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목격했던 새마을 운동 지도자 반 수강생들은 자신들의 위치와 경력을 땅에 모두 내려놓고, 오직 조국 근대화에 대한 타는듯한 마음을 가졌다. 교회 부흥회 날 마지막 시간에 통회와 자복이 있고 새로운 확신과 소망을 갖듯이, 김준 원장의 새마을 운동 강의는 부흥사와 비슷했다. 그는 ‘예수’의 ‘예’자도 말하지 않았고, ‘기독교’의 ‘기’자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하나같이 ‘오직 조국 대한민국을 새롭게 하겠다!’는 각오와 결심으로 가슴이 뜨거워졌다. 우리 조의 CEO들, 장군들 모두가 지난날을 반성하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각오로 꽉 차 있었다. 박 대통령은 새마을 운동을 매일 점검하고 현장 지도를 하면서 가난에 찌든 우리 국민들을 일깨웠다.
박정희 대통령은 스스로 가난을 자청하면서 검소함을 몸소 실천했고, 독재자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국민을 계몽하는 데 앞장섰다. 그가 시해당했을 때, 담당 의사는 박정희 대통령인지 몰랐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찬 벨트가 너무나 낡아 있었기에 보통 평민인 줄 알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최근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가계부가 발견되어 모든 주부들은 숙연해 하고 있다. 육영수 여사가 얼마나 알뜰하고 규모 있고 절약해 살았는지가 그 가계부에 잘 나타나 있다. 8·15 기념식 때, 영부인이 문세광이라는 공산당의 흉탄에 저격당했을 때, 나라의 슬픔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국상’이었다. 하지만 당시 네덜란드에서 유학 중이었던 나는 네덜란드의 최고의 신문에 사진 설명을 보고 기겁을 했다. 그 신문에는 박 대통령께서 영구차에 실려 가는 육영수 여사와의 마지막 작별하는 모습의 사진이었는데 해설이 기가 막혔다. 그 해설문은 이러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박순천 여사의 마지막 가는 길을 전송했다.」 박순천 의원은 당시 야당 민주당 당수였는데, 당 대표 박순천 의원을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이다’라고 해설하고 있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신문’ ‘언론’를 믿지 않는다. 가짜뉴스, 엉터리 뉴스가 지금 우리나라에도 판을 치고 있다.
‘영일대’를 좀 더 말해야겠다. 박정희 대통령은 천재였다. 그냥 천재가 아니라 웅대한 비전을 가진 천재였다. 그는 자유대한민국이 세계에 우뚝 솟으려면 ‘철강 왕국’이 되어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워낙 자본이 없는 데다, 아무도 한국을 도와주려는 나라가 없었고, 돈을 빌려줄 나라도 없었다. 그때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의 철강왕’ 박태준을 불러 1970년 한낱 모래사장에 불과했던 영일만에 제철소를 건설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향해 ‘밥도 못 먹는 나라가 무슨 제철소냐!’라고 비웃었다. 하기야 당시 우리나라는 자본도, 기술도 없는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였다. 그러니 모두가 ‘철강은 불가능하다!’는 것에 결론짓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은 오늘의 ‘영일대’ 자리에 포항제철소(현 포스코) 숙소를 짓고, 세계 정상의 제철 기술자와 설계자를 모아 이곳에서 숙식하도록 했다. 국빈 방문 시에는 영빈관으로도 사용되었다. 이것이 ‘영일대’이다. 물론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여러 번 영일대에 유숙하면서 박태준 회장을 위로, 격려, 칭찬하면서 작전회의를 하고, 지휘하던 장소였다. 그래서 영일대는 천혜의 자연 경관과 아름다운 영일대 호수와 정원을 품고 있었다. 우리 내외는 아들과 며느리가 예약한 방이 마침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묵었던, 312호실에서 하룻밤을 지냈었다. 필자는 조국 근대화를 마침내 이루어 내신 박정희 대통령, 그리고 대통령의 명을 받들어 대업을 이룩한 박태준 회장을 기억하고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박태준 회장은 당대 최고의 가속기 물리학자인 김호길 박사의 청을 들어 포항공과대학교, 곧 포스텍(POSTECH)을 세워 세계 일류 대학으로 만들어 놓았다.
박태준 회장은 3선 국회의원도 하고 국무총리를 했었지만, 말년에 그는 모든 재산을 국가에 바치고, 전셋집에 살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 대통령에 그 회장이었다. 이 어수선한 시기에 ‘아름다운 빈손!’ 박정희 대통령과 ‘철강왕’ 박태준 회장이 떠오른다.
#정성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