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범죄조직이 한국인을 표적으로 삼아 동남아로 납치하는 범죄가 연이어 벌어지고 있다. 캄보디아 등지에서 이미 수백 명의 피해자가 나오는 등 심각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현지 대사관의 태만과 정부의 늑장 대응이 사태를 키웠다는 비판이 나온다.
며칠 전 KBS가 충격적인 영상을 방영했다. 국제범죄조직에 납치된 20대 한국인 대학생에게 중국 국적의 범죄조직원이 강제로 마약을 투약하는 장면이다. 이 대학생은 지난 7월 캄보디아에서 은행 통장을 팔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브로커의 꼬임에 속아 캄보디아게 갔다가 조직원에 의해 납치 감금된 후 지난 8월 범죄조직 아지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자영업을 하던 한 40대 남성은 지난 6월 이체 한도가 큰 법인 통장을 빌려주면 수수료를 주겠다는 제안에 속아 캄보디아에 갔다가 범죄조직원에게 납치됐다. 여권과 휴대전화를 빼앗긴 후 몰래 숨긴 또 다른 휴대전화로 현지 대사관에 구조 요청을 했으나 “현지 경찰에 직접 전화로 신고하라”는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결국, 이 남성은 목숨을 걸고 건물 6층 발코니에서 뛰어내리는 탈출을 감행했다. 겨우 탈출에 성공해 이른 아침 직접 대사관을 찾아갔는데 대사관 직원이 “근무시간에 다시 오라”고 돌려보냈다는 거다. 감금상태에서 도움을 청했을 때도 무성의하게 대응하더니 범죄 소굴에서 목숨 걸고 탈출해 제 발로 찾아온 국민을 어떻게 이런 식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지 황당할 뿐이다.
이런 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최근 캄보디아 등 동남아 일부 국가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국제 범죄조직의 납치 감금 고문 마약 투약 살해 등 끔찍한 만행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다. ‘보이스피싱’ ‘로맨스스캠’ ‘리딩방 사기’ 등 갖가지 범죄들의 공통점은 모두 한국인이 대상이란 점이다.
동남아 일대에서 이런 범죄를 저지르는 국제범죄조직 대부분이 중국인들에 의해 운영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중국인들이 조선족과 현지인을 고용해 단기간에 고수익을 미끼로 한국인을 유인한 후 현지에서 납치와 감금 고문하고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게 하거나 다른 곳에 팔아넘기는 인신매매가 성행하고 있는 거다.
현지 경찰의 드러난 국제범죄조직과의 유착 관계는 충격적이다. 범죄조직에 납치됐다가 겨우 풀려나 경찰에 인도된 피해자를 공권력이 나서 범죄조직과 합의를 하도록 종용하거나 다시 다른 조직에 넘긴 기막힌 사례가 이를 말해준다.
특히 캄보디아의 경우 공권력의 부패로 인해 범죄조직에 감금됐다가 풀려난 한국인들이 대한민국으로 송환되지 못하고 다시 다른 범죄조직에 넘겨지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어 충격을 주고 있다. 지난 5월 한 범죄 단지에서 적발된 한국인 15명을 현지 당국이 전원 한국으로 송환할 방침이라고 밝혔지만 불과 2주 후에 이들 모두를 다른 범죄조직에 넘긴 사실이 드러났다.
심각한 건 이렇듯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나날이 폭증하고 있는데도 정부 당국의 대응이 미온적이라 할 만큼 조용하다. 지난 2022년 한 건에 불과했던 캄보디아 취업 사기 및 감금 신고 건수는 그 이듬해인 2023년 17건으로, 다시 2024년엔 220건으로 급증했다. 올해는 상반기에만 무려 252건의 신고가 접수될 정도다. 캄보디아 범죄조직에 감금돼 각종 범죄에 동원되다 현지 당국에 체포된 한국인 숫자도 최근 3년간 50배 가까이 증가했다.
그런데도 우리 외교당국은 범죄 피해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는커녕 피해 신고조차 무성의하게 대응하는 등 아예 손을 놓은 모습이다. 해외에 있는 한국인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현지 대사관이 이들을 돕기는커녕 내 알 바 아니라는 식으로 대응한 것이 결국 이런 범죄를 키운 꼴이 된 것이다.
20대 대학생에게 마약을 강제 투약하고 결국 살해한 사건이 벌어진 캄보디아의 경우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현지 대사가 이임 지시를 받고 귀국한 상태에서 현재까지 석 달 동안 후임 대사가 공석인 상태다. 이런 상태에서 국민이 피해 구제를 요청해도 남의 일로 여기는 무관심과 업무 태만이 만연해 있는 거다.
정치권은 어떤가. 지금 거대 여당은 지난 정부를 대상으로 한 갖가지 특검과 연일 사법부를 압박하는 데만 몰두해 있다. 해외에서 수많은 국민이 납치 감금 고문당하고, 심지어 사망한 20대 한국인 대학생의 시신이 2개월째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데도 그 흔한 논평 한 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온통 다른 데 정신이 팔려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 6월 취임선서에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위협받지 않는 안전사회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얼마 전 ‘세계한인의 날’ 기념식에선 ‘해외에 계신 우리 국민과 동포 모두의 권익과 안전을 지키는 일에 더 힘을 쏟겠다’라고 강조했다. 건설 현장에서 단 한 명의 사망사고가 나도 엄단을 지시하던 이 대통령이 해외에서 수많은 국민이 죽거나 감금된 채 고문당하고 인신매매까지 당하는데도 여태껏 잠잠했다는 게 이성적으로 도무지 납득이 안 된다.
이 대통령은 지난 11일에야 캄보디아 범죄 관련 보고를 받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외교적으로 총력을 기울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어 외교부가 캄보디아 정부의 다양한 협조를 요청하기로 보도가 나왔다. 하지만 사태가 이 지경이 된 뒤 처음으로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는 점에서 늑장 뒷북대응이란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이다. 그런데 스스로 ‘국민주권정부’로 명명한 이재명 정부의 외교부는 도움을 청하는 우리 국민을 외면하고 책임을 떠넘겼다. 여당도 각종 특검과 사법부 때리기에 몰두해 국민의 생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러고도 ‘국민주권’ 정부란 말을 할 자격이 있나. 13일부터 시작된 국정 감사에서 반드시 책임을 물어 다시는 국민이 억울하게 희생되는 일을 막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