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복음주의연맹 “EU 문화 선언, 초월성과 성스러움 빠졌다”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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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 약 4억5천100만 명의 문화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공동 선언이 발표된 가운데, 유럽복음주의연맹(EEA)은 선언이 문화의 초월적·영적 차원을 배제했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EEA 공동 사무총장인 얀 베셀스(Jan Wessels)는 최근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과의 인터뷰에서 “교회의 복음적 증언은 아름다움이 그 자체를 넘어서는 진리를 가리킬 수 있다는 초월성을 문화 안에 제시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번 논평은 지난 6월 18일(이하 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이사회(European Council) 회의에서 유럽의회, EU 이사회,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수장이 공동 서명한 ‘유럽을 위한 문화, 문화를 위한 유럽(Europe for Culture, Culture for Europe)’ 선언과 관련해 나온 것이다.

공동 선언은 “유럽의 문화를 보호하고 증진하며 지원한다”는 공동의 정치적 의지를 담고 있다.

베셀스는 “이번 선언은 진정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며 “EU의 세 핵심 기관이 경제가 아닌 문화를 유럽 정책의 중심에 두겠다고 공동 약속한 첫 사례이며, 예술의 자유와 인공지능(AI) 거버넌스, 문화유산, 지역 통합에 이르기까지 12개 원칙을 포괄한 점은 상당한 정치적 의지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다만 그는 “이러한 의지가 실제 정책으로 이어질지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 문화를 정책 중심에 둔다는 틀 자체는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EU는 공동 선언을 통해 문화와 언어의 다양성을 보호하고, 모든 정책에 문화적 관점을 반영하는 한편 회원국의 권한은 존중하겠다고 밝혔다.

또 예술의 자유와 문화적 다양성, 포용성, 예술인들의 공정한 노동환경을 보장하고, 문화 분야에 대한 투자와 혁신, 역량 강화를 확대해 유럽이 세계 문화·창조 산업을 선도하도록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유럽의회 의장 로베르타 메촐라(Roberta Metsola)는 “유럽의 이야기는 예술과 문화, 창의성을 통해 쓰여진다”며 “문화를 유럽 프로젝트의 중심에 두고 창작자들을 지원하며 예술의 자유와 문화·언어의 다양성을 지키는 것은 유럽의 가장 큰 자산과 수많은 창의적 인재들에게 투자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EU 지도부는 공동 선언에서 문화와 창조 산업이 유럽의 공동 정체성과 자유, 평등, 인권 존중이라는 가치를 강화한다고 평가했다. 또한 지정학적 갈등, 기후변화, 디지털 전환, 사회적 불평등, 정신건강 위기 등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문화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밝혔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Ursula von der Leyen)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은 “문화는 우리의 정체성의 핵심이자 유럽의 경제적·지정학적 경쟁력의 원천”이라며 “예술의 자유를 보호하고 특히 젊은 세대가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겠다. 문화는 계속해서 통합과 배움의 힘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공동 선언에는 예술인에 대한 공정한 보수와 노동환경 보장, 청년과 취약계층의 문화 향유 기회 확대, 문화가 건강과 복지, 지역 발전, 지속가능한 관광에 기여하도록 지원하는 내용도 담겼다. 또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유럽의 문화유산과 언어적 다양성을 보호하겠다는 계획도 포함됐다.

당시 EU 이사회 의장국을 맡고 있던 키프로스 대통령 니코스 크리스토둘리데스(Nikos Christodoulides)는 “문화는 유럽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 요소”라며 “지정학적 불확실성과 급속한 기술 변화 속에서 예술가와 문화유산, 창의성에 대한 투자는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유럽을 하나로 묶는 가치에 대한 투자”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베셀스는 선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빠져 있는 내용”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선언 전체가 인간 중심적이며 도구주의적 관점에 머물러 있다”며 “문화는 민주주의와 경쟁력, 복지, 정체성, 지정학적 영향력을 위한 수단으로만 설명될 뿐, 초월성이나 아름다움이 자신을 넘어서는 진리를 가리킨다는 관점, 그리고 문화를 형성하는 성스러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고 비판했다.

이어 “신학적으로 말하면 EU의 문화관은 철저히 내재적(immanent)”이라며 “바로 이 지점에서 교회는 대체 불가능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교회는 단순히 종교적 권리를 요구하는 이익집단이 아니라 문화의 목적 자체에 대해 전혀 다른 이해를 가진 공동체”라고 말했다.

그는 “기독교 전통은 문화 창조를 인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이해해 왔다”며 “우리가 문화를 만드는 이유는 창조주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문화가 국내총생산(GDP)을 늘리고 민주주의를 강화한다’는 접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설명했다.

베셀스는 유럽의 교회들이 이미 이러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유럽 전역의 복음주의 공동체들은 사회 양극화와 민족주의의 확산, 정의와 평화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며 “EEA가 발표한 ‘공적 삶 속의 유럽 복음주의자들’ 성명은 복음주의를 극우 정치나 위험한 극단주의와 동일시하는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복음주의자들은 정의와 평화, 진실, 화해를 추구하며 공동선을 위해 헌신하고 있고, 강압적이고 배타적인 형태의 기독교 민족주의를 분명히 거부한다”며 “모든 세계관이 자유롭고 존중받는 가운데 표현될 수 있는 시민사회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베셀스는 또 “문제는 교회가 공적 영역에 있느냐, 하위문화에 머무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깊은 문화적 상상력을 갖고 있느냐”라며 “성경과 예배, 지역 공동체에 깊이 뿌리내린 교회만이 공적 담론에 독특한 기여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례로 네덜란드 헤이그 실더르스베이크(Schilderswijk) 지역의 하벤커르크(Havenkerk)를 소개했다. 이 교회는 매춘 경험이 있는 여성과 난민, 노숙인, 빈곤층 등을 섬기며 지역사회 안에서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베셀스는 “이러한 문화 형성이야말로 EU의 각종 정책과 재정 지원만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가장 본질적인 문화 창조”라며 “유럽 곳곳에서 지역사회를 위한 교회들이 같은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난민 지원, 중독 회복, 푸드뱅크, 인신매매 피해자 지원, 교육, 예술, 노인과 장애인 돌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기독교 단체들의 역할도 언급했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복음주의 교회들이 전체 인도주의 지원의 약 70%를 담당했고, 성 착취 생존자 지원과 종교적 소수자의 권리 보호 등도 지속적으로 수행해 왔다”며 “이러한 사역은 EU 정책 담당자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고 문화 통계에도 잡히지 않지만, 유럽 사회에서 가장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사회·문화적 투자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했다.

베셀스는 “EU는 복지와 사회 통합, 소외계층 지원을 강조하지만, 그 일의 상당 부분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에 동기를 둔 교회와 기독교 단체들이 조용하고 성실하게 감당하고 있다”며 “교회는 이미 공적 문화 형성에 기여하고 있으며, 이제 필요한 것은 유럽의 제도권이 문화 형성이 브뤼셀의 선언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협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