤드루 스콧(Andrew Scott)과 필자는 우간다 캄팔라에서 데오(Deo) 목사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교회를 개척할 당시 사역의 열매를 측정하는 기준이 출석 인원이나 예산 규모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가 던진 질문은 달랐다: 지역사회가 변화하고 있는가, 깨어진 관계들이 회복되고 있는가, 사람들이 존엄성과 희망을 경험하고 있는가. 그에게 이것이야말로 ‘실제로 역사하는 복음’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이처럼 데오 목사는 하나님께서 세계 곳곳의 지역사회 안에서 이미 세워가고 계신 수많은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우리의 부르심은 외부에서 만들어진 전략을 일방적으로 가져가 이식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심이 각 지역의 언어와 문화, 관계 속에서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도록 자원과 사람, 관계를 연결하는 튼튼한 ‘연결 조직’이 되는 데 있다.

그러나 서구 사회에서는 여전히 이러한 방식으로 사역의 열매를 측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모델 가운데 상당수는 공장처럼 작동한다. 회심자의 숫자를 세고, 대형 캠퍼스를 건설하며, 지역 공동체의 변화보다는 예산과 출석률을 중심으로 성공을 판단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에클레시아의 의미를 축소해 버리기도 한다. 에클레시아는 단순히 네 개의 벽 안에 모인 사람들을 뜻하지 않는다. 세상 속으로 부름받아 흩어지고, 그곳에서 살아 움직이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가꾸는 신앙’을 회복하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단체 ‘스캐터(Scatter)’에서는 이제 ‘생명을 낳는 기독교(generative Christianity)’를 다시 발견해야 할 때라고 믿는다. 이는 단순히 더 많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더 빠르게 확장하는 신앙이 아니다. ‘가꿈’을 통해 생명이 증식하도록 돕는 신앙이다.

우리가 세상에 선을 중개하는 공동체를 가꾸고자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에클레시아는 양보다 질을, 속도보다 형성을, 명성보다 열매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 모습은 브랜드를 관리하는 기업보다 정원을 돌보는 정원사에 가깝다.

물론 숫자와 성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성장 자체가 잘못된 것도 아니다. 다만 무엇을 진정한 열매로 볼 것인지 다시 묻는 것이다: 사람들이 더욱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가, 지역 공동체의 존엄성이 회복되고 있는가, 사회 구조가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를 더 많이 반영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가.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측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복지를 넘어 함께 번영하는 삶으로

시혜적 복지의 틀을 넘어설 때, 우리는 생명을 낳는 참여의 자리로 초대받는다. 겸손하게 다가가고, 좋은 토양에 투자하며,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의 관대함은 통제가 아니라 촉매가 된다.

우리의 존재는 온정주의가 아니라 진정한 동역이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지역 공동체의 평안과 번영으로 이어진다. 예레미야 29장 7절이 말하듯, 우리는 우리가 속한 곳의 평안을 구하며 그 번영에 함께 참여하도록 부름받았다.

우리는 함께 더 풍성하게 살아가는 현실을 만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번영은 결코 대량 생산되지 않는다. 그것은 세심하게 가꾸어지는 것이다. 좋은 흙을 만들고, 좋은 씨앗을 심고, 충분한 시간을 기다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신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로 말이다.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 #기독일보 #기독일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