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벗어난 성경읽기, 오독이자 무례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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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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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영삼 교수, 페이스북에 올린 '문맥. 문맥, 문맥' 글에서 밝혀
채영삼 교수(백석대) ©기독일보DB

채영삼 백석대 교수는 2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문맥, 문맥, 문맥'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성경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문맥(文脈)"을 제시했다.

채 교수는 "해석하고자 하는 그 본문이 속해 있는 전후문맥, 전체문맥이다. 만일 본문의 저자가 A-B-C-D를 말했는데, 여기서 A의 의미를 알고 싶으면, 그 A가 A-B-C-D라는 문맥의 연결고리 안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찾아야 한다"며 "만일 A의 의미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B-C-D라는 고리를 끊어버리고, 또 다른 어떤 문맥, 종종 해석자 자신의, 예컨대, <가-나-다-라>라는 문맥 안에 A를 집어넣으면 어떻게 되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즉, 원래 본문인 A를 해석하는데 <A-나-다-라>라는 식으로 읽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런 것은, 좋은 의도이든 나쁜 의도이든, 좋게 말하면 '오독'(misreading)이요 나쁘게 말하면 '무례'한 읽기다"라며 "그 본문을 이야기한 저자의 '전체 문맥'을 무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오해, 가짜뉴스, 나쁜 뉴스는 이런 식으로 발생한다. 어떤 사람이 1시간 동안 여러 말을 했는데, 그 중에 한 두 마디만 달랑 떼어서, 그것을 '전혀 다른 문맥' 안에 집어넣어 전달하면 어찌되는가?"라고 했다.

채 교수는 "그래서 성경을 해석할 때, 그 본문이 '속해 있는 전후문맥'이 중요하다. 그 전후문맥뿐 아니라 그 전후문맥이 속해 있는 책 전체,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책이 속해 있는 정경모음집, 더 나아가 신약이면 신약, 구약이면 구약, 그리고 성경 전체의 문맥이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채 교수는 이어 "결국은 한 분 하나님께서 구약과 신약을 통해 일관되게 말씀하신 것이 성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신학이 중요하게 되고, 그래서 그 성경신학에 기초한 조직신학의 교리들이 성경해석의 뼈대가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게 하라'는 말도 이런 맥락과 다르지 않다고 강조했다. 채 교수는 "어떤 사람이 어떤 말을 했다하자. 그러면 그 말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 사람 자신이 아닌가?"라며 "성경해석의 경우는 그래서 성경 전체의 문맥과 그 성경을 기록하신 성령의 도우심이 결정적이 된다. 저자의 의도가 '문맥'으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저자이신 성령께서 친히 조명하여 그 말씀을 깨닫게 하셔야 제대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문맥을 저자의 의도를 보존하는 장치라는 설명도 보탰다. 그는 "누구도, 그 문맥 자체가 결정해 놓은 틀을 벗어나서는 저자가 의도한 바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것은 '오독'이기도 하지만, '무례'한 일이다. 저자의 말을 '충분히 듣지' 않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문맥을 떠나서 자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경우 "그것이 '자본주의적, 번영신학적' 성경읽기이든, '이데올로기비평, 퀴어비평적' 성경읽기이든, 원래 A라는 본문을 로 읽든지, 으로 읽든지,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저자의 '말'을 내가 '내 문맥' 안에 떼어 가져다 붙여놓고 읽는 성급함과 자기중심성에 갇혀버리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채 교수는 "그래서 성경 '해석'에서 있어서 가장 절실한 덕목은 '겸손함'과 '듣기'이다. '부지런함'도 필요하지만, 본문 앞에서 '자기 자신의 문맥까지' 내려놓을 수 있는 겸손함과 그 '자신의 문맥' 자체가 깨어져 나가고 새롭게 구성되기까지를 허용하는 '집요한 듣기'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러한 '철저한 듣기와 치열한 대화, 그리고 진실한 응답'이 반복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내 자신이 고집하는 '문맥'이 깨어져나가고, '저자 자신의 문맥 안으로' 들어가는 '해석학적 만남'이 일어나야 한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그는"'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성경을 대하면서 그런 '겸손함'과 '철저한 듣기'가 없는 '부지런함'이란, 전속력으로 잘 달리지만 고속도로를 역주행 하는 차와 같다고 할 수 있다"며 "그것이 일정 부분 명민하고 무언가 시원케 하는 부분이 있을지라도, '계시의 말씀'을 보고도 그 말씀을 하신 분이 아니라, 결국 막다른 길의 끝에서 '자신의 얼굴'밖에 확인하지 못하는 자기 폐쇄적 해석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