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진짜 바리새인인가: 공감이 권력이 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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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셉 목사(기독교한국 대표, 평택사랑의교회 담임)
김요셉 목사

과거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통해 "의"라는 칼을 손에 쥐었다면, 오늘날의 정의 담론은 공감과 연대를 통해 의를 확보한다. 고통받는 자에게 공감한다는 사실 자체가 도덕적 정당성의 근거가 되고, 그것이 곧 타인을 판단할 수 있는 권위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 결과 신학적 맥락을 고려하려는 시도는 비현실적 교조주의로 낙인찍히고, 복합적 긴장을 유지하려는 해석은 차가운 율법주의로 비난받는다. 이것은 본질에 대한 논박이 아니라, 도덕적 우월감을 통한 배제라고 할 만하다.

이 구조는 현대 기독교 담론 안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 시대적 가치를 하나님의 계시보다 상위에 올려놓고 그 기준으로 성경을 재단하는 오류,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본래 다층적이고 긴장 속에 주어진 계시가 단순화되어 결국 심판의 대상이 되는 역전이 그것이다. 오늘날 인권과 사회 정의는 해석의 틀이 아니라, 성경을 재판하는 기준으로 기능하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 강조점의 이동이 아니라, 사실상 새로운 율법의 형성이라는 데 있다. 성경은 분명히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향한 공의를 요구한다. 그러나 오늘날 일부 담론은 이 공의를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맥락에서 분리해내고, 그것을 현대적 정치 감수성과 결합시켜 절대적 기준으로 격상시킨다. 그렇게 되면 "정의"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맺히는 열매가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직관에서 출발하는 규범이 된다.

이 새로운 규범을 손에 쥔 자들에게 있어서는, 성경 해석의 방향이 역전되어 버린다. 인간이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의감이 성경을 심문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결과 '언약적 이스라엘'이나 '구속사적 경륜'과 같이 현대적 감각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본문들은 부정의한 텍스트로 취급되거나 침묵 속에 밀려난다.

공감 자체는 선하다. 그러나 그것이 계시에 대한 불복종을 정당화하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미덕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우상이다. "지금 사람이 죽어가는데 신학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은, 실제로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복종을 유예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는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는 열심'의 전형이다(롬 10:2).

또한 타자의 고통은 논쟁을 종결시키는 무기로 사용된다. 약자의 고통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그 주장에 대한 신학적 검토 자체를 비윤리적 행위로 규정한다. 대화는 중단될 수 밖에 없고, 남는 것은 도덕적 압박뿐이다. "나는 고통받는 자의 편에 서 있으므로 옳다"는 확신은, 가장 종교적인 형태의 교만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직관과 자주 충돌한다. 로마서 9–11장이 보여주는 언약과 선택의 문제는 어떤 현대적 정의론으로도 매끄럽게 환원되지 않는다. 이 불편함을 견디지 못함으로 인해, 인간들은 하나님을 수정하려 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윤리적 기준 아래 재배치되고, 계시는 검열의 대상이 된다.

결국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재구성된 바벨탑이다. 인권과 사회 정의가 부정되어야 할 가치는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의에 대한 복종 위에 놓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독교적 덕목이 아니라 지배적 이념이 된다. 성경적 정의는 인간의 감정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데서 시작된다. 우리의 정의감이 하나님의 언약과 주권보다 앞서 있다면, 우리는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라는 이름의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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