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중동 정세 불안을 이유로 석유최고가격제를 더 강화할 가능성을 내비치면서 정유업계의 부담이 커지고 있다. 가격 통제에 따른 손실이 누적되는 가운데 손실 보전 기준을 둘러싼 정부와 업계의 입장 차, 검찰의 유가 담합 수사, 중동 지역의 공급 불안까지 겹친 상황이다.
22일 업계에 따르면 이재명 대통령은 전날 국무회의에서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석유최고가격을 더 내리거나 폐지했어야 하는데, 오히려 더 강화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호르무즈 해협 봉쇄 우려 등으로 국제유가가 다시 상승 압력을 받자 국내 물가 안정을 위해 석유제품 가격 통제를 유지하거나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로 풀이됐다.
이 대통령은 유가 상승기에 발생할 수 있는 매점매석에 대해 초기부터 압수·몰수 조치를 강화하고, 필요할 경우 관련 법률 개정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정유업계 “누적 손실 5조원”…보전 규모는 불투명
정유업계는 석유최고가격제 시행이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수익성 부담이 확대되고 있다고 호소했다.
업계는 제도 시행 이후 정유사들의 누적 손실이 약 5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정부가 손실 보전을 위해 편성한 목적예비비 4조2000억원을 웃도는 규모다.
국제유가는 브렌트유 기준 배럴당 90달러 안팎까지 올랐지만 국내 휘발유와 경유 판매가격은 최고가격제의 적용을 받고 있다. 이에 정유사들은 원유 도입 비용 상승을 판매가격에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면서 수익성 저하와 재고평가손실 가능성을 함께 우려하고 있다.
손실 보전 범위를 놓고도 정부와 업계의 입장은 엇갈리고 있다. 정부는 실제 원가를 기준으로 손실을 보상한다는 입장이지만, 업계는 판매가격을 자율적으로 정하지 못해 발생한 기회비용도 보전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검찰 담합 수사까지 겹쳐 보전 절차 부담
정유업계의 손실 보전 문제는 검찰의 유가 담합 수사와 맞물리며 더욱 복잡해졌다.
서울중앙지검은 국내 정유사 4곳을 유가 담합 혐의로 기소했다. 수사 과정에서는 정유사들이 제조원가를 기준으로 이익을 냈다는 취지의 내부 자료가 확보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손실 보전 업무를 맡은 산업통상부도 보전금을 과도하게 지급할 경우 향후 감사나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부담을 안게 됐다. 정유사 입장에서도 담합 수사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정부를 상대로 손실 보전을 적극 요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정부 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가격을 억제했는데 손실 보전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기업만 부담을 떠안게 된다”며 “검찰 수사까지 진행되는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보전을 요구하기도 쉽지 않은 분위기”라고 말했다.
호르무즈·홍해 불안에 원유 조달비 상승 우려
미국과 이란의 군사적 긴장,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갈등도 정유업계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요인으로 꼽혔다.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가능성과 예멘 후티 반군의 홍해 공격 재개 우려가 동시에 현실화할 경우 원유 조달 비용과 해상 운송비가 큰 폭으로 오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국내 공급은 당장 큰 차질이 없을 것으로 전망됐다. 정유사들이 석유최고가격제에 따라 내수용 휘발유와 경유 물량을 우선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내수 공급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수출 물량이 줄고 운송비가 상승하면 정유사들의 수익성은 더 악화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업계 관계자는 “휘발유와 경유는 내수 물량을 우선 확보하고 가격도 사실상 통제되고 있어 단기간에 국내 공급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면서도 “수출 물량 감소와 운송비 급등으로 정유사들의 수익성은 나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