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명에 동참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자세는?

데이비드 슈미트갈. ©linkedin.com/in/david-schmidgall

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데이비드 슈미트갈의 기고글인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사명에 동참할 때 망명자이자 반체제자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Christians need to adopt the posture of the exile and dissident when joining God's mission)를 최근 게재했다.

데이비드 슈미드갈은 Shaping Missional Culture의 전무이사, 목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문화적 변화에 대해 폭넓게 생각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며, 인류 번영의 환경을 조성하는 것만큼이나 깊이 들어가는 것에 열정을 가지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의 문화적 순간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는 '분열'이다. 그러나 더 깊이 들여다보면, '혼돈', '엉망진창', '혼란', '실망', '수치심', '우울', '혼란스러움' 같은 단어들이 따라온다. 긍정적인 단어, 예를 들면 '기회', '좋음'과 같은 단어로 응답한 사람은 겨우 20%에 불과했다.

이런 부정성 편향은 실제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의 생각 중 80%는 부정적이며, 뉴스도 그 흐름을 따른다. 부정적인 생각은 순식간에 벨크로처럼 달라붙지만, 긍정적인 생각은 전두엽에 뿌리내리기까지 10~15초가 걸린다.

하지만 이 모든 좌절의 이면에는 ‘거룩한 갈망’이 있다. 우리는 문화적 변곡점에 서 있으며, 많은 이들이 더 인간적이고, 더 넓고, 더 빛으로 가득한 무언가를 갈망하는 내적 전환을 경험하고 있다.

이 사실은 수치로도 드러난다. 퓨 리서치(Pew Research)는 3천만 명이 넘는 복음주의적 예수 추종자들이 오늘날 문화와 정치 속 기독교의 공적 모습에 더 이상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들 중 일부는 교회를 완전히 떠났고, 일부는 조용히 신앙을 유지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단절된 상태로 더 깊은 질문을 던지는 공동체를 찾고 있다.

한 도시 연구에 따르면, 미국에서 가장 기독교적인 도시로 분류되는 곳에서조차, 빈곤, 소득 불평등, 인종 분리, 의료 접근성 부족 등의 지표가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이것은 과연 어떤 복음이 이런 결과를 낳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사회 복음이냐 선포 복음이냐를 두고 벌이는 피로한 논쟁은 본질을 비껴간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그것이 양자택일이 아니라 ‘둘 다’임을 보여준다. 고대 세계는 오늘날처럼 그렇게 명확히 구분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전통적 문화도 여전히 그러하다. 모든 것이 ‘영적인 것’이었다.

더 깊은 의미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오늘날 일부 교회에서 제공하는 것들은 가려운 곳을 긁지 못하는 느낌을 준다. 어떤 이들은 냉소적이거나 비판적으로 대응하고 싶을 수도 있지만, 진실은 이렇다. 우리는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세워야 한다. 교회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신부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념적 이분법과 얇은 평화를 유지하려는 시도를 넘어서야 한다. 그것은 예언자적 힘을 상실하게 만든다.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이렇게 말했다: “복음은 널리 받아들여진 진리이지만, 너무 축소된 진리다. 그것은 평면화되고, 사소화되며, 무의미하게 되어버렸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이야기에서 변화의 능력, 회복의 영향력, 생명력은 빠져나가고 말라 비틀어진다.”

이처럼 축소된 복음은 오늘날의 문화적 순간 앞에서 교회를 무장해제시켰다. 그리고 서구의 기독교인들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존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서구 전역에서 사람들은 이웃, 도시, 직장, 세계 속에서 의미 있는 방식으로 참여하길 갈망한다. 하지만 많은 교회는 여전히 기존의 복음전도 및 선교 패러다임에 고착되어 있다. 선교사를 더 파송하고, 교회를 더 개척하고, ‘얇은 복음’을 수출하려 한다. 반면, 어떤 이들은 기독교가 끼친 해악에 압도되거나 방향을 잃은 채 마비되거나 무관심해진다.

우리는 또 다른 길이 있다고 믿는다. 스캐터(Scatter) 공동체는 그 ‘제3의 길’을 꿈꾼다. 예수의 복음은 훨씬 더 크고 넓은 부르심이다. 죄로부터의 해방, 경제적·육체적·사회적 번영이다. 나의 친구 커트 톰슨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여기에서 그리고 영원히 누리는 영원한 삶의 질이다.”

개혁(reform), 갱신(renewal), 부흥(revival), 르네상스(renaissance)의 외침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하지만 종종 이런 're' 단어들은 화장만 다시 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단어를 바꾸고, 전략을 조정하고, 브랜드를 리뉴얼하고, 사람들을 재동원하자는 식이다. 하지만 그 속은 그대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전략이 아니라 ‘존재 방식’의 대전환이다. 초대교회의 에클레시아(Ecclesia)는 오이코스(oikos), 즉 ‘가정 공동체’로서 하늘나라 삶을 실현하는 ‘경제 체제’를 실천했다. 그것은 나눔, 섬김, 수용을 통한 인간 번영의 새로운 방식이다. 즉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기도 그대로다.

NT 라이트는 초대교회를 “이 땅 위에서 하늘의 삶을 드러내는 쇼(the heaven on earth show)”라 불렀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하나님의 주된 활동이 교회 안에서 일어난다고 가정한다. 실제로는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도구로 삼아 세상을 회복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의 실천 방식, 존재 방식, 세상 속에서의 출현 방식을 다시 상상할 수 있는 ‘킹덤 인큐베이터’가 필요하다. 세상에서 우리의 참여를 축소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을 재구상해야 한다. 지금 세상은 이미 바뀌었고, 우리는 화장이 아닌 ‘수술’이 필요하다.

스캐터는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끈질긴 충성으로 얽힌 관계망’을 이루는 공동체를 추구한다. 예수의 길을 함께 실천하는 살아있는 네트워크, 즉 포용하고, 상상하고, 창조하는 창의적 소수자들이다. 이들은 망명자(exiles), 반체제자(dissidents), 경계에 선 자(edge dwellers), 도전가(risk takers), 세움의 사람(builders), 창조자(makers)로 구성된 공동체다. 그들은 진보냐 보수냐의 이념적 함정에서 벗어나 선지자적 상상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더 깊고 넓은 무언가를 갈망하며, 평안(shalom)에서 흘러나오는 상상력으로 세상의 번영을 꿈꾼다. 생텍쥐페리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배를 만들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나무를 가져오라거나 일을 나누라는 말을 하지 말라. 대신, 그들에게 끝없는 바다에 대한 갈망을 가르쳐라.”

이제 키디풀(유아용 수영장)을 떠나, 위험을 감수하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광활한 바다 속으로 달려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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