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역사의 진실 앞에 다가가는 노력

오피니언·칼럼
사설

이재명 대통령이 제주 4·3 사건 초기에 공비 토벌을 지휘했던 박진경 대령에 대한 국가유공자 지정 취소를 검토하라고 지시하면서 이념 역사 논쟁이 다시 발발할 조짐이 일고 있다. 이 대통령이 박 대령의 유공자 지정 취소 검토 지시는 진보 진영과 제주 4·3단체 등의 잇따른 비판 목소리를 반영한 조치로 풀이된다.

박진경 대령은 제주에서 4.3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만인 1948년 5월 9연대장으로 현지에 부임해 공비 토벌을 지휘하다 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부하에 의해 피살된 인물이다. 지난 9월 개봉한 영화 ‘건국전쟁2’에서 새롭게 조명해 주목을 받았으며, 최근 국가보훈부로부터 국가유공자로 지정했다.

그러나 진보 진영에선 박 대령을 4.3 양민 학살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있다. 그런 인물을 국가가 유공자로 지정한 걸 인정할 수 없다는 거다. 이 대통령의 검토 지시 또한 이런 주장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목소리가 커도 국가가 내린 결정을 번복할 땐 신중한 판단과 함께 충분한 근거와 사유가 뒷받침돼야 한다.

제주 4·3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으로 사건으로 기록돼 있다. 이 사건에 대해 보수·진보 진영의 각기 다른 해석은 불행했던 과거가 아직도 이념의 굴레에서 채 벗어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보수 진영은 제주 4.3사건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남로당이 일으킨 무장 폭동이라는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박 대령 또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려다 공산당에 희생된 숨은 영웅으로 보고 있다.

지난 9월 개봉한 영화 ‘건국전쟁2’가 주목을 받은 것도 박 대령이란 인물에 대해 가려진 역사의 진실에 한 걸음 다가갔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1948년 제주 4·3 사건이 남로당이 5·10 선거와 대한민국 수립을 방해하려는 목적으로 일으킨 무장 폭동이 발단임을 설명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된 폭동을 진압하다 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부하의 총탄에 희생된, 인물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진보 진영은 박 대령이 4.3 사건에서 벌어진 양민 학살의 주범이란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제주 4·3 범국민위원회 등이 지난 9월 개봉한 영화 ‘건국전쟁2’에서 박 대령을 영웅으로 묘사하자 4.3 희생자를 두 번 죽인 행위라며 반발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제주 4.3사건과 관련한 박 대령의 행적은 학계에서조차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다. 박 대령이 4·3사건이 발발한 초기에 부임해 한달여 만에 피살됐고, 그가 피살된 뒤인 10월 이후에 많은 양민 희생자가 나왔다는 점에서 박 대령을 양민 학살의 주범으로 보는 건 무리한 해석이란 게 통념이다.

‘4·3 보고서’에 실려 있는 남로당의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는 박 대령 부임 나흘 뒤인 5월 10일 ‘대내 반동의 거두 박진경 연대장 이하 반동 장교들을 숙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씌어있다. 남로당 세력이 박 대령 부임 직후부터 테러를 획책했고 그후 남로당 세포인 문상길 중위의 지휘로 박진경 대령이 암살당한 점으로 보아 남로당이 4.3 배후에 얼마나 깊숙이 개입했는지 알 수 있다.

반면에 박 대령에 대해선 “민간인 탄압에 관여한 적이 없다”는 증언이 나왔다. 당시 소대장이던 채명신 전 주베트남 한국군사령관도 “박 대령은 양민을 학살한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구출하려고 했다. 폭도들에 대한 토벌보다는 입산한 주민들의 하산에 작전의 중심을 뒀다”라고 증언한 바 있다. 이런 증언들은 노무현 정부 때 나온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도 실려 있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박 대령이 공산당 토벌을 목적으로 제주에 부임해 남로당 지령에 의해 암살당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남로당 공비를 토벌하다 희생된 그에게 국가가 1950년에 무공훈장을 추서했고, 그걸 근거로 보훈부가 국가유공자 등록을 승인했으니 법적으로나 절차적으로 문제 될 게 없다.

그럼에도 진보 진영과 4.3단체 등에서 다른 목소리가 나오자 대통령이 재검토를 지시했다. 이건 국가의 결정을 번복하는 데 따른 논란과 함께 4.3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는 그간의 노력마저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

대통령의 검토 지시가 곧 유공자 자격을 취소하라는 명령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지시를 받은 관계 부처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게 문제다. 대통령의 지시가 있자마자 국방부가 박 대령의 을지무공훈장 서훈에 대한 취소 절차에 착수하고, 이어 보훈부가 국가 유공자 지정 재검토에 나선 걸 보면 알 수 있다.

진보 진영과 일부 단체 회원들 사이에선 박 대령을 암살한 행위가 정당했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다가 박 대령을 암살한 남로당 쁘락치가 국가유공자로 둔갑하는 일이 실제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일방적인 주장에 의해 국가의 결정이 번복된다면 역사적 진실마저 진영논리에 따라 엎치락뒤치락하는 매우 나쁜 선례로 남게 될 것이다.

4.3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아직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지금은 고증과 검증으로 진실에 다가갈 때지 국가가 섣부른 판단으로 단죄할 때가 아니다. 4·3 희생자가 국가 폭력의 희생자라면 당시 국가의 명령으로 진압에 동원되었던 군인·경찰들 또한 혼란한 시대가 만들어낸 피해자가 아닌가. 우리가 할 일은 이념의 편 가르기가 아니라 역사의 진실에 다가가는 부단한 노력이다. 불행했던 역사에 대한 기울어진 인식으로 역사의 불행을 되풀이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