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신앙생활: 하나님의 음성이란 무엇인가?(1)

오피니언·칼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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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11~32
이태희 목사

그 동안 산을 옮기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믿음의 원리, 슬기로운 신앙생활의 4가지 원리를 배웠다. “시동의 원리 (열차), 씨앗의 원리 (겨자씨), 축적의 원리 (물), 반사의 원리 (거울)” (신지상정: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는 마음)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대하16:9)

“솔로몬이 이르되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 (왕상 3:6)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삼상 23:2)

하나님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는 다윗을 축복하셨고, 그 축복 중의 하나는 바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축복해 주시는 것이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는 나를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방법은 나의 자녀를 축복해 주시는 것이다. 나의 자녀를 축복해 주시는 것이 나를 위한 최고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그 때 솔로몬이 무엇을 구했는가? 부귀영화가 아니라 듣는 마음을 구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왕상 3:9)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기도,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을 일으켜서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능력을 베풀어 주시고, 하나님의 복을 베풀어 주시는 기도의 아주 중요한 요소를 하나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종의 정체성”이다.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솔로몬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왕의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고 “종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나에게는 이와 같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없습니다. 나는 ‘마른 가지’와 같습니다. 마치 포도나무를 떠난 가지가 아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마른 가지의 정체성”이다. 이와 같은 “마른 가지의 정체성”을 가질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정체성이 바로 “종의 정체성”이다. 가장 무능한 종은 어떤 종이라고 생각하는가? “지 멋대로 하는 종”이다. 그렇다면, 가장 유능한 종은 어떤 종인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종”이다.

솔로몬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왕의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고 “종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은 포도나무의 가지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왕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포도나무 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순종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솔로몬은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주인의 명령”을 들을 수 있는 “종의 마음”이었다.

그러므로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이 짧은 기도 안에는 다음과 같은 솔로몬의 고백이 녹여져 있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마른 가지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떠나서는 저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하는 지위를 갖고는 있지만, 저는 그저 “하나님의 종”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지 않으면 저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사명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종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나의 주인이시요 나의 왕이신 하나님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이나이다. 그러므로 이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사 제게 맡기신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이 약속하신다.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왕상 3:13)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한 모든 복은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 하나님을 듣는 마음으로부터 “장수의 복”이 흘러 나온다. 하나님을 듣는 마음으로부터 “부”와 “존귀함”이 흘러 나온다. 하나님을 듣는 마음에서 나의 영광스러움”이 흘러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만 가지 복을 구할 필요가 없다. 오직 하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마음”. 이것 하나만 구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눅8장에서 예수님은 천국을 누리는 삶의 비밀을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설명해 주신다. 씨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들이 다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왜 “로고스”를 듣고도 “레에마”를 경험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로고스의 문제가 아니다. 씨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절대무오하다. 씨를 뿌리는 농부의 문제도 물론 아니다. 씨를 뿌리는 농부는 예수 그리스도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씨가 뿌려지는 밭의 문제다. 그것이 예수님의 진단이다. 그리고 그 밭의 이름은 무엇인가? “마음 밭”이다. “로고스”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레에마”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변환되어지는 밭이 있는데, 그 밭의 이름이 바로 “마음”인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마13:14-15)

마치 씨가 심기고, 그 씨가 자라 싹이 나고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는 이 모든 과정, 즉 “씨”가 “열매”로 변환되어지는 이 모든 과정이 바로 밭 속에서 이뤄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로고스”가 “하나님의 음성 레에마”로 변환되어지는 이 모든 과정은 바로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밭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무오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도 우리의 삶에 아무런 천국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말씀이 심겨진 우리의 마음에 문제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 보겠다. 우리가 우리의 귀로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유는 그 소리 안에 눈에는 보이지 않는 “진동” (음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소리를 들을 때 그 소리 안에 있는 음의 파동이 내 귀 속에 있는 “고막”을 진동 시키고, 그 진동이 신경을 통해 나의 “대뇌”에 전달 되면서 우리가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아!)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우리의 마음 밭에 떨어지는 순간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성령의 파동”을 일으키게 되고, 그 파동이 우리의 “영혼”에 전달되면서 우리의 영이 영이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 안에 담겨진 성령의 파동이 전달되는 우리 영혼의 고막이 바로 “마음”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고막이 건강하지 않으면 소리를 잘 들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이 건강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요즘 난청으로 고생하는 분들이 많이 계신다. 오랜 시간 이어폰을 끼고 시끄러운 환경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요즘은 젊은 사람들 가운데도 난청 환자들이 많다고 한다. 귀의 고막에다 소형 스피커를 껴 놓고 소리의 파동을 끊임없이 일으키니까 청각 세포가 손상되는 것이다. 우리가 “영적인 난청”을 앓고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마음이라고 하는 영혼의 고막에다가 우리 마음의 영적 세포를 죽이는 다양한 소리와 파동들 - 미혹, 유혹, 탐욕, 미움, 분노, 자아가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진동시켜서 우리의 영혼이 다양한 미혹의 소리, 탐욕의 소리, 자아의 소리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 감각이 다 죽어 버린 것이다.

그와 같은 병든 마음의 상태를 예수님은 “완악한 마음”이라고 표현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령의 감동이 우리의 마음에 파동을 일으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라고 하는 영혼의 고막이 먼저 고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계속)

이태희 목사(그안에진리교회 담임, 윌버포스 크리스천 스쿨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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