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서해상에서 발생한 해양수산부 공무원 피살 사건과 관련해, 이른바 ‘서해 공무원 피살 은폐 의혹’으로 기소됐던 문재인 정부 안보라인 핵심 인사들이 1심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사건 발생 이후 약 3년 만에 나온 사법적 판단으로, 법원은 검찰이 제기한 은폐와 허위 보고, 자진 월북 몰이 혐의에 대해 공소 사실을 인정할 만한 충분한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는 26일 서훈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 서욱 전 국방부 장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함께 기소된 김홍희 전 해양경찰청장과 노은채 전 국가정보원장 비서실장도 모두 무죄 판단을 받았다. 이들은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직후 피해자인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대준 씨가 북한군의 총격으로 사망하고 시신이 소각된 사실을 은폐하려 했으며, 이 씨를 ‘자진 월북’한 인물로 몰아갔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법원 “공소 사실 인정할 증거 부족”…대규모 삭제 의혹도 불인정
재판부는 판결에서 “공소 사실을 인정할 충분한 증거가 부족하다”고 밝혔다. 검찰은 문재인 정부 안보라인 관계자들이 사건 당시 국방부와 국가정보원 내부의 첩보 및 보고서 5000여 건을 삭제해 피살 사실을 조직적으로 은폐했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대준 씨 사건과 관련된 논의와 지시, 후속 조치, 수사 과정이 모두 정식 보고 체계와 절차에 따라 이뤄졌으며, 상당 부분이 문서로 기록돼 남아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방부와 국정원의 첩보 자료는 애초부터 제한적으로 전파됐어야 했으나, 그러한 조치 없이 공유됐다가 뒤늦게 문제를 인식하고 삭제된 정황으로 볼 여지가 크다고 설명했다. 이를 은폐 목적의 조직적 삭제로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취지였다.
◈대통령 지시와 대응 과정… “은폐 의도 단정하기 어렵다”
재판부는 사건 당시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 내용도 주요 판단 근거로 제시했다. 재판부는 이대준 씨의 피격 및 시신 소각 사실을 보고받은 당시 대통령이 “사실을 확인해 있는 그대로 국민에게 알리라”는 취지로 명확한 지시를 내렸다고 봤다. 이에 따라 피고인들의 후속 조치가 이뤄진 점을 고려할 때, 이들이 국정 최고 책임자의 지시를 어겼다는 검찰의 주장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문재인 정부 안보라인이 피살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기다가 언론 보도 이후에야 뒤늦게 시인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북한 측의 공식 확인이나 군의 명확한 보고가 나오기 이전에 섣불리 언론 발표를 하는 것은 적절한 대응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당시 상황을 곧바로 은폐로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월북 판단 과정에 대한 법원의 시각
재판부는 이번 판결이 이대준 씨의 실제 월북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으면서도, 피고인들이 특정 결론을 미리 정해두고 사건을 몰아갔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월북 가능성에 대한 수사는 사건의 성격상 불가피했으며, 서 전 실장 등이 ‘자진 월북’이라는 방향을 설정해 지시하거나 수사에 개입했다고 볼 만한 정황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특정 결론이나 방향을 정해 놓고 회의나 수사를 진행한 흔적이 없다고 판단했다. 서 전 실장이 당시 국가안보실 지휘 라인에 수사에 관여하지 말라는 취지의 지시를 했다는 점도 고려 요소로 언급됐다.
또한 제한된 시간과 정보 속에서 당국이 월북 가능성을 판단한 과정에 대해, 사후적 관점에서 합리성과 상당성이 결여됐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월북 판단의 근거로 제시된 여러 정황은 군의 첩보와 해경 수사 결과를 통해 확인된 것으로, 이를 허위로 보기 어렵다는 점도 판결에 반영됐다.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해 월북으로 몰아갔다는 검찰의 주장에 대해서는 추상적이고 막연한 동기에 불과하다고 선을 그었다.
◈구조 조치 미흡에 대한 지적… 형사 책임과는 별개 판단
다만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형사적 책임과는 별도로, 사건 초기 대응 과정에서의 한계도 분명히 지적했다. 재판부는 이대준 씨의 실종 첩보를 확인한 이후에도 당국이 적극적인 구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그 사이 이 씨가 북한군에 의해 피격·소각된 점은 분명한 문제로 봤다.
재판부는 당시 당국이 이 씨가 구조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나, 몇 시간 뒤 피격과 시신 소각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사후적 관점에서 보면 지나치게 안이한 판단이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무죄 판결 이후 유족 측 반발… 항소심 쟁점 부각
고 이대준 씨의 유족은 판결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이대준 씨의 친형 이래진 씨는 이번 판결이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는 데 실패한 책임을 오히려 정당화한 판단이라고 주장하며, 판결을 납득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유족 측 변호인 역시 이번 무죄 선고가 합리성과 사회적 타당성을 현저히 결여한 판결이라며, 신속한 항소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을 둘러싼 법적 공방은 항소심을 통해 다시 이어질 가능성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