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대한민국, 그리고 기독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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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수 교수 ©기독일보 DB

우리는 일제시기 일본이 한반도에 이룩한 것들을 축소시킬 필요가 없다. 일본은 국제사회에 조선이 스스로 개혁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일본이 주도해서 조선을 개방/개혁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한반도에 와서 일본은 자신들이 국제사회에 약속한 것들을 지켰다. 일본이 이룩한 사법제도, 교통망, 학교시설, 측량산업 등은 한반도를 과거 조선시대에서 벗어나게 해 준 매우 중요한 역할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식 근대화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일본은 한국인들을 한반도의 주인이 아니라 일본인들의 하수인으로 생각하였다. 일본이 추구한 개혁은 서구의 본질적인 개혁이 아니라 서구문명을 일본식으로 왜곡한 과도문명(혹은 사이비서구문명)이었다. 헐버트는 “한국인들은 [일본의] 야만적인 봉건주의에 근거한 문명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지금 그들 앞에 한국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이념(New Ideal)의 기초를 세우는 일에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민이 요구하는 것이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한일병합을 앞에 둔 한국인들이 무엇을 원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당시 상해의 신한청년당은 일본은 무력을 좋아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민주국가가 될 수 없으며, 한국은 문화를 숭상하며 기독교를 믿기 때문에 미국과 더불어 민주국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매우 미미한 것이었다. 물론 평북 운산의 금광이 있었지만 한반도는 미국의 상업적 이해에 있어서 비중이 크지 않았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기독교였다. 미국정치를 움직이는 기독교의 영향은 매우 큰 것이었으며, 미국선교사들은 미국의 외교정책에 상당한 영양을 미쳤다. 개항기와 일제시기 미국 기독교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매우 컸다. 일제시기 세계에서 가장 큰 미국의 장로교선교부와 천주교선교부가 평양에 있었다. 여기에 주목한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미국정부에 자신들이 원하는 국가는 기독교국가라고 주장하면서 윌슨에게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였다. 하지만 3.1 운동 당시 미국 기독교의 협조는 이승만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시에 역시 이승만이 기댈 곳은 기독교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가 만든 것이 바로 기독교인친우회였다. 이 단체를 통해서 이승만은 미국정부에 로비를 했던 것이다. 기독교는 한미관계의 핵심이었고, 이 통로는 한국이 세계를 향해서 나갈 수 있는 길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일제시기 기독교의 역할을 다음 몇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한국 기독교는 한일병합 이후에도 일본에 통합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남았다. 한일합병 이후 일본은 한반도를 철저하게 일본의 일부분으로 만들려고 했다. 정치는 물론 경제, 교육, 문화 등 모든 부분에서 일본화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쉽게 일본화가 되지 않는 영역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였다. 한국 기독교는 일본과의 연대보다는 미국과의 연대를 강조하였다. 오히려 1910년 한반도가 일본에 병합될 때 한국기독교는 대부흥운동을 경험한 직후였으며, 1911년 신구약성경이 완역 출판되었고, 1912년 장로교회는 총회를 만들어 완전 독립된 교회가 되었다. 일본은 일제 말에도 한국기독교를 일본화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한국기독교를 장로교는 일본장로교로, 감리교는 일본감리교로 통합시키려고 했다. 여기에 가장 크게 반발한 것이 장로교이다. 성결교회의 경우에도 처음에는 일본 성결교회의 한 지부로 시작했지만 1910년에 독립했고, 일제 말에도 일본에 병합되는 것을 반대했다. 한국기독교는 일본기독교에 통합되지 않고 독자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둘째, 일제시기 한국 기독교는 전통적인 봉건주의도 일제의 식민지배도 반대하는 서구식 근대국가를 꿈꾸는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였다. 지금까지 한반도는 전통적인 봉건주의 공간에 속했다. 그러나 개항 이후 한반도에는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일본인 거주지역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래서 도시마다 더러운 조선인 지역과 깨끗한 일본인 지역이 나뉘어지게 되었고, 직업도 과거 봉건직업과 일본식민지가 창출한 새로운 식민직업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일제시기 한국사회에는 이런 양 공간에 속하지 않는 새로운 공간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선교사들을 중심으로하는 새로운 공간이었다. 일제시기 전국에는 약 20여개의 부(오늘의 시)가 있었고, 이들 부에는 대부분 미션 스테이션이 있었다. 이 선교부와 함께 그 주변에 교회, 학교, 병원, 그리고 기독교사회단체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선교부와 관련된 사람들은 자신들을 봉건시대에도 일제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미국 중심의 기독교질서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다. 필자는 이 공간이 매우 중요했다고 본다. 이 공간에서 각종 독립운동과 애국 계몽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3.1 운동, 신간회, 그리고 해방 이후 건국운동을 이끈 사람들은 바로 이 공간에서 성장한 것이다.

셋째, 한국 기독교는 한국을 세계와 연결하는 통로역할을 하였다. 일본은 한반도를 완전히 일본의 한 지방으로 전락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이것을 거부하고, 세계로 나가기를 원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세계로 나갈 수 있는 통로가 되었던 것이 바로 기독교였다. 선교사들은 영어를 가르쳐 주고, 유학을 알선해 주고, 그 길을 알려 주는 통로였다. 이승만도 이 통로를 통해서 미국에 갔고, 박헌영도 원래 선교사를 통해 미국 유학을 꿈꾸었다. 이 통로를 통해서 한국 기독교는 세계를 알게 되었고, 더 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된 한국 기독교인들은 일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국제정세를 살펴보며 독립을 기다리고 민주공화국 건설을 고대했던 것이다.

넷째, 한국 기독교는 일본의 천황주의와 싸웠다. 원래 서구열강을 따라서 국제질서에 따라 근대국가가 되었던 일본은 1920년대를 지나가면서 2등국가가 아니라 아시아의 패권국이 되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사실 이런 생각은 일본의 임나일본부설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황제가 되면 한 국가만이 아니라 여러 국가의 지배자가 되어야 하며, 따라서 일본의 황제는 섬나라의 왕이 아니라 한 문명권을 지배하는 황제여야 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런 연장선상에서 대동아공영권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동아공영권은 일본판 중화주의라고 본다. 중국의 천자가 일본의 천황으로 바뀌었고, 그 중심이 유교가 있던 것이 신도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에서 이런 일본의 천황제에 끝까지 저항한 것은 기독교였다. 따라서 태평양전쟁은 단지 정치적인 전쟁이 아니라 종교적인 전쟁이었고, 이것을 잘 간파한 사람은 다름이 아닌 이승만이었으며, 그의 [일본 내막기]는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 기독교는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 일본의 가장 큰 적대세력이었다.

일제시기 한국인들의 가장 큰 관심은 누가 일본과 싸울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우리 힘으로 일본과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민족의 관심은 누가 일본과 싸울 것인가를 살펴 보면서 그 싸우는 편에 속해서 그 힘으로 독립을 이룩하겠다는 것이다. 제 1차 세계대전시기에는 독일과 중국이 일본과 싸울 것을 기대해서 한국인들은 신한혁명당을 만들었고, 연해주와 북만주의 한인들은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을 기대했다. 하지만 미국의 교포들은 미국과 일본의 전쟁을 기대했다. 박용만은 미국은 만주를 놓고 일본과 싸울 것을 기대했고, 이럴 경우 무장해서 미국을 돕는다면 독립의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태평양전쟁을 통해서 미국은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되었고, 이승만은 미국 편에 섬으로써 독립을 얻으려고 했다.

우리는 3.1 운동을 한민족의 민족운동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운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민족운동의 핵심은 국제사회,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미국을 향해서 우리의 독립을 인정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우리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하면서 동시에 서구민주세계의 일원이 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여기에 대해서 침묵하였다. 그 사이 우리 민족은 여기에 실망해서 소련의 공산주의에도 기웃거렸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고,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시작하면서 여기에 대한 답변이 주어졌다. 미국은 제 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함께 대서양헌장을 통하여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다시 한번 천명하고, 그 다음에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다음에 카이로선언을 통하여 한반도를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로 만들겠다는 선언을 하였다. 필자는 카이로 선언이야 말로 3.1 운동에 대한 미국의 응답이며, 이것이야말로 1882년 조미조약에 있던 거중 조정을 미국이 구체적으로 약속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계속)

박명수 박사(서울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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