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 18:33-38, 막 15:1-15, 눅 23:1-24)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을 앞두고 대제사장은 예수를 체포하여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끌고 가 로마 제국에 대한 반역죄로 고발하였다. 빌라도가 예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자, 예수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진리에 속한 나라”라고 답한다.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어떠한 죄도 찾지 못하였음을 확인하였다. 그럼에도 대제사장들과 군중은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자”이며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다”라고 압박한다. 결국 빌라도는 이 위협에 굴복하여 예수를 십자가형에 넘긴다.
로마 제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정교한 법체계를 갖춘 국가였으며, 현대법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부정의한 판결이 가능했을까? 민사법과 달리 로마의 형사재판은 오늘날의 헌법적 법치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cognitio extra ordinem(비상심리절차)라는 재판 방식은 정형화된 절차보다는 식민지를 관할하는 총독의 재량 판단에 크게 의존하는 구조였다. 판사와 행정관이 분리되지 않았고, 총독은 사형권을 포함한 강력한 권한을 보유하였다. 재판은 엄격한 증거법과 절차에 따라 진행되기보다는 상황 판단에 가까웠다.
또한 로마 시민권자와 비시민권자에 대한 법 적용도 달랐다. 실제로 로마 시민권자였던 사도 바울의 재판에서는 가이사(황제)에 대한 상소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그를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호송하였다(행 25:11-12). 총독의 한마디 말로 십자가 형을 확정한 예수의 재판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그렇다면 빌라도의 판결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로마 제국의 통치 목표는 Pax Romana(로마의 평화)였다. 이를 위협하는 국가반역죄(crimen maiestatis)는 가장 중대한 범죄로 간주되었으며 극형으로 다스려졌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은 실제 반역이 아니더라도 잠재적 정치 위협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법이 정치적으로 확장 적용될 수 있는 구조였다.
예수가 체포된 시점은 유월절로 인해 군중이 대거 모이고 종교적 긴장이 고조된 상황이었다.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를 인식했지만, 대제사장들이 선동하는 폭동의 가능성 역시 현실적인 위험이었다. 결국 그는 “무죄를 살리느니 한 사람을 희생하여 질서를 유지하자”는 정치적 판단을 내린다. 이 점에서 빌라도의 판결은 당시 로마법 체계 안에서는 불법이나 월권이라기보다, 오히려 합법적으로 가능한 결정이었다.
그렇다면 이 재판을 현대 형사법의 기준에서 보면 어떨까? 근대 자유민주주의 헌법 아래에서 형사법의 핵심 원칙은 흔히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을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말로 요약된다. 이는 죄형법정주의와 무죄추정의 원칙으로 구체화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현대 법체계는 수사와 기소를 분리하고, 독립된 법원이 재판을 담당하며, 증거조사·반대신문·변호권 보장이라는 적법절차를 마련하였다. 또한 상소 제도를 통해 판결의 오류를 시정할 기회를 제공한다. 요즘은 그것도 모자라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다시 심사하는 재판소원제도까지 도입하였다. 이처럼 현대 형사법은 구조적으로 “빌라도식 판결”을 방지하기 위해 설계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는 완전히 사라졌는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남는다. 여론은 판결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가? 정치는 수사와 기소 과정에 개입하지 않는가? 책임은 분산되어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가 아닌가? 특히 입법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될 경우, 법이라는 형식을 통해 삼권분립의 균형이 흔들릴 위험이 존재한다. 형사절차에 관여하는 수사기관이나 재판 담당자를 처벌 대상으로 삼는 법왜곡죄 도입은, 여론과 정치가 사법에 개입할 여지를 확대할 수 있다. 이는 사법부의 독립을 근본적으로 위협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예수의 무죄를 알면서도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다”라는 왜곡된 여론의 압박에 굴복했던 빌라도와 같은 상황이, 오늘날에도 불가능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선언한다. 왜 이 신앙고백은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간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놓아주려 했던 로마 총독 빌라도를 명시하는가(행 3:13)? 이 표현은 특정 개인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법과 권력이 진리를 외면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를 보여주는 신앙인의 선언이라고 할 것이다.
십자가는 분명히 법의 실패였다. 무죄한 사람이 처형되었고, 진리는 외면되었으며, 권력은 왜곡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사건을 다른 차원에서 해석한다. 인간의 판결은 예수를 처형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이루었다. 가이사의 법은 예수를 정죄했지만 하나님의 법은 그 죽음을 통해 인류를 속죄하였다.
모든 법은 “진리를 따를 것인가, 질서를 따를 것인가”라는 궁극적 질문에 직면한다. 빌라도는 질서를 선택했고, 예수는 진리를 증언했다. 그리고 역사는 말한다. 질서는 잠시 유지되었지만 진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십자가는 법이 존재함에도 정의가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주며, 동시에 진리는 어떠한 판결로도 사라지지 않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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