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회성 회복의 담론으로 손꼽히는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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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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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리뷰] 강성영 교수의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의 평화’
기장 제106회 총회서 인준받은 한신대 강성영 총장 ©한신대

교회의 공교회성 회복을 위한 담론으로 자주 등장하는 주제 중의 하나는 평화의 문제다. 그동안 한국교회에서는 평화의 논의가 이른 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논의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다시 말해 교회가 특정 이념에 밀착돼 반공 애국주의 또는 보수 친미주의라는 성향에 치우치면서 평화 논의를 진행했고 그 결과 북한 체제의 붕괴와 흡수통일 방식의 평화 담론에 머무르는 경향이 강했다.

얼마 전 한신대 총장으로 인준된 강성영 교수(기독교윤리학)는 몇해 전 「신학과교회」(2018년 여름호)에 기고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의 평화'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이러한 평화 논의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며 기독교 평화윤리의 근거를 반공 애국주의 또는 보수 친미주의가 아닌 성서적 근거, 즉 '예수의 윤리'(Ethik Jesus)에서 찾아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강 교수는 평화의 실현의 가능 조건으로 "폭력을 포기하는 것이 평화를 실현하는 절대적 조건"이라고 확인했다. 그는 예수이 산상설교의 가르침에 의거해 "폭력 행사의 금지나 원수 사랑의 계명은 예수운동의 내적 그룹에 국한한 특수 윤리(엘리트 도덕)나 내적 완성의 도덕으로 볼 수 없고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부여된 일상의 윤리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강 교수는 특히 "산상설교의 반대명제 중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는 각기 폭력의 포기와 원수 사랑의 계명으로 예수이 윤리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며 무엇보다 예수의 윤리가 "상호성의 도덕이 아니라 일방성의 윤리"라고 했다.

그러면서 "동서고금을 통하여 보편적인 지혜의 격률로 간주되는 이 상호성의 규범은 "모든 규범 중이 규범", "모든 규율 중의 근본 규율"로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인간의 행동을 규정한다"며 "인간은 서로에게 의존해 있음으로 인해 행위의 규범으로서 황금률을 절대적으로 요청한다"고 덧붙였다.

상호성의 도덕이란 '힘의 균형'을 슬로건으로 내건 냉전시대 국제 질서를 지탱한 정치적 현실주의를 가리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강 교수는 황금률로 여겨지는 이러한 상호성의 도덕을 넘어서는 것이 "예수의 윤리"라며 "그것이 바로 일방성의 윤리"라고 했다.

그는 "예수는 산상설교의 반대명제의 도입부에 청중들에게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요구했다"며 "이미 예수 자신이 율법이나 선지자의 가르침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하여 왔다고 선언한 것처럼 상호성에 기초한 자연적인 규범적 정의를 뛰어 넘는 일방성의 에토스를 요청한 것이다. 이것을 디트리히 본회퍼는 정말로 중요한 것은 '더 나은 율법'이 아니라 '더 나은 의'라고 강조한다"고 전했다.

이어 "그리스도인 됨의 특징은 바로 자연스러운 것(교환적, 호혜적, 자연적 정의)이 아니라 특별한 것, 비범한 것, 당연하지 않은 것이다"라며 "폭력 사용의 포기와 운수 사랑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비범성'에 속하는 일방성의 윤리이고 이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함을 본받는 길"이라고 했다.

아울러 "악인과 선인을 구별하지 않는 창조주의 은혜로 인해 원수에게 품은 적대와 증오를 극복하는 것이 원수 사랑이며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평화의 에토스다. 원수 사랑은 원수에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에 대한 적대감을 극복함으로써 진정한 평화를 창조한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산상설교의 폭력 사용의 포기와 원수 사랑의 계명에 대해 "너무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종교적 계율"이라고 치부하는 것에 대해서는 "상호 적대와 무력 사용을 통한 갈등 해결과 분쟁이 인류의 역사에서 얼마나 큰 재앙을 초래했는가를 생각하면 안보가 아닌 새로운 길, 비범한 길, 결코 당연하지 않은 선택을 통해 화해와 평화의 길을 모색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윤리적 당위"라고 반박했다.

강 교수는 산상설교의 폭력 사용 포기와 원수 사랑 계명에 이어 하나님의 나라의 희망을 기독교 평화윤리의 근거로 제시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모든 인간 세상의 악의 뿌리인 탐욕과 불의, 적대감과 폭력으로부터의 방향 전환, '메타노이아'를 요구한다"며 "이 '메타노이아'는 근본적인 방향의 전환을 뜻한다. 그것은 "~으로부터"일 뿐만 아니라 "~을 향한 전환"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개인적으로 탐욕과 이기심의 자기중심적 욕망으로부터 타자를 향한 관심과 배려의 자세로, 집단적으로는 갈등과 증오를 무력으로 해결하려는 전쟁으로부터 화해와 평화를 향한 전환"이라며 "이 전환의 성격이 바로 종말론과 윤리의 상관성을 가리키며 기독교 평화윤리를 하나님 나라의 희망에 정초하는 근거다"라고 덧붙였다.

종말론적 윤리와 결합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해서는 "기독교 사회윤리를 "기독교인의 세계 책임을 위한 집단적 행위에 대한 비판적 숙고"라고 정의한다면 '비판적' 또는 '반성적'이라는 수식어를 내용적으로 규정하는 핵심이 바로 '종말론적 유보'이다"라며 "'종말론적 유보'란 인간의 역사적 행동은 약속된 미래의 전적인 새로움을 향해 항상 개방되어 있고 또한 그 미래의 성취는 행동의 차원과 목표로부터 지속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또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님"의 차원에서 인간의 행동이 실현할 성취의 크기는 언제나 그 목표에 대하여 단지 근사치만을 갖는 것이다"라며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의 희망에 의해 추진되는 역사적 프락시스는 단지 하나님 나라에 근사치의 실현 가능성을 가진다는 것이다"라고 부연했다.

이처럼 산상설교의 반명제인 폭력의 포기와 원수 사랑의 계명을 해석함으로써 기독교 평화윤리의 성서적 토대를 세우고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예수의 선포에서 종말론적 윤리의 근거를 찾은 강 교수는 다음과 같은 잠정적 결론을 내렸다.

▲평화는 가능하다 ▲평화 건설은 폭력사용의 포기와 원수에 대한 적대감의 극복과 화해를 통해 가능하다 ▲평화 건설은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통해 동기화되고 현실화되며 완성된다 ▲지상의 평화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평화를 지향하며 상대화된다.

이어 산상설교의 평화 정치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그는 "안보는 평화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평화가 가장 최선의 안보이다(디트리히 본회퍼). "상호보장된 파괴"의 위협, 즉 핵미사일과 수소폭탄으로 무장한 안보는 결코 평화를 이룰 수 없으며 공멸만을 초래할 뿐이다"라며 "결국 평화는 원수적 적대감을 극복하고 원수를 타자화하기보다 생명의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 인식해 원수의 생명을 해칠 수 있는 모든 무력을 포기하고 끝내 원수를 사랑하는 것에서 실현된다"라고 역설했다.

이러한 정의로운 평화는 비단 인간과 인간 또는 집단과 집단 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강 교수는 "평화를 위한 노력에는 사회악이 제거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기술 권력과 소비주의 지배하에 멸종의 위기에 놓인 동식물과 토양, 물, 기후 환경을 포함한 생태계 전반에 미치는 생태악의 폭력으로부터 해방되는 것도 중요하다"며 "성서 속에서도 인간과 자연의 적대와 소외가 극복되는 것이 샬롬의 비전이다. 정의와 결합한 '평화'가 '정의로운 평화'이며 그것이 인류가 지향해야 할 구원과 해방을 위한 바로 그 평화이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