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환율 한계… 국제 투기세력 막을 수 있나

"한미 금리 격차 확대에도 베이비 스텝 고수한 한은 탓"
8월말 외환보유액이 4364억3000만 달러로 전월 보다 21억8000만 달러 감소했다. 5일 오전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달러를 정리하고 있다. ©뉴시스

원·달러 환율이 심리적 지지선인 1400원을 넘어서 치솟은 가운데, 최근 환율 급등에는 역외 차액결제선물환(NDF) 시장에서 급등락을 노린 환 투기 세력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외환 당국은 환율 급등을 막기위해 달러 매도 등 실개입에 나서고 있지만 강달러 현상은 나아지지 않고 있어 투기세력에게 먹잇감만 제공하고 대외지급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26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8월 말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4364억3000만 달러로 전달(4386억1000만 달러) 대비 21억8000만 달러 감소했다. 외환보유액은 지난 3월부터 6월까지 4개월 연속 감소했다. 7월 반짝 늘었으나 8월 들어 다시 감소세로 돌아섰다. 올해 들어서만 외환보유액이 266억9000만 달러나 줄었다. 원·달러 환율이 8월 초 1304.0원에서 8월 말께 1350.4원까지 한 달 간 50원 가까이 급등하는 등 변동성이 커지자 외환 당국이 매도에 나서면서 외환보유액도 감소한 것으로 분석된다.

최근 들어 원화 가치 하락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다. 환율은 지난 1월 6일(1201.0원)으로 올 들어 처음 1200원을 넘은 후 6월 23일(1301.8원) 1300원을 돌파 하는데 168일이 걸렸다. 반면 6월 23일 1300원을 돌파한 후 1400원을 돌파한 9월 22일(1409.7원)까지는 91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

올 들어 외화 안전판 역할을 하는 외환보유액이 줄어들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연간 수출액의 5%, 시중통화량의 5%,유동 외채의 30%, 외국환 증권 및 기타투자금 잔액의 15% 등을 합한 규모의 100~150% 수준을 적정 외환보유액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지난해 말 기준 외환보유액 비중이 98.94%로 관련 통계가 작성된 2000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외환보유액이 줄어든 것은 환율 방어를 위해 외환당국이 달러 매도 시장에 개입했기 때문이다. 고환율이 지속되고 있어 외환당국이 매도시장 개입에 나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 외환보유액 감소 우려가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반면 외환당국은 현재의 외환보유액 수준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지난달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기자회견에서 "IMF 기준으로 외환보유액이 부족하다고 걱정하는데 내가 IMF에서 왔다"며 "IMF 어느 직원도 우리나라에 적정수준 대비 150%까지 외환보유액을 쌓으라고 얘기할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이 전세계 9위이기 때문에 외환보유액이 큰 국가의 경우 그런 기준은 의미가 없고, 150% 기준은 신흥국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연일 연고점을 찍는 환율에 외환 당국은 1400원을 막기위해 총력전을 벌였지만 속수무책이다. 외환당국은 지난주 달러를 거래하는 국내 외국환은행들에 달러 매수·매도 현황과 각 은행의 외환 관련 포지션을 매시간 보고해 달라고 요청했다. 또 달러를 다량 보유하고 있는 수출 기업들과 간담회를 열고 달러를 쟁여 놓지 말아 달라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5일과 16일에는 7~10억 달러 규모의 달러 매도 시장 개입에 나서기도 했다. 외환 시장에서 일평균 거래되는 거래대금은 100억 달러 정도 규모니 하루 평균 거래량의 7~10% 가량에 해당한다. 환율은 기본적으로 시장에서 결정되지만 급등이나 급락 등 시장 안정을 위협할 정도로 일정 방향으로 쏠리면 외환당국이 외환보유액을 사용해 달러를 사거나 팔아 시장 안정 조치를 취한다.

외환 당국은 글로벌 달러 강세에 역외 투기세력까지 가세하면서 원화 약세를 더 키우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원화에 대한 역외 투기적 거래 확대 가능성에 대해 모니터링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역외 NDF는 홍콩 등 역외 시장에서 차액만 결제하는 선물환 시장을 말한다. 거래 당사자 간 계약원금을 주고받는 것이 아닌, 계약시 미리 약속된 선물환율과 만기 때의 실제 현물환율 간의 차액만 결제하는 거래다. 이런 NDF 환율은 역내인 국내 환율에 큰 영향을 미친다. 외국인들이 원화 대비 달러가치 상승에 따른 차익실현성 NDF 매매 거래를 늘릴 때 국내은행은 그 손실분을 메꾸기 위해 현물환 매입을 늘리게 되기 때문이다. 투기 세력이 역외 NDF 시장에서 환율을 끌어올리면 역내 환율도 따라 오르는 현상이 뚜렷하다고 외환당국은 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환율 급등이 투기세력의 영향이라기 보다는 미 통화당국의 고강도 긴축으로 인한 한국과 미국의 금리 격차 확대 가능성이 높아짐에도 불구하고 한은이 '베이비 스텝'(기준금리 0.25%포인트 인상)을 고수해 왔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그동안 "당분간은 기준금리를 0.25%포인트씩 인상하는 점진적 인상 기조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수차례 밝혀왔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올 들어 원화가 큰 폭 약세를 보이고 있는데, 투기세력 영향이 크다고 보기 어렵다"며 "투기세력 보다는 한·미 금리 역전과 그 폭의 확대 가능성 때문인데, 미국의 대폭적인 기준금리 추가 인상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통화당국이 그동안 큰 폭의 금리 인상을 하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내오면서 외환시장이 흔들린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시장에 따르면 미 연준은 20~21일(현지시간) 열린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에서 기준금리를 종전 2.25~2.5%에서 3.0~3.25%로 0.75%포인트 인상했다. 이에 따라 상단 기준 같았던 금리가 다시 역전되면서 미국 금리가 우리나라(연 2.5%) 금리보다 0.75%포인트 높아졌다.

FOMC 위원들의 금리인상 전망을 보여주는 지표인 올해 말 금리 점도표 중간값은 4.4%로 예상했다. 이는 지난 6월 3.4%보다 1.0%포인트나 높아진 것이다. 또 내년말 금리 전망치도 4.6%로 6월(3.8%) 보다 0.8%포인트 상향 조정했다. 이는 올해 남은 11월, 12월 두 차례 회의 동안 최소 한 차례는 0.75%포인트 인상한다는 뜻으로 한미 금리 격차가 연말로 갈수록 더 확대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전문가들은 달러 매도를 통한 실개입이 자칫하면 외환보유액이 고갈로 이어질 수 있어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추세를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닌 과도한 변동성을 막기 위해 달러 매도를 통한 미세조정(스무딩 오퍼레이션)은 필요하다고 보지만 이렇게 되면 외환보유고가 줄어들 수 밖에 없다"며 "외환보유액이 줄어들 경우 다른 국가들에 우리나라가 외환위기에 처했다는 잘못된 인식을 줄 수 있어 외환위기가 다시 발생할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한·미 금리 격차 확대에 따른 원화 약세가 불가피한 만큼 빅스텝 등 통화정책적 대응을 통해 미국과의 금리 역전폭을 줄일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성태윤 교수는 "더 이상 외환보유액을 사용해 환율을 특정한 레벨에서 저지하는 것은 어려운 상황이 됐다"며 "미 연준의 고강도 긴축으로 한·미간 금리차가 더 커지는 상황에서 외환보유액을 사용해도 원화 약세 속도를 줄일수는 있겠지만 레벨을 막는 것은 어렵고 한국도 빅스텝 등 인상폭을 높이는 방식으로의 대응 밖에는 방법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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