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복음화운동과 한국교회, 1965-19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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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수 교수(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1. 1965년의 전국복음화운동과 김활란 박사

박명수 교수 ©기독일보 DB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부흥운동의 전통을 갖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07년의 대부흥운동이다. 1907년 대 부흥운동은 철저한 회개, 성령체험, 삶의 변화, 전도 강조, 그리고 연합운동의 성격을 갖고 있다. 이런 전통은 한국교회사에서 면면히 흘러 내려오고 있다. 특별히 한국교회는 민족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이와 같은 부흥운동을 통해서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해왔다. 1907년 민족이 어려웠을 때, 한국교회는 이런 시련을 신앙으로 극복해보고자 노력했다.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전통은 해방이후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하지만 해방이후에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은 하나로 집결되지 못하고, 분열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해방 이후 이성봉목사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부흥운동이 강하게 일어난 것도 사실이지만 동시에 박태선의 전도관이나 문선명의 통일교 운동이 한국교회에 침투하여 한국교회를 혼란스럽게 한 것도 사실이다.

이런 한국교회의 혼란은 60년대를 전후하여 더욱 더 두드러진다. 60년대 한국교회는 WCC 가입문제로 한국교회가 둘로 갈라지는 엄청난 아픔을 경험하였다. 물론 이전에도 한국교회는 수많은 분열을 경험하였지만 그 분열은 지엽적인 것이었다. 신사참배 문제는 예장 고신측의 분열을, 성경무오설의 문제는 기장측의 분열을 가져왔다. 하지만 WCC문제는 예장을 둘로 나누었을 뿐만이 아니라 성결교회도 갈라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반공이라는 잇슈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세계는 동서 냉전이 확고해져 가는 과정에 있었고, 한국의 보수적인 교회는 냉전의 시대에 이것을 뛰어넘어 중립적인 이데올로기를 지향하며, 공산권을 포함하려는 WCC를 수용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이런 한국교회의 분열을 딛고 다시금 한국교회를 하나로 만들어 새로운 연합운동을 일으킨 것이 바로 1965년에 시작된 전국복음화운동이었다. 전국복음화운동은 김활란박사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평소에 전도할머니라고 불릴 만큼 전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이대 총장을 은퇴한 다음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전도에 힘썼다. 그러던 중, 김활란박사는 한국 개신교선교 80주년을 앞두고 한국에 본격적인 전도운동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때마침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와 함께 남미에서 대단한 부흥집회를 인도하고 온 한경직목사가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심화복음전도(Evangelism in Depth)운동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이것은 단지 복음을 전하는 데서 끝나지 말고, 복음을 구체적으로 생활화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단지 복음전도운동이 아니라 복음화운동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 결과 김활란박사는 한경직목사와 홍현설목사와 함께 천주교와 성공회를 포함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 100명을 이대 총장공관에 초청하여 전국복음화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운동은 기존의 어떤 조직이 발전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김활란박사가 교계지도자들과 힘을 합하여 자발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1964년 12월 3일 종로의 YMCA 강당에서 발기 총회를 시작하였고, 명예위원장에 한경직, 김활란, 위원장에는 홍현설, 총무에는 김활란박사가 선임되었다. 실지로 한경직목사는 이 운동 가운데 주요 강사로, 김활란박사는 총무로서 전체적인 진행을 주관하였다. 여기에는 천주교대표 35명을 포함한 개신교 보수 진보를 망라한 기독교대표 300명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아마도 전도를 중심으로 한 에큐메니칼운동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천주교의 구체적인 참여와 기여는 별로 없었다.

전국복음화운동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민족을 살리자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사회는 매우 어려웠다. 1963년 박정희는 윤보선과의 경쟁에서 대통령이 되었고, 64년에는 월남전에 대한 파병으로 나라가 시끄러웠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기독교지도자들은 복음만이 한국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김활란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접하여 융화되지 않는 한 우리나라의 통일과 부흥과 번영을 위한 모든 경륜들은 모두가 헛된 환상에 불과할 것입니다. --- 우리민족이 오늘의 비약과 내일의 영광을 누리기 위하여 복음이 제시하는 비전을 만나야 합니다. --- 전국복음화운동은 이러한 열의와 기도가 합하여 이루어졌습니다.”고 이 운동의 정신을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복음화를 통한 민족의 구원은 한경직, 홍현설과 같은 대다수의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공감하는 생각이었다.

전국복음화 운동의 기본적인 성격은 전도였다. 하지만 이 운동은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전통적인 전도운동을 넘어서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것은 신자의 본질이며, 이것은 밖으로 진정한 민주화, 생활의 근대화, 인간의 존엄성 확립, 그리고 삶의 풍성한 생명이 넘치게 만든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근본적인 목적 아래 전국복음화운동은 5가지 분명한 목표를 가졌다. 1. 삼천만 모두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한다. 2. 삼천만 모두가 그리스도의 복음서를 갖게 한다. 3. 전국 주요도시와 4만여 부락에 복음이 골고루 전파되게 한다. 4. 재일교포와 북한동포에게 복음을 전한다. 5. 신자는 각각 배가 운동을 한다. 이와 같은 목표를 구체화하여 전국복음화대회는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구호를 만들고, 전국에 이것을 알렸다.

전국복음화운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하여 크게 두 가지 조직을 활용하였다. 하나는 분과위원회이다. 문서, 연합행사, 학원, 군종, 특수전도, 농어촌, 재정, 지구조직, 개채교회, 부녀활동, 연구기회, 어린이위원회 등의 조직을 만들어서 보다 효과적으로 전도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사실 이런 위원회의 활동을 종합해 보면 당시 한국교회의 어떤 연합운동도 감당하지 못했던 일들을 감당했다고 말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매우 의미가 있는 것은 이런 분과위원회의 활동을 통하여 전도를 위한 훈련과 전도지 준비, 대중매체를 이용한 전도, 학교, 군대와 같은 특수지역전도, 아울러서 어린이를 위한 특별집회 등이 전개되었다.

다른 하나는 지구위원회이다. 전국복음화운동이 서울의 몇몇 지도자들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 침투되는 운동이 되기 위해서 전국 단위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그리해서 전국각지에 각 지역 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해서 전국의 15개 주요도시 집회를 비롯하여, 139개 군별집회를 열었다. 특별히 서울에 주력하여 서울 6개 지구 전도대회와 45개처 전도대회를 열고, 그 마지막으로 서울운동장에서 전국신도대회를 개최하여 피날레를 장식하였다. 아울러서 이와 같은 대중집회를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먼저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전국복음화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그들로 하여금 주체적으로 각 지역의 집회를 이끌어 가도록 하였다.

이 운동은 1965년 1년을 “전국복음화운동의 해”로 설정하고 전국적으로 이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렇게 1년으로 시간을 제한 한 것은 이것이 또 하나의 기구가 되어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에 장애가 되지 않을 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전국복음화운동은 전도운동을 보다 구체적으로 성취하기 위하여 과거 단지 말로 전도하는 방법에서 나아가서 대중매체를 이용하여 전개하였다. 아울러서 각 교단에 시대에 맞는 전도훈련방법을 교육시켜서 전 교단이 여기에 참여하도록 했다. 또한 이 운동은 교리나 신학으로 인한 마찰을 줄이며, 순수한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집회임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각각 교파들은 자신들의 특색에 맞추어 이 운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융통성을 발휘하였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원봉사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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