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본문
욥기 16장 17-22절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가장 깊은 신비와 마주하는 고난주간 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가장 처절한 고통의 자리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고난주간은 단순히 2천 년 전의 사건을 추억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는 우리 인생의 현장에 찾아오시는 주님을 대면하는 시간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욥기의 본문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어둡고도 찬란한 대목 중 하나입니다. 본문의 주인공 욥은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고독하고 처절한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열 명의 자녀는 한순간에 죽었고, 평생 일군 재산은 연기처럼 사라졌습니다. 육체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어야 하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욥을 정말 죽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밀어 넣은 것은 육체의 질병이나 재산의 상실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에 대해 세상이 내리는 ‘차가운 해석’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웠던 친구들은 위로자가 아니라 ‘검사’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인과응보라는 서슬 퍼런 칼날을 들고 욥의 찢겨진 심령을 난도질합니다.
사방이 막힌 절벽 끝에서 욥은 오늘 본문 17절에 이렇게 항변합니다.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이 문장은 단순한 자기 자랑이 아닙니다. 땅 위에는 이제 욥의 편이 아무도 없다는 절망의 확인입니다. 지상의 모든 법정은 그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바로 그 절대적인 암흑의 순간, 욥은 절망의 늪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합니다.
오늘 우리는 욥의 고난 속에 투영된 십자가의 은혜를 추적하며, 우리 인생의 가장 어두운 밤에 우리를 변호하시는 하늘의 중보자를 만나고자 합니다. 땅의 소리는 소란스러우나 하늘의 소리는 깊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의 억울함이 주님의 위로로 바뀌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본론
Ⅰ. 지상의 재판정 — 인과응보라는 무서운 흉기
먼저 우리는 욥을 정죄했던 세 친구의 논리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살펴봐야 합니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지혜자들이었지만, 고난당하는 형제 앞에서 ‘위로자’가 아닌 ‘기소 검사’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휘두른 논리는 ‘인과응보(因果應報)’였습니다. “원인이 있으니 결과가 있다”는 이 합리적인 논리가 고난당하는 자에게는 가장 무서운 흉기가 됩니다.
① 엘리바스: 경험론적 정죄 — “내가 보아하니...”
엘리바스는 세 친구 중 가장 연장자로서 자신의 신비한 체험과 인생의 오랜 경험을 근거로 욥을 압박합니다. 그의 논리는 단정적입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욥 4:7-8).
그는 고난을 곧 ‘죄의 열매’로 규정합니다. 엘리바스의 눈에 욥의 고통은 과거에 심은 악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익숙한 논리입니다. “무언가 잘못했으니 저런 일을 당했겠지”라는 시선입니다. 경험을 절대화한 정죄는 욥의 결백 가능성을 처음부터 차단해 버립니다. 하지만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경험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신비에 뿌리를 두어야 합니다.
② 빌닷: 전통론적 정죄 — “조상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빌닷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내려온 조상들의 가르침과 가문의 전통을 중시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욥의 자녀들이 죽은 비극마저 죄의 결과로 단정하는 잔인함을 보입니다.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욥 8:4).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이 논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인간의 좁은 인과율 속에 가두어 버린 결과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축복의 문구로 사용하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는 본래 빌닷이 욥을 정죄하며 내건 ‘조건부 회복’의 메시지였습니다. “회개하면 살려줄게, 아니면 넌 죄인이야.” 이것은 복음이 아니라 율법의 칼날입니다.
③ 소발: 교조적 정죄 — “너는 더 맞아야 한다”
소발은 가장 과격합니다. 그는 욥의 고통을 심지어 ‘은혜로운 감형’이라고 모욕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욥 11:5-6). “네가 지금 겪는 고통도 사실 네 죄에 비하면 가벼운 것이다. 하나님이 자비로우셔서 이 정도로 끝내주신 줄 알아라.” 이 말은 고난당하는 자의 입을 완전히 막아버리는 종교적 폭력입니다. 소발은 하나님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대신해 사형 선고를 내리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인간의 정의감 속에 가두어 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인과응보를 무너뜨리는 대속의 신비
성도 여러분, 이 인간적인 정죄의 논리는 오직 십자가 앞에서만 파쇄됩니다. 세상의 논리는 “죄가 있으니 고난당한다”고 말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데도 우리를 위해 가장 처절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인과응보의 논리가 깨지고 하나님의 대속적 사랑이 승리한 자리입니다.
친구들은 정죄의 입술로 욥을 무너뜨렸지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정죄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욥의 피는 결백을 호소했지만,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덮습니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4). 십자가는 세상의 모든 정죄를 무력화시키는 하나님의 최종 판결문입니다.
Ⅱ. 천상의 재판정 — 하늘에 계신 나의 증인 (19절)
지상의 모든 관계가 끊어지고 땅의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욥은 이제 눈을 들어 더 높은 곳, ‘천상의 재판정(Heavenly Court)’에 상소합니다. 본문 19절은 고난의 한복판에서 욥이 발견한 유일한 빛입니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여기서 욥은 두 가지 법정 용어를 사용하며 우리에게 소망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① 나의 진실을 보시는 ‘하늘의 목격자’(Witness)
땅의 친구들은 욥의 겉모습(문드러진 살점과 무너진 집안)만 보고 유죄를 증언했습니다. 그들은 욥의 과거를 알지 못했고, 그의 마음 중심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확신합니다. “나의 내면과 진실을 온전히 알고 계신 분, 내가 밤잠을 설치며 하나님을 향해 흘린 눈물을 목격하신 분이 저 높은 곳에 계신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삼상 16:7). 세상은 우리의 결과만을 보고 우리를 판단합니다. 실패하면 믿음이 없다 하고, 병들면 저주받았다 말합니다. 하지만 욥은 믿었습니다. 결코 위증하지 않으시는 진리의 증인이 하늘 보좌에 계심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억울함을 목격하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아무도 내 진실을 몰라준다고 느껴질 때, 하늘의 증인을 바라보십시오.
② 나를 대변하시는 ‘하늘의 변호인’(Advocate)
여기서 ‘중보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멜리츠’는 ‘통역관’ 혹은 ‘변호인’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 된 인간 사이에는 소통의 간극이 너무나 큽니다. 욥은 자신의 이 억울한 사정을 하나님의 언어로 번역하여 전달해 주고,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나를 대신해 싸워줄 법정 대리인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검사가 되어 우리의 죄를 목록화하여 우리를 기소합니다. “보십시오, 이 자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이 자는 형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보혈의 증거를 법정의 결정적 증거물로 제출하십니다. “아버지, 이 자녀의 죗값은 내가 이미 다 치렀습니다. 나의 피가 그 증거입니다!” 이 장엄한 무죄 선언이 지금도 하늘 어전에서 울려 퍼지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Ⅲ. 눈물의 신비 —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간구 (20-22절)
욥은 이제 사람에게 위로받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향해 눈물을 쏟아냅니다. 본문 20절은 말합니다.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세상은 고통받는 자의 눈물을 ‘나약함’이나 ‘패배’의 증거로 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눈물을 다르게 해석합니다.
① 하나님의 눈물병 (시편 56:8)
고대 이스라엘과 중동 지역에는 사람이 슬픈 일을 당했을 때 흘리는 눈물을 작은 유리병이나 도자기 병에 담아 보관하는 독특한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애통의 기록’이자, 그가 고통의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는지를 증명하는 ‘고난의 훈장’과도 같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나님은 여러분이 베갯잇을 적시며 흘린 그 눈물 한 방울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욥이 잿더미 위에서 흘린 눈물을 당신의 소중한 병에 보관하셨고,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흘린 핏방울 같은 눈물을 받으셨습니다. 여러분의 남모르는 눈물은 하늘나라의 가장 귀한 보석이 됩니다.
② 탄식을 기도로 바꾸시는 성령 (로마서 8:26-27)
때로 고난은 우리에게서 ‘언어’를 앗아갑니다. 너무 힘들면 기도가 나오지 않고 신음만 나옵니다. 하지만 놀라운 복음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가 내뱉는 그 짧은 신음과 비명을 가로채어 ‘가장 완벽한 기도의 문장’으로 바꾸신다는 점입니다.
나는 “죽겠습니다”라고 탄식하나, 내 안의 성령은 “주님, 이 영혼을 정금같이 빚어 주시옵소서”라고 하나님 뜻대로 간구하십니다. 욥이 바랐던 그 중보 사역이 지금 우리 안에서 성령을 통해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가 막혔을 때, 성령의 탄식이 여러분을 대신하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③ 금 향로에 담긴 향연 (계시록 8:3-4)
여러분의 기도가 능력이 있는 것은 우리 언어의 화려함 때문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8장은 성도의 기도가 천사의 손에 들린 금향로에 담겨 하나님 보좌 앞 금 제단에 향기로운 향이 되어 상달된다고 증언합니다. 고난 중에 드리는 눈물의 기도는 십자가라는 정화의 통로를 거쳐 아버지께로 향합니다. 지상의 소음은 사라지지만, 성도의 기도는 하늘의 영원한 향연이 됩니다.
Ⅳ. 영적 제련 — 고난의 용광로와 정금
성도 여러분, 욥은 오늘 본문 끝에서 자신이 ‘돌아오지 못할 길’(22절)로 가고 있음을 직감합니다. 죽음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문턱입니다. 그러나 욥의 이 절망적인 고백은 훗날 23장 10절의 위대한 신앙 고백으로 승화됩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① 불순물을 태우는 과정
고난은 우리를 무너뜨리는 형벌이 아니라, 우리 안의 불순물을 태우는 제련의 과정입니다. 우리 안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자기 의, 교만, 세상적인 욕심은 평온한 날에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뜨거운 고난의 용광로를 지날 때만 떨어져 나갑니다. 금이 뜨거운 불을 통과해야 순도가 높아지듯, 성도는 보혈의 은혜 안에서 고난을 통과하며 그리스도의 형상이라는 ‘정금’으로 빚어집니다.
우리가 겪는 억울함은 우리를 작게 만듭니다. 나를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억울함의 시간을 통해 우리 안에 ‘나’를 죽이고 ‘그리스도’를 채우십니다. 용광로의 뜨거움은 금을 파괴하기 위함이 아니라 순결하게 하기 위함임을 잊지 마십시오.
② 억울함이 사명이 되는 신비
억울함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주님의 성품이 남게 되는 것이 고난주간의 신비입니다. 욥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귀로만 듣다가 눈으로 보게’ 되었듯이, 우리 또한 삶의 시련을 통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더 선명하게 대면하게 됩니다. 고난을 통과한 자만이 진정한 위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그 아픔의 자국을 흉터가 아닌 ‘흔적(Stigma)’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내가 너의 아픔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권위는 고난을 통과한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여러분의 억울함은 누군가를 살리는 사명의 자산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실 뿐만 아니라, 그 상처를 통해 다른 이들을 고치시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V. 겟세마네의 눈물과 십자가의 변호
오늘 본문의 욥을 보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됩니다. 욥이 겪은 ‘고립’과 ‘오해’의 절정은 바로 우리 주님의 십자가였습니다.
① 홀로 되신 중보자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철저히 홀로 되셨습니다. 제자들은 잠들었고, 무리는 침을 뱉었으며, 가장 사랑하던 제자는 부인했습니다. 심지어 하늘조차 침묵하는 것 같은 단절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욥이 갈구했던 바로 그 눈물의 기도를 직접 실천하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은 주님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다”고 기록합니다.
② 우리의 변호인이 되신 예수님
욥은 희미한 그림자로 보았던 그 중보자를, 우리는 오늘 십자가의 복음 안에서 명확히 대면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단순히 우리 옆에서 슬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지상의 법정에서 비난받는 우리를 대신하여, 하늘의 법정에서 “내가 이 사람을 위해 대신 죽었노라”고 당당히 변론하시는 승리한 변호인이십니다. 고난주간은 이 장엄한 변호의 은혜를 확증하는 시간입니다.
세상은 여러분에게 조건을 요구합니다. “네가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 복을 받아야 한다.” 혹은 “네가 잘못했으니 이런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중보자는 조건을 무너뜨리십니다. “네가 어떤 상태이든, 내가 너를 위해 피 흘렸으므로 너는 나의 것이다.” 이 무조건적인 수용과 변호가 욥이 그토록 바랐던 하늘의 소망이었습니다.
결론
정금같이 나오게 하실 주님을 바라보라
말씀을 맺겠습니다. 욥이 죽음의 문턱에서 그토록 찾았던 ‘하늘의 증인’과 ‘중보자’는 바로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첫째, 세상의 정죄에 귀를 닫으십시오. 엘리바스의 경험론, 빌닷의 전통론, 소발의 교조주의는 십자가 앞에서 이미 파기된 낡은 법전입니다. 여러분의 고난은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초청입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향해 손가락질할 때,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둘째, 하늘의 재판정을 바라보십시오. 땅의 법정에서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고 느껴질 때, 욥처럼 고개를 드십시오. 우리의 진실을 아시는 증인이 하늘에 계십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하신 주님께서 지금도 “내가 너의 아픔을 안다, 내가 너의 눈물을 보았다”라고 우리를 변호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눈물의 병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여러분의 탄식은 성령의 손에서 가장 위대한 기도가 되고 있습니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그 중보자의 손을 붙잡으십시오. 욥이 두려워했던 “돌아오지 못할 길(죽음)”을 주님은 친히 먼저 걸어가심으로 ‘생명의 길’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주간은 우리를 향한 사탄의 모든 기소를 무력화시키는 주간입니다. 욥이 희미한 그림자로 보았던 그 중보자를, 우리는 오늘 십자가의 복음 안에서 명확히 대면하고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 욥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십시오. 사람에게 위로를 구하기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연약함을 쏟아놓읍시다.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당신의 병에 담으시고, 우리의 탄식을 찬양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하늘의 증인이신 예수께서 여러분을 마침내 정금같이 나오게 하실 그날을 기대하며, 고난의 한복판에서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무리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욥의 처절한 탄식 속에 담긴 우리의 고독과 아픔을 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과 사람들의 비정한 정죄 속에서 신음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의 법정은 우리를 정죄하나, 하늘의 법정에는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을 믿습니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 한 방울을 당신의 병에 소중히 담으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사랑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기도가 막히고 언어가 끊어질 때, 우리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합니다. 이번 고난주간을 통해 우리의 불순물이 다 태워지게 하시고, 오직 그리스도의 형상이라는 정금으로 빚어지는 역사가 있게 하옵소서. 죽음의 길을 생명의 길로 바꾸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