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10월에도 금리 인하 카드를 꺼내지 않았다.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여파와 국내 건설 경기 부진 등 경기 둔화 요인이 누적되고 있지만, 고환율과 부동산 시장 불안이 지속되면서 통화정책 완화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는 23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관에서 통화정책방향 회의를 열고 기준금리를 현행 2.50%로 동결했다. 올해 들어 세 번째 연속 동결로, 이에 따라 한·미 금리차는 1.75%포인트로 유지됐다. 한은은 지난해 10월과 11월 연속으로 금리를 인하한 데 이어, 올해 2월과 5월에도 추가 인하를 단행한 바 있다.
경기 상황만 놓고 보면 금리 인하 필요성은 적지 않다. 특히 건설 경기 부진이 장기화되고,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이 아직 타결되지 않아 수출 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상반기에는 밀어내기식 수출로 일부 버텼지만, 하반기 들어서는 관세 영향이 본격화되면서 성장세가 둔화되는 모습이다. 주요 교역국인 미국과 중국 간 무역 갈등 역시 완전히 해소되지 않아 경제 전반의 모멘텀이 위축된 상황이다.
그럼에도 금리 인하를 단행하지 못한 이유는 여전히 불안한 부동산 시장 때문이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10월 둘째 주(13일 기준) 서울 아파트 매매가격은 9월 다섯째 주 이후 2주간 0.54% 상승했다. 전국 아파트 매매가격 역시 전주 0.06%에서 0.14%로 상승폭이 확대됐다. 정부가 잇따라 부동산 규제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시장 과열세가 완전히 꺾였다고 보기에는 이르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는 최근 대출 규제를 중심으로 한 6·27 대책, 주택 공급 확충을 담은 9·7 대책에 이어 이달 15일에는 서울 전역과 경기 12개 지역을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하며 전세 대출과 실거주 의무를 강화하는 추가 부동산 대책을 발표했다. 한국은행으로서는 정부의 부동산 안정 정책과 보조를 맞추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고환율 역시 금리 인하를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미 통상 협상 과정에서 미국이 요구한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가 논의되는 가운데, 원·달러 환율은 최근 1430원대를 오르내리고 있다. 향후 한·미 통화스와프 협상 등과 맞물리며 환율 변동성이 커질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 상황에서 금리를 인하할 경우 한·미 금리 역전폭이 확대돼 원화 약세가 심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일부에서는 소비 쿠폰 지급과 추가경정예산 집행 등 정부의 재정정책 효과, 반도체 수출 회복세 등으로 경기 하방 압력이 완화된 점을 들어, 한은이 금리 인하를 서두를 이유가 줄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기준금리가 중립금리에 근접한 만큼, 향후 경기 상황을 좀 더 지켜볼 여지가 크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향후 금리 인하의 시점을 부동산 안정세와 환율 흐름, 그리고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정책 불확실성 해소 시점에 달려 있다고 전망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부동산 불안과 미국의 통화정책, 한·미 통상 협상 등 불확실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이번 달은 동결로 가닥을 잡은 것”이라며 “부동산과 환율이 안정되고 미국의 금리 정책이 명확해지면 11월 인하 가능성이 열리지만, 그렇지 않으면 내년으로 시기가 미뤄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