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외교부·통일부 등 부처 업무보고에서 “북한 노동신문을 국민에게 못 보게 막는 이유가 뭐냐. 국민이 선전전에 넘어가서 빨갱이 될까 봐 그런 것이냐?”라고 말하며 북한 정보 개방의 필요성을 언급한 걸 놓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시대 변화에 따른 제도적 점검 차원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북한을 상대로 체제전쟁 중이란 현실을 망각한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지난 19일 “북한 자료를 개방하고 아무나 접근할 수 있게 해주자”라며 “지금도 이거 보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하냐?”라고 반문했다. 또 “옛날에는 이런 것만 가지고 있어도 처벌받았지만, 지금은 공개하자고 하면 대한민국을 빨갱이 세상 만들자는 것이냐며 정치적 공격이 나올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어 “규정도 중요하지만, 국민적 시각에서 쉽게 판단해 보자”라며 북한 관련 정보 접근의 제한을 푸는 문제의 재검토를 거듭 주문했다.
이 대통령의 북한 자료 개방 관련 언급은 우리 국민이 북한의 선전에 넘어갈 정도로 미숙하지 않다는 것이 전제로 깔려있다. “북한 실상을 직접 보고 나면 오히려 ‘저러면 안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을 보아 짐작할 수 있다. 또 “언론은 볼 수 있고 국민은 못 보게 하는 건 국민을 판단력 없는 존재로 여기는 것 아닌가”라고 지적에서 보듯 북한 자료 열람에 대한 이중 잣대에 비판적 시각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대통령은 이 문제와 관련해 “국민을 주체적 존재”라고 칭하며 “선전·선동에 쉽게 넘어갈 존재가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국민을 주체적 존재로 인식하는 것과 선전·선동에 쉽게 넘어갈 존재가 아니라고 보는 관점은 동일 선상에 있으나 엄연히 다른 문제다. 대통령의 국민 인식이 틀린 말이 아니지만 아무리 주체적 존재라도 속아 넘어가게 만드는 게 북한이란 사실까지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노동신문 개방 문제는 진보 정부뿐 아니라 보수 정부에서도 국정과제로 설정돼 추진됐던 사안이다. 하지만 실제 추진 과정에서 이견과 우려가 제기돼 흐지부지됐다. 이재명 정부가 들어선 후 통일부 등 관계부처에서 이 문제를 본격적인 국정과제로 설정하고 추진해 왔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이 문제는 그냥 풀면 되는 일”이라며 “너무 엄숙하게 접근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통일부 관계자가 “국정원과 법무부가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자, “국정원은 봐도 안 넘어가는데, 국민은 이걸 보면 바로 종북주의자가 될까 걱정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며 “국민의 의식 수준을 너무 낮게 본다. 원칙에 따라 접근하고, 정보 개방을 통해 국민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했다.
통일부가 국정과제로 추진 중인 사안에 대해 대통령이 “그냥 풀면 된다”라고 한 건 질질 끈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일 거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사회 전반의 파장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안보와 관련한 사안에 대해 대통령의 지나치게 단순 화법은 논란과 파문을 낳기 십상이다.
예를 들어 “국정원은 봐도 안 넘어가는데 국민은 넘어갈까 봐 막는다”는 식의 대비가 그렇다. 이런 논리는 문제에 대한 논점을 흐리게 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국정원은 이런 북한의 선전 선동물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대응하는 국가 조직이다. 일반 국민과는 역할과 위치가 완전히 다르다. 이걸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는 식으로 비교하는 건 자칫 북한에 대한 무장해제로 연결될 수 있어 위험하다.
이 대통령의 지적으로 북한 관련 정보 접근 정책에 대한 제도적 논의가 본격화되는 건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신호로 여겨질 수 있다. 시대 변화에 맞춰 제도를 점검하는 차원에서 논의 자체를 금기로 여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출발점이 ‘국민 의식 수준’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어선 곤란하다. 안보 문제는 그렇게 단순화해 풀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여권에선 노동신문뿐 조선중앙TV 같은 현재 일반인 접근이 제한된 체제선전용 관영매체까지 일반에 공개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한다. 이 정부가 줄곧 추진하고 있는 대북 유화책의 일환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국민의 의식 수준을 신뢰하느냐 마느냐의 차원이 아닐 것이다. 모든 걸 국민의 판단 능력에 맞추게 되면 안보 정책의 기본 원칙이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게 더 큰 문제라고 본다.‘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이 있다. 요즘 세상에 북한 노동신문 등 선전 매체에 영향을 받을 사람이 있겠냐고 하겠지만 반복적으로 노출될 경우, 나도 모르게 서서히 물들게 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 북한의 선전 선동에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사람들의 인식에 마약이 침투하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도무지 이해 안 되는 게 있다. 북한 매체를 모두 개방하자면서 왜 국가정보원이 50년 동안 운영해오던 대북방송은 중단했나 하는 점이다. 대북방송은 남한 체제를 선전하는 목적이 아니라 북한 주민들에게 유익한 생활 정보를 알려주는, 그야말로 인도주의에 입각한 방송이었다. 이걸 중단한 건 북한 주민이 숨 쉴 거의 유일한 외부 통로를 끊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대통령은 비전향 장기수 북한 송환 문제도 다시 언급했다. 이들을 직접 북한으로 보낼 방법이 없으면 중국을 경유해 북한으로 보낼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러면서 북한에 억류된 김정국 선교사 등 우리 국민 억류자에 대해선 한마디로 없었다. 정부와 여당이 북한과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건 만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국민적 지지를 얻으려면 이런 식의 일방통행은 곤란하다. 역대 정부의 일방적인 퍼주기 식 북한 접근 방식이 왜 모두 실패했는지 반면교사로 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