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리뷰-①] '설교자의 말’과 '하늘의 말’ 사이의 거리

목회·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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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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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수 교수(이화여대)의 「말의 힘과 한국 교회」 논문

논문 정보: 「한국문화연구」 1, 2001: 193-218

그리스도교는 '말'을 중요시하는 종교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사건에 "말씀"이 있고, 태초를 언급한 신약의 요한복음서 1장은 "태초에 말이 있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오늘날 교회도 말을 중요시한다. 가톨릭에 비해 개신교는 확실히 말 중심이다. 가톨릭의 예배가 성례전 중심인데 비해 개신교의 예배는 설교 중심이다. 육체가 공기로 숨을 쉬는 것같이 정신은 언어로 사고한다. 이같이 중요한 '말'을 한국 교회는 얼마나 잘 인지하고 있고 또 얼마나 잘 사용하고 있는가?

한국교회의 '말'에 대한 이해와 사용의 문제에 있어 양명수 교수의 「말의 힘과 한국 교회」 논문의 메시지가 가지는 메시지가 크다. 양명수 교수는 이 논문에서 한국교회가 '할 말'은 하지 않고, '한 말'만 잔뜩 늘어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각성을 촉구한다. 여기서 '할 말'이란 지금 여기서 생생하게 살아서 사람들과 관계하는 말이고, '한 말'은 과거의 말이다. '한 말'은 과거에는 현재 진행형인 '할 말' 그리고 '하는 말'이었겠으나, 그것이 고착화되어 '한 말'로 굳어진 형태이다. '한 말'은 말하자면 도그마화 된 것이고 교리화 된 것이다.

양명수 교수는 종교 언어가 '관계적 언어'이며 '귀속 언어'라는 것을 강조한다. 관계적 언어라는 것은 존재론적 차원의 범위에서 이해된다. 그리스도교인의 인간 이해는 창조주와의 관계성 안에서의 이해인데, 실존적 인간은 존재론적 단절을 경험한다. 실존이 경험하는 불안과 소외의 출처도 거슬러 올라가보면 존재론적 단절로부터 연유한 것이다. 종교 언어는 "존재와의 관계 단절에서 온 자기와의 관계 단절을 치유하는 언어 곧 관계 회복의 언어"이다. 이와 같이 관계 회복을 지향하는 언어로서의 종교언어는 "귀속을 강조"한다. 인간이 이미 어디에 속해 있으며, 따라서 내 말보다 저 쪽에서 오는 말, 내 뜻보다 저 쪽에서 오는 뜻에 개방되어 있다. 그런데 이 "귀속의 체험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체험"이다. 신과 인간의 관계를 그 어떤 언어로도 한 번에 다 그려낼 수 없다. 그래서 종교의 언어는 이미 "한 말"이라 할지라도 "아직 할 말의 상태로 남아있다. 이것이 종교 언어가 가진 상징성이다.

그런데 교회에서의 언어가 '한 말'의 차원에만 머무르게 되면, 과거의 경험을 현재의 상황에 억지로 구겨넣어야 한다. '한 말'은 한 때 '하는 말'이었으므로 과거로부터의 전통과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분명 신앙의 지침이 되고 이정표가 되어준다. 그것이 고착화되었다고 하여 그것이 힘을 완전히 잃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충분히 다시 재현될 수도 있다. 문제는 '한 말' 그 자체가 아니라 교회가 '한 말'에 매몰되어버리는 것이다. 현재에 넘실거리는 운동력과 생명력을 과거의 틀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하는 것이다. 폴 틸리히의 언어를 빌려 말하면 상징이 개념화가 되는 것이다.

양명수 교수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교회의 현장에서 생각해볼 여러 사안들을 다루었는데, 그 가운데 두 가지를 논해보고자 한다.

첫째는 교회 내 교역자들의 말에 관해서다. 개신교의 예배 시간의 절반 이상이 설교 시간에 할애되고, 예배 이외의 상황에서도 교회 교역자의 말은 특정 권위를 가진다. 양명수 교수는 교역자의 말이 교회 내에서 갖는 권위에 대하여 성찰을 요구한다. 앞서 논술한 바와 같이 종교의 언어는 관계적인 언어이므로 '말'과 '들음'이 함께 있는데, 그리스도교인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자' 한다. 문제의 시작점은 교역자의 말이 하늘로부터의 말과 동일시될 때이다. 양명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설교자는 들은 대로 전하는 것처럼 말한다. 하나님의 말처럼 말한다.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은 할 말을 하는 말이므로 듣는 이가 할 말을 하는 말이 된다 ... 그래서 자신의 말에 하늘의 권위를 부여한다."

설교자에게 요구되는 언어는 애초에 하늘로부터 들은 말을 잘 전달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설교자가 말을 '들었다' 할지라도 그의 언어는 '해석'을 거친 언어다. 유한자의 틀을 거치지 않은 하늘의 말은 이 땅에 없다. 그럼에도 설교자가 자신의 말을 위로부터 내려온 '있는 그대로의 말'로서 전할 때, 그리고 그것을 듣는 자가 그 말에 주체적인 결단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복종할 때, 그 말은 교조적인 이데올로기가 될 가능성을 배태한다. 양명수 교수는 한국교회에 이같은 면, 즉 설교자의 말을 절대화하고 듣는 자는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면이 특수하게 강하게 나타난다고 진단하면서 각성을 촉구한다. 여기에 대한 원인이 둘째 문제로 이어진다.

둘째 문제는 '상대'에 대한 두려움이다. '말'을 일방적으로 절대시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연유한다는 분석이다. 양명수 교수는 "한국 교회는 상대를 두려워한다"라고 했다. 기본적으로 종교는 절대에 대한 신앙이기에 절대에 대한 절대적 태도는 필연적인 것이고, 또 그것이 신앙이다. 그런데 여기서 양명수 교수가 말하고자 하는 상대성은 절대성을 허무는 상대성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을 상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니까 성서의 하나님은,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명령하거나 일방적으로 은총을 베푸는 분이 아닌,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을 상대하시는 하나님"이다. 적어도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성은, 하나님이 사람을 '상대'하시면서 비롯된 절대성이라는 말이다.

양명수 교수는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서의 신은 사람에게 자리를 내줄 수도 있는 경계선 상에 있다. 사람을 마주하고 상대하는 신이란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는 위기를 안고 있는 신이다. 휴머니즘적인 저항의 위기를 안고 있는 신이다. 한국 교회가 그런 하나님의 위기를 모른다면 하나님의 은총을 모르는 것이다. 성서의 신은 그런 신의 위기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성 가운데서의 상대성은, 하나님의 절대성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이해가 선행될 때 우리는 교회 내에서의 '말'에 대하여 다시금 새롭게 성찰해볼 수 있다. '한 말'과 절대성과 더불어, '할 말'과 '하는 말' 그리고 '상대성'에 대한 개방적 이해는 신앙의 성숙을 일면 도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