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전 애즈베리 부흥 되돌아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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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김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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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즈베리대학교 예배 모습. ©애즈베리대학교 페이스북
전 미국 기독교 보수 싱크탱크의 회장이 2023년 애즈베리 부흥(Asbury Revival)을 회고한 칼럼이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에 최근 소개됐다.

마크 툴리(Mark Tooley)는 2009년 종교민주주의연구소(Institute on Religion and Democracy, IRD)의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IRD가 발간하는 외교 및 국가 안보 저널 프로비던스(Providence)의 편집자다.

다음은 ‘애즈베리 부흥 – 1년 후의 나의 회고’ 칼럼 전문이다.

복음주의자들은 수십 년 동안 미국의 부흥을 위해 기도해왔다. 하지만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가?

2023년 2월 8일 켄터키 중심부에 있는 애즈베리 대학교(Asbury University)의 부흥이 시작된 지 약 1년이 지났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이 부흥은 켄터키주 윌모어에 6000명이 사는 작은 지역의 인프라를 압도하며 5만~7만 명의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안타깝게도 학교 당국은 2주 넘도록 밤낮으로 예배가 이어져 이를 중단해야만 했다. 이 부흥은 대학 강당에서 시작되어 일반 예배가 끝난 후에도 학생들이 떠나지 않자 전국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전 세계에서 방문객들이 몰려들었다.

길 건너편에 위치한 애즈베리 신학교(Asbury Theological Seminary)는 감리교에 공통된 뿌리를 둔 별도의 기관으로, 몰려든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자체 예배당, 강당 및 체육관을 개방했다. 한때 사람들로 붐볐던 윌모어로 들어가는 주요 도로는 차량 통행이 금지됐다. 당시 예배는 단순하고, 진지하며, 화려하지 않은 감리교 방식에 따라 이루어졌다. 학생들과 다른 예배자들은 찬송하고, 기도하고, 간증을 나누고, 죄를 고백했다.

한 애즈베리 신학교 교수는 대학 강당을 잠시 방문한 경험을 회고하며 큰 평온함을 느꼈으며, 몇 시간 동안 머무를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나음을 입은 여인처럼, 완전함을 느꼈고, 그 결과 90분에 만족하며 자리를 떠났다고 전했다.

나는 부흥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웨슬리언 신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윌모어에 있었다. 부흥의 불씨는 여전히 따스하게 느껴졌고 모두가 그 일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다. 신학교 총장은 말레이시아 출신의 한 신학교 학생이 부흥을 위해 몇 년 동안 기도했다고 전했다. 말레이시아로 돌아온 그는 윌모어로 돌아가야 한다고 직감했고, 싱가포르 공항에서 처음 부흥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가 애즈베리 강당에 들어서자 많은 이들은 놀라워했다.

윌모어는 제2차 대각성 운동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케인 리지(Cane Ridge)에서 약 60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당시 이 운동은 원래 장로교 목회자들이 주최했지만 감리교인과 침례교인을 끌어들이며, 현재는 ‘그리스도의교회’(The churches of Christ)와 ‘그리스도의제자회’(Disciples of Christ)로 알려진 환원 운동을 촉발시켰다. 수천 명이 일주일 동안 외침과 신음 속에서 경배하며, 구원의 환희나 죄에 대한 괴로움으로 땅에 엎드렸다.

애즈베리 부흥에서는 이러한 극적인 장면이 없었다. 찬송, 기도 및 간증이 이루어졌다. 예배는 여전히 학생 중심으로 진행되었지만, 교수들은 종종 옆에서 도움을 주었고, 가끔 연장자나 방문객들이 중심에 나서지 않도록 제지했다. 거대한 스크린도, 폭족이나 안무도 없었다. 전기, 난방, 실내 화장실 외에 애즈베리 신학교의 기술력은 223년 전 케인 리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애즈베리에서의 분위기는 분명 덜 감정적이었다. 이 점에서 월스트리트저널(WSJ)의 비평은 다소 이상하게 느껴진다.

D.G. 하트는 1843년 머써스버그 신학교의 존 윌리엄슨 네빈을 회상했다. 그의 1843년작 ‘불안한 벤치’(The Anxious Bench)는 찰스 피니의 부흥주의를 비판했다. 네빈은 대중적인 환호 속에서 회심은 가짜로 이뤄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하트는 “부흥에서 본 것이 반드시 당신이 얻게 되는 것은 아니”라며 “신앙 부흥 운동이 어느 정도 선한 결과를 낳을 수 있지만, 영적 전시주의(Spiritual Exhibitionism)를 위한 대중적 매개체가 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트는 또한 “부흥의 감정적 흥분이 삶의 실망을 견딜 수 있을까? 느리고 꾸준한 믿음의 성장이 (…) 기독교적 성숙으로 향하는 보다 믿음직스러운 길일까?”라고 반문하며 “부흥주의의 가장 열렬한 옹호자들은 이러한 질문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애즈베리나 더 넓은 감리교 세계에서 이러한 질문에 분개할 사람은 거의 없다. 애즈베리 부흥에 참가한 이들은 일반적으로 “감정적 흥분”이 아닌 격려와 평화에 대해 말한다. 다양한 기독교적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애즈베리 대학교와 신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러나 두 대학 모두 웨슬리안 성결 운동에서 비롯되었고, 이는 감리교 영성에서 성결과 완전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웨슬리안 성결운동 신자들에게 있어 회심은 ”감정적 흥분”이 있건 없건 간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성령이 인도하는 여정의 시작일 뿐이다. 존 웨슬리는 런던의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열린 모라비안 집회에서 마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듣고, 그 유명한 “회심”을 했다. 웨슬리는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는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분이 내 죄를 없애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내게 주셨다”고 회상했다.

웨슬리와 그의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은 마음과 머리를 통해 일하셨다. 웨슬리의 영성은 감정적인 흥분보다는, 거룩한 은혜를 통한 꾸준하고 질서정연한 인내에 중점을 둔다. 어떤 종류의 영성이라도 혼자서 실천될 경우에도 거짓될 수 있다. 그러나 감리교는 모든 주요 기독교 전통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마음을 감찰하심을 알고 있다.

하트는 그의 온건한 비평에서 애즈베리 부흥이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많은 복음주의자들을 기쁘게 했다고 정확히 언급했다. 이는 또한 무자비한 세속화를 향해 반론을 제시했다. 일례로 작년 애즈베리 부흥의 영성은 미국뿐만 아니라 많은 국제 참가자들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갔다. 언젠가 사회 과학자들이 이를 정량화하려고 노력할 것으로 기대된다. 아마도 우리는 지금부터 수십 년 후에 이 부흥으로 인해 생겨난 새로운 교회, 교파나 공동체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애즈베리 부흥은 하나님께서 종종 놀라운 일을 행하시며, 그분의 구속 사역이 계속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필요한 사건이었다. 하나님의 대부분의 구속 사역은 대규모 공개 행사에서 극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대부분은 신자들의 삶 속에서 조용히 펼쳐진다. 그러나 가끔씩 크고 대중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역사는 복음의 능력을 일깨우기 위해 유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