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1)

오피니언·칼럼
기고

*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최더함 박사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것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사 53:3~9)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가더라”(마 27:27~31)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1. 구속협약

신학적으로 죄인의 구원을 논할 때 제일 먼저 거론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을 일러 삼위 하나님 간의 구속협약이라 말합니다. 즉, 죄인 된 하나님의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속을 통해 구원하기 위해 삼위 하나님께서 각자의 위치와 직분과 사역을 나누고 상호 긴밀히 협력한다는 것을 영원 전에 서로 협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성부 하나님은 구속을 통해 구원을 받을 하나님의 자녀들을 영원 전에 예정하셨고, 성자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에 내려와 인류가 지은 모든 죗값을 치루어 구속할 죄인들을 도로 사서 하나님께로 돌리는 임무를 완수하셨고, 성령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구속 값을 치루고 사신 바 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은혜의 믿음을 주입시키어 새롭게 거듭난 인생이 되도록 역사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구속’이란 무엇인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지난주 속죄를 뜻하는 ‘코페르’에서도 설명했듯이 일반적으로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속박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을 뜻합니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두 개의 히브리어 단어들이 사용되었습니다.

1) ‘파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는 주로 율법에 따라 하나님께 속한 초태생의 사람이나 가축을 대속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을 돈으로 환산할 때 바로 속죄를 뜻하는 ‘코페르’가 사용되었습니다. 출 13:13이 이를 잘 나타내줍니다.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처음 난 모든 자는 대속할 것이니라”

2) ‘게울라’가 있습니다. 이는 ‘다시 구입한다’는 뜻인데, 즉 자신을 종으로 팔아버린 곤궁한 친족을 구속해야 하는 의무나 이미 팔아버린 친족의 땅을 다시 구입해야 하는 의무와 관련됩니다. 이 ‘게울라’에서 ‘고엘’이 파생되었는데 이를 룻기에서는 ‘기업 무를 자’라 하였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구속은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빼앗기고 잃어버린 자녀들을 값을 치루고 다시 샀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레 25:25)

신약에서도 여러 단어들이 사용되었습니다.

1) 먼저 지난주에 설명한 바대로 ‘보상’이라는 뜻의 ‘뤼트로’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이 노예들 혹은 죄수들이 석방되기 위해 바치는 돈이 될 때 ‘뤼트론’이 됩니다.

2)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얻게 된 현세의 구속과 장래에 얻게 되는 종말론적 구속 모두를 지칭하면서 ‘아포뤼트로시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좀 더 설명하자면 이 단어의 원래 뜻은 ‘악형의 고통에서 벗어남’을 뜻합니다. 이 단어를 통해 바울 사도가 의도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결국 지옥의 형벌을 벗어나 영원히 자유로운 해방을 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짜 자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말하는 ‘자유’는 일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영원하고 완전한 자유는 천국에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 구속관입니다.

3) 동사로 ‘아고라조’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주로 시장에서 사용되는 말인데 어떤 물건이나 노예 등을 ‘구입하다’는 뜻입니다.

이 모든 단어들이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하나의 의미는 ‘구속’입니다. 즉, ‘값을 치루고 구입한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세상에 공짜 없다’ 영국 속담에도 ‘공짜 점심 없다’고 했듯이 결론적으로 살펴보면 우리가 구원의 선물을 받은 것은 결코 그저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배후엔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이라는 구속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의 진정한 의미를 가슴에 새긴 사람이라면 이제 성찬식 때 먹는 포도주 한 잔이 결코 무의미한 음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포도주라는 음료를 마시지만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겐 그것이 단순히 포도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것을 믿게 될 것입니다. (계속)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

#최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