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트(Hunt)와 보스(V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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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구 박사(전 총신대·대신대 총장)

정성구 박사 ©기독일보 DB
지난 8월 15일 광복절 기념행사 때 김형석 관장의 경축사가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여당의 한 인사는 “1919년 건국을 부정하면 역사 내란이다!”라고 윽박질렀다. 그러면서 여당은 김 관장을 향한 ‘친일몰이’를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를 보는 시각도 세계관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를 가지고 친일몰이를 하는 것은 우습다. 필자는 몇 주일 전에 B·29와 데오도르 하드(Theodore Hard) 이야기를 쓴 바 있다. 하드는 B·29 조종사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해 일본이 항복하고 연합국의 승리 곧 미국의 승리로 우리는 광복 곧 해방을 맞이했다. 그 원폭 투하의 조종사가 미국 정통 장로교회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30여 년간, 고신대학에서 사역했었다는 내용을 썼다.

이번에는 같은 미국 정통 장로교회 선교사였던 부르스 헌트(Bruce Finley Hunt)의 스토리를 말해 보고 싶다. 그의 한국명은 ‘한부선’이고, 한위렴(William Brewster Hunt, 1903~1992)의 아들로 평양에서 출생했다. 한부선은 평양 외국어 학교에서 공부했고, 일리노이주 휘튼대학(Wheaten College)에 재학했으며, 뉴저지주에 소재한 럿거스 대학교(Rutgers University)로 전학하여 졸업한 후, 1924년 9월 프린스턴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그는 1928년 북 장로교 선교사로 다시 한국에 왔다. 그는 방위량 선교사의 딸과 결혼하였고, 안식년에 다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그레샴 메이첸(Gresham Machen)의 노선을 따랐다. 그러나 메이첸 박사가 북 장로교회에서 제명되자, 그는 정통 장로교회 창립 맴버로 제1회 총회에 참여했다.

한부선이 다시 사역했을 때는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가 극에 달했고, 1938년 9월 제27회 장로회 총회는 일본 경찰의 압력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그날 한부선은 일제의 불의에 항의하다 사복 경찰에 의해 강제로 퇴장당했다. 그러나 한부선은 굴하지 않고 일제에 항의 성명을 발표한다. 이듬해 모인 봉천 노회에서 한부선은 ”지난 번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일본 경찰의 강압으로 된 것이니 무효다!”라고 외쳤다. 하지만 오히려 봉천 노회는 그가 맡고 있는 담임 목사직을 제명시켰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총회와 노회는 일제와 투쟁하고 나라를 살리고, 한국 교회를 살리려는 한부선을 무참히 짓밟았다. 그럼에도 한부선은 정통신학과 신앙을 가진 자로서 불굴의 의지로 불의와 맞섰다.

그 후, 한부선은 북만주 지역을 개혁 장로교 선교사 보스(G.J. Vos) 목사와 함께 순회하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렸다. 당시에 독립운동한다는 자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들 그리고 모든 조선인들도 일본 신사에 가서 절을 하고 굴복하던 시기였다. 한부선은 1940년 1월경, 그와 함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렸던 김원섭, 김신복, 박명순 등과 함께 하얼빈의 자기 집에 모여 토의하면서 내린 결론은, 보스 선교사가 주장한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의 모범을 따라 결사 항쟁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신사참배 반대는 성경의 가르침이요, 일제 침략을 용납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신앙고백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신앙고백에 찬동하는 사람들의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당시 만주에 있던 조선인 신앙인들 500여 명이 서명에 동참했다. 그들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일제에 항거하고 생명의 복음을 지키려 했다. 그 신앙고백의 내용을 보면 이렇다.

*1-3항. 천황을 신격화하는 일본의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비판한다.
*4-6항. 신사참배는 곧 우상숭배이다.
*7항. 신사참배에 굴복하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기에 단절한다.

한부선은 1941년 하얼빈 경찰서에 검속될 때까지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동조하는 사람이 800여 명에 이르렀고, 이 운동을 지지하는 공동체가 25개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부선과 뜻을 같이하던 사람들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이 사람들은 6년에서 12년의 선고를 받았다. 한부선은 1941년에 체포되어 중죄인으로 독방에 갇혀있다가, 단동에서 재판을 받았다. 1942년 여름 포로 교환 조건으로, 한부선은 미국으로 갔다가 1946년 정통 장로교회 선교사로 고려신학교(현 고신대) 교수가 된다.

그리고 일제의 신사참배 반대를 위한 한부선 선교사와의 뜻을 같이한, 미국 개혁 장로교회 선교사 보스(G.J. Vos) 목사이다. 보스는 옛날 프린스턴 신학교 성경 신학의 대가인 겔할더스 보스(Gerhardus Vos) 박사의 아들이었다. 이분의 가계가 스코틀랜드 언약도(Covenanter)의 후손들이다. 헌트와 보스, 이들의 위대한 정통신앙을 지키려던 만주 봉천의 투쟁은, 해방된 한국도 모르고 한국 교회도 모르고 있는 듯하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한부선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함께 노방 전도에 참석도 했었다. 1981년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한부선 목사님의 숙소를 방문했다. 그는 휠체어를 의지하고 있었는데, 내게 말하기를, “통일이 되면 나의 고향 한국을 꼭 가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몇 해 전 보스 목사의 아들 보스 내외의 초대로 비베폴의 제네바 대학 근방에서 식사를 함께했다.

대한민국은 광복운동을 한다면서 구(舊) 소련의 루블화를 꿀꺽꿀꺽 삼키면서, 반일 운동한 사람들을 영웅화 해서는 안 된다. 헌트와 보스처럼 일본의 종교 신사참배에 맞서 수많은 고초와 고난 당한 사람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헌트는 일제의 신사참배에 맞선 800명의 생명을 건 이들의 신앙고백을 ‘한국의 언약도’라고 불렀다.

#정성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