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90) 베드로가 부인하다

오피니언·칼럼
설교
요 18:15-27
이희우 목사

영국에는 네 종류의 신자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페이퍼 신자’(paper christian), 이런 신자는 해가 쨍쨍 쪼이면 터져서 못 나오고, 비가 오면 젖어서 못 나온단다. 둘째는 ‘시즌 신자’(season christian), 1년 중 절기 때, 즉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때만 교회에 나오는 신자다. 셋째는 ‘회색 신자’(between christian), 주일날은 크리스천이지만 평일은 불신자(Non-christian)과 똑같이 산다. 넷째는 ‘에브리데이 신자’(everyday christian), 에녹처럼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자다.

본문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회색 신자’(between christian)와 다를 바 없다. 그게 예수님을 부인한 원인이었다. 결국 어떻게 되나?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17절), 또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25절), 결국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27절),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만다. 베드로가 어쩌다가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되었을까?

문밖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문밖에 서 있었다(16절). 마태는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랐다고 했다(마26:58). ‘문밖에 서 있었다’는 요한의 표현과 ‘멀찍이 따라갔다’는 마태의 표현은 좀 달라보여도 의미는 다르지 않다. 그저 구경꾼 같았고, 계산적인 회색 신자(Between Christian)였던 것, 이게 바로 베드로의 실패의 원인이었다.

다른 제자들은 도망갔지만 도망가지 않고 멀찍이 따라가며 예수님을 지켜본 것은 그나마 잘한 일이지만 문밖에 있었고 멀찍이 따라갔다. 어정쩡했다는 뜻, 이게 예수님을 부인하는 심각한 영적 위기를 초래한 것이다. 18세기 독일 루터교회의 목사이자 성경학자였던 벵겔(Bengel)은 “예수를 멀찍이 좇아간 것은 용기와 공포의 중간”이라 했다. 예수님 곁으로 갈 수도 있는 거리지만 도망칠 수도 있는 지점, 거기에 베드로가 서 있었다. 관망하기 편리하고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에도 편리한 만큼의 거리 유지, 자기에게 유리할 때는 가까이 다가가지만 불리할 때는 숨을 수 있는 자리에 머물렀다는 것, 묻는다. “지금 어디에 서 있나?” “혹시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닌가?” 또 “몸은 앉았지만 마음은 서 있는 것은 아닌가?” 주님과 멀어지면 안 된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것도 안 된다. 거리두는 사람과 친해질 수 있나? 불가능 아닌가?

시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1:1)라고 했는데 베드로는 좀 비겁한 정도가 아니라 악인에 길에 서 있다. 그냥 문밖에 서 있기만 했나? 아니다. “그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18절), 베드로가 지금 왜 종과 아랫사람들과 어울려 있나? 그들은 거친 사람들, 무절제한 사람들이다. 사람은 누구와 어울려 지내느냐에 따라 인생의 미래가 결정된다. 더욱이 지금 그럴 때가 아니다. 그런데 마태에 의하면 그 사람들과 어울려 지금 그들과 함께 앉아 있다(마26:58).

“나는 아니라”고 연속 부인하다

결국 베드로는 문 지키는 여종이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묻자 “나는 아니라”고 한다(17절). 반면에 심문받는 예수님은 증언 중에 하속에게 맞아가면서도 고통과 외로움을 이겨내며 당당하게 증언하신다.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 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22절), 누가는 하나가 아니라 지키는 사람들, 여러 사람이 예수님을 희롱하며 때렸다고 했고(눅22:63), 마태는 더 모욕적으로 썼다.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마26:67). 그런데 베드로는 멀찍이 서서 지켜보고만 있다. 그뿐인가? 예수님은 추위와 공포 속에서 떨고 계시는데 자기는 지금 따뜻한 불을 쬐고 있다(18절).

결국 예수님이 대제사장과 군병들과 무리 앞에서 증언할 때 베드로는 문 지키는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한다. 여종이라 했지만 ‘파이디온’(παιδίον)에서 파생된 단어를 쓴 것을 보면 사실 어린 계집종이다. 웃긴다. 12제자 중 맏형, 그것도 수제자인데 그런 엄청난 제자가 어린 애 앞에서 “나는 아니라”, 얼마나 겁을 먹었으면 어린 애 앞에서 이렇게 쫄았을까? 물론 사람이 주눅 들면 더한 사람 앞에서도 비겁해질 수 있지만 좀 너무했다. 초대교회에서 가장 중대한 죄를 예수를 부인하는 죄로 여겼는데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거다.

“나는 아니라”, 헬라어로는 “우크 에이미”(ουκ ειμι), 영어로는 “I am not”, 두 번째도 같은 말로 부인한다(25절). 마가는 예수님이 대제사장 앞에서도 자기 정체성을 명확히 밝히셨다고 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막14:62), 베드로는 ‘나는 아니다’(ουκ ειμι)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에고 에이미’(εγω ειμι), 죽여도 “내가 그다”, 내가 그리스도라고 할 말 다 하셨다는 거다. 이렇게 ‘에고 에이미’를 선언하시는 예수님과 대조적으로 베드로는 연속 ‘우크 에이미’, 자기를 감추었다. 확신 없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이 사건은 4 복음서가 모두 다 전하고 있다.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란 뜻이다. 마가는 대화가 갈수록 더 고조되고 확대되고 있음을 밝혔다. 베드로가 부인하는 강도가 점점 더 높아져 부인하고, 맹세하고, 심지어 저주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누가는 좀 더 잔인하게 썼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눅22:6), 부인하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시는 주님과 베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는 거다.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시는 예수님, 베드로는 당혹감에 차마 쳐다볼 수 없었을 것이다. 얼마나 민망했을까? 얼마나 죄송했을까? 마치 “같이 죽는다며?” 그러시는 것 같다.

닭이 울자 깨닫다

공교롭게도 그 시간에 닭 울음소리가 들린다.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27절),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한 마리가 울었다고 했다. 요한은 간단히 이 건을 마무리하는데 마태는 닭도 울고 베드로도 울었다고 한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26:75). 정신이 번뜩 들었던 모양이다. 아마 닭이 울 시간도 아닌데 울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것보다 마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말씀 때문에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는 것이다. 마가가 밝힌 대로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막14:31), 믿음을 장담했지만 그 맹세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너무 부끄럽다. 좀 더 빨리 말씀을 기억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에피소드도 있다. 12 제자들 중 베드로는 꼭 자기 부인하고 함께 선교를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못 알아들었기 때문인데 예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라”고 하신 말씀을 베드로는 ‘자기를’에서 ‘를’ 자를 빼먹고 “자기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로 알아듣고 늘 부인하고 함께 선교 했다는 거다. 웃자는 얘기다. 여하튼 늦게 깨달은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물론 늦게라도 깨달은 것은 다행이다.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막14:72),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은 “땅에 쓰러져 슬피 울었다”고 번역했다. 영어 성경들도 마찬가지다. 누가복음이나 요한복음에서는 “심히 통곡했다”며 엄청 슬퍼했음을 강조했다.

베드로는 통곡했다. 닭은 입술로 울었지만 가슴으로 운 베드로, 닭은 잠깐 울었지만 온종일 울었을 거다. 닭도 울고, 베드로도 울고, 예수님도 우셨다. 어리석고 연약한 자신을 깊이 보게 된 거룩한 눈물, 그 눈물은 아름다운 눈물이다. “무슨 짓 한 거야?” 베드로에게 그 닭 울음소리가 깨달음의 소리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닭 소리가 필요하다. 각성이 필요하다.

♬ 나는 주를 모른다 세 번 부인할지라도 주는 나를 모른다 부인하지 마소서/ 연약하고 어리석은 나 주를 믿노라 했으나 내 믿음이 얼마나 헛된 것인 줄 이제 압니다♬

이게 베드로를 베드로 되게 한다. 완전 딴사람이 된다. 예루살렘에 가면 베드로가 통곡하며 울었던 장소에 ‘베드로의 통곡교회’가 세워져 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에게 심문받은 자리, 교회 이름만 들어도 절절한데 중앙 돔 위의 장식이 애달프다. 십자가 위에 우는 닭 장식을 올려놓았다. 바람만 불면 이 닭은 빙글빙글 돈다. ‘닭울음교회’라 불리기도 하는데 바람만 불면 마치 닭 울음소리를 들어야 할 사람을 찾는 것 같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그날부터 늘 손수건을 갖고 다니며 닭 울음소리만 들리면 무릎 꿇고 울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혹시 수백 번 울어도 못 듣는 건 아닐까? 영국의 한 신학자는 “흘러내리는 빗방울 소리에도,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도 주님의 음성이 있다”고 했다. 닭 소리를 들어야 한다. 누구든 자신이 연약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발견치 않고서는 진정한 믿음으로 나갈 수 없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를 알지 않나? 유다는 주님을 팔았다는 후회만 했지 자신이 그럴 수도 있는 연약한 인간임을 깨닫지 못했지만 베드로는 자신의 인간됨을,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이 약한 인간인가를 깨달았다. 닭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심금을 울렸던 그 닭 울음소리가 우리의 귓전에도 들려야 한다.

우리도 때론 울어야 한다. 신앙생활을 게을리한 인도의 한 청년은 어느 날 눈병으로 고생하다가 병원에 입원해서 정밀 검사를 받았는데 의사가 "무서운 독이 눈에 감염되어 눈을 뽑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니 속히 두 눈을 뽑아야 한다"고 했다. 청년은 절망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믿음 좋은 친구가 찾아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자”고 해서 친구와 함께 교회에 가 지나온 날들을 돌이키며 회개 기도를 시작했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과거의 죄악들이 기억이 나서 울고 또 울었다.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두 눈이 퉁퉁 부었다. 다음날 하나님께 감사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수술대에 올랐는데 수술을 시작하려던 의사가 깜짝 놀랐다. 그토록 심하게 퍼져있던 독이 보이지 않았다. 울고 또 울 때 눈물과 함께 독이 다 빠져나간 거다. 뜨거운 회개의 눈물이 그 청년을 살렸다.

뉴욕 양키즈에 베이브 루스(Babe Ruth)라는 미국의 전설적인 홈런왕이 있었다. 얼마나 유명한지 그가 꼈던 글러브는 20억 2천 만원에 팔렸다. 더 유명한 게 생애 통산 714개라는 홈런이다. 행크 아론이 755개로 기록을 깨뜨리기 전인 1976년까지 세계 최고의 기록 보유자였다. 그런데 그 베이브 루스가 홈런왕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스트라이크 아웃을 제일 많이 당한 세계 기록 보유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는 714개의 홈런을 치기 위해 무려 1330번이나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했다. 어쩌면 1330번의 스트라이크 아웃이라는 실패가 없었다면, 홈런왕이라는 성공도 맛보지 못했을 수 있다. 기억하라. 실패는 성공을 만드는 과정일 수 있다. 그리고 누구나 실패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닭소리를 듣고 처절하게 자신을 발견하는 거다. 이게 바로 베드로가 다시 일어나는 축복의 전환점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의문을 두 가지를 풀면 좋겠다. 첫 번째 의문은 ‘베드로의 이 실패를 밝힌 사람이 도대체 누구일까?’라는 거다. 베드로는 제자 중 누구와도 함께 있지 않았다. 혼자만 있었는데 계집종 앞에서 일어난 이 사건을 누가 봤을까? 어떻게 복음서마다 상세하게 이 사건을 기록했을까? 그건 베드로 자신의 실토 외에는 다른 가능성이 없다. 아마 베드로가 공개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실토했던 것 같다. 배교에 해당하는 엄청난 죄지만 베드로는 회개하고, 딴사람이 되었다. 심지어 초대교회의 수장이 되고 로마 가톨릭의 1대 교황으로 여김받고 있다. 실패를 딛고 일어선 후 자기 간증을 했던 것이 자료가 되었던 것 같다.

두 번째 의문은 ‘요한은 왜 공관복음서 기록자들보다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우호적일까?’ 라는 거다. 다른 복음서에 비해 눈에 띄게 가볍게 다뤘다. 베드로가 부인하는 것도 마가복음에서는 저주까지 했다고 장황하게 기록했지만 ‘나는 아니다’, 아주 짧다.

베드로의 통곡 장면도 마찬가지다. 누가복음에서는 주님과 베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고 베드로의 당혹감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요한은 베드로가 울었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부인했다고 할 뿐이다. 이유가 있다. 요한은 회복한 베드로에게 초점을 맞추고 썼기 때문이다. 디베랴 바닷가에서의 세 번에 걸친 사랑 고백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90년 경에 요한복음를 썼는데 이미 베드로는 성령 충만한 지도자가 되어 복음 전파에 애쓰다가 65년 전후에 십자가에 달려 순교하기까지 했다. 비극적으로 다룰 이유가 없다. 베드로가 실패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일 것이다. 비록 지금 연약하고 어리석어도, 비록 지금 아프고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은 우리의 오늘을 보실 뿐만 아니라 미래를 보신다. 미래가 멋질 거다. 그래서 좋게 보시는 하나님, 우리의 믿음만 분명하면, 닭 울음소리 듣고 깨어나기만 하면 역사는 달라진다. 꼭 새벽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깨어나 멋진 인생을 새롭게 출발하고 더 크게 감사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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