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러시아군의 반인륜 범죄, 누가 단죄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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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를 무력 침공한 러시아군의 잔학 행위가 도처에서 드러나면서 전 세계가 충격과 함께 분노에 떨고 있다. 키이우 외곽의 작은 도시 부차에서 땅속에 묻힌 민간인 시신 100여 구가 발견됐는데 이 시신들은 손과 다리가 뒤로 묶인 채 머리에 총상을 입은 참혹한 모습이었다. 러시아군이 퇴각하면서 민간인을 집단 살해해 암매장한 범죄행위가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또 러시아군이 크라마토르스크 기차역에 미사일을 쏴 39명이 숨지고 89명이 다쳤는데 이들은 모두 피난 중인 민간인들이었다. 지난 9일 CNN이 공개한 음성 파일에는 러시아군 병사가 상관에게 “이 마을에는 민간인밖에 없다”고 하자 상관이 “민간인이어도 다 죽이라”고 지시하는 목소리가 담겨 있어 러시아군의 민간인 학살 만행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군인이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은 국제인도법(IHL)에 위배되는 전쟁 범죄다. 국제인도법은 무력충돌 시 전투의 수단과 방법을 규제하는 법으로 제네바협약에 따라 전투에 더 이상 가담하지 않는 군인(포로)과 민간인을 보호하게 되어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용납이 안 되지만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한 행위는 그 어떤 이유로도 용서받을 수 없다. 러시아는 침공 초기부터 병원, 유치원 등 민간인 시설에 미사일과 폭탄을 투하하는가 하면 어린아이를 인간방패로 쓰고 시신에 폭탄을 설치하는 등 인간이기를 포기한 듯한 천인공노할 잔혹 행위를 서슴없이 저질렀다.

러시아군이 저지른 잔학 행위가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처음엔 남의 나라 분쟁쯤으로 여기고 외면하던 나라들까지 치를 떨게 했다. 이들 유엔 회원국들은 유엔 차원의 진상 조사를 촉구하며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넘겨 전범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국제사회의 공분이 러시아를 국제사회에서 퇴출하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주목할 점이다. 그 첫 결의로 유엔이 지난 7일 긴급 총회를 열어 러시아를 인권이사국(UNHRC)에서 전격 퇴출시켰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위치에 있는 러시아가 회원국들에 의해 유엔 산하 기구에서 쫓겨난 것은 그 어떤 이유로도 전쟁 범죄는 용납할 수 없다는 국제사회의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다. 그런데 93국이 찬성한 러시아의 퇴출에 북한과 중국은 반대표를 던졌다. 어린이를 포함해 민간인 시신 수백 구가 참혹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는데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무조건 러시아 편을 들었다는 것은 이들이 과거 냉전시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틀 안에 아직도 갇혀 있다는 증거다.

정부는 국제사회가 러시아에 대한 제재 수위를 높여 갈 때도 미국의 동맹국 가운데 유일하게 대러 제재를 유보하는 등 한동안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그러다가 러시아의 전면 침공으로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이 빗발치자 뒤늦게 동참 의사를 밝혔다. 이에 대해 ​미 국무부 핵확산 금지 담당 부차관보를 지낸 마크 패츠 패트릭은 “한국의 소심하고 미온적인 접근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지적하면서 “한국은 과거 침략의 대대적인 피해자로서 과거 대대적인 원조를 받았다”며 정부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당시 여당의 대통령 후보는 TV 토론에서 “6개월 초보 정치인이 대통령이 돼서, 나토 가입을 공언하고 러시아를 자극하는 바람에 충돌했다”며 책임이 러시아가 아닌 우크라이나에 있다는 식으로 말해 논란을 빚었다. 그러자 전 세계 네티즌들은 “일본의 한국 침략도 한국 탓이냐”며 비난을 쏟아냈다. 6.25 전쟁 때 미국과 유엔 참전 16개국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난 대한민국의 이런 표변은 국제사회로부터 지탄을 받아도 변명할 수 없을 정도다.

국제사회가 러시아의 반인륜적 만행에 치를 떨고 있지만, 현재로선 마땅한 억제 수단이 없다는 게 고민이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 5일 유엔 안보리 화상 연설에서 러시아군의 만행을 고발하며 2차 세계대전 후의 뉘른베르크 재판소와 같은 국제법정을 설립해 단죄할 것을 제안했으나 상대가 러시아라는 게 걸림돌이다.

유엔 안보리는 국제평화를 위협하는 분쟁에 대해 평화적 해결을 권고하거나 개입할 수 있는 유엔의 핵심 기구다. 15개 회원국 중 미국, 중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등 5개 상임이사국에만 거부권이 주어진다. 즉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하는 한, 그 어떤 결정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러시아와 중국은 최근 북한의 ICBM 발사 직후 안보리의 규탄 언론성명 채택조차 무산시킨 바 있다.

지금으로선 러시아와 같은 전쟁 범죄 국가를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에서 퇴출하는 방법밖에 다른 길이 없겠으나 제도적으로 불가능하다. 유엔 헌장을 뜯어고쳐야 하는데 헌장을 수정하려면 모든 상임이사국이 동의해야 한다. 미 하원에서 러시아를 유엔 안보리에서 퇴출하는 결의안을 추진 중이나 실현 불가능하다는 관측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유엔이 제도적으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면 국제사회가 더욱 단단히 연대하는 길밖에 없다. 어린아이와 부녀자 등 민간인을 강간하고 학살하는 행위는 아무리 전쟁이라도 용납할 수 없는 짐승만도 못한 만행이다. 이런 전쟁 범죄를 저지른 나라를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라고 해서 무기력하게 아무런 손도 못 댄다면 이런 반인륜 범죄는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를 경제뿐 아니라 국제사회의 모든 인적 물적 정신적 교류 협력에서 단절하는 결단을 내림으로써 러시아 국민 스스로 푸틴을 단죄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달 29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통화하며 지지를 표명한 것은 늦은 감이 있지만 잘한 일이다. 정권 교체기이긴 하지만 정부도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확대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교역이라는 눈앞의 이익에 흔들려 문명국가로서의 책무를 멀리하는 건 인도주의를 망각한 ‘소탐대실’(小貪大失)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