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운동과 한국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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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운동에서 기독교의 참여와 기여에 대한 고찰

이상규(백석대학교 석좌교수)

1. 문제와 과제

이상규 교수 ©기독일보 DB

‘삼일운동’이란 일제의 식민지배와 그 억압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운동으로서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파고다공원과 태화관, 그리고 전국의 9개 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선포함으로 시작되어 적극적으로 약 2개월, 광의적으로는 1년여 간에 걸쳐 국내와 만주, 연해주 등으로 확대된 민족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의미한다. 이 운동은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고 9년 후에 일어난 사건으로서 민족독립에 대한 열망과 독립투쟁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약 2개월에 걸쳐 전국적으로 전개된 이때의 독립운동 기간 동안 전인구의 10%에 해당하는 200만이 넘는 한국인이 만세운동에 가담하였고, 전국 218(232)개 부,군 가운데 212(229)개 부,군에서 1,491(1,542) 건의 시위가 일어났다. 4월 말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으로 반일 투쟁은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지만 3월 1일에서 5월말까지 학살된 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이었고, 피검된 자는 46,948명에 달했다. 피해상황이 보여주는 바처럼 1919년의 삼일운동은 한국인들이 거족적으로 참여한 독립운동으로서,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인정되고 있다. 삼일운동은 한국인들이 신분, 직업, 계급, 지역 그리고 종교를 초월하여 대동단결하여 일어난 사건으로서 한국인이 근대민족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 삼일운동은 한민족의 주체적인 독립 쟁취에 대한 자신감을 부여했고, 이후 전개된 독립운동의 지속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세계인들에게 한민족의 자주독립 의지와 역량을 알리는 기회가 된 것 또한 삼일운동의 의미를 더해 준다. 평양 주제 감리교 선교사 문요한(John Moore, 1874-1963)은 “조선인의 삼일운동 후 일 년 간의 사상적 진보는 50년의 진보와 같은 진보”라고 평가했을 정도였다.

삼일운동은 궁극적으로 독립을 쟁취하자는 것이었으나 독립을 이루지 못했으나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첫째, 그해 4월 11일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됨으로서 국민주권정부 수립운동이 일어나고 거족적인 민족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형성되었다. 둘째, 삼일운동이 비폭력운동으로 시작되어 많은 피해를 입게 된 것을 교훈으로 삼아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무장독립 투쟁이 일어나, 북간도에서의 국민군회를 비롯하여 북로군정서, 서로군정서, 대한독립군, 대한의용군, 광복군 총영 등이 조직되었다. 1920년에는 홍범도 장군이 지휘하는 독립군 부대가, 같은 해 청산리전투에서는 김좌진 장군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이 일본군과 대결하는 등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삼일운동에 참여했던 민중들의 정치의식이 고조되어 국내 민족운동 기반이 강해졌고, 국산품애용, 근검, 절재운동, 계몽운동 등으로 발전하였다. 넷째, 삼일운동이 민족 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세계의 피 압박 약소 만족의 독립과 해방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북경대학 중심의 5.4 운동, 인도 간디 중심의 ‘샤타 그라하’ 비폭력 무저항운동이 그것이다. 필리핀, 베트남, 이집트 등지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다섯째, 삼일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수단인 무단정치의 한계를 깨닫게 해 주어 비록 가식적 측면이 없지 않지만 문화정치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상에서 개괄한 삼일운동을, 이기백은 거족적 ‘민족운동’으로, 함석헌은 ‘민중운동’으로, 김성균은 ‘민족정신 환기운동’으로, 현상윤과 이병혁은 ‘조국해방운동’으로 인식했는가 하면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일어난 농민 노동자운동이기 때문에 ‘인민혁명운동’ 혹은 ‘계급투쟁운동’으로 평가한다. 어떤 평가를 하던 분명한 사실은 삼일운동은 소수의 엘리트 그룹의 주도적인 준비와 대중적 호응으로 발전하여 한국독립운동의 신기원을 이룬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삼일운동에 대한 연구는 민족운동사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삼일운동사 연구에 있어서 아래의 문제에 대해서는 상반된 의견이 있어왔다. 첫째, 삼일운동 준비단계에서 러시아 혁명이나 윌슨의 민족자결론이 우리나라 삼일운동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점이다. 삼일운동은 대중 혹은 민중운동으로 발전하였고 거사에 참여한 주도적인 세력은 농민들이었는데 이들이 국제 정세에 민감할 수 있었을까? 지도부를 형성한 소수의 엘리트 그룹이 국제정세에 민감했고, 그것이 삼일운동의 시원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민중동원의 실제적인 동력원이 되었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즉 삼일운동 발발배경에 있어서 외인론(外因論)과 내인론(內因論), 그리고 양자를 균형 있게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어왔다. 둘째, 삼일운동을 이끌어가 주체인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이 이 운동의 주체인가 아니면 이 운동을 실제적으로 확대 발전시켜 간 다수의 기독교계가 관여한 민중 세력인가? 이 운동의 외연에 있어서 주도적인 세력 혹은 조직은 무엇인가? 셋째, 삼일운동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운동이 근대 민족주의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보아 동학농민운동, 개화자강운동, 의병운동 등 세 갈래의 민족운동이 합쳐진 운동이라고 보는 견해와 개항 이후 추진되어 온 민족운동의 하한점으로 보고 이후의 민족운동을 사회주의 세력이 주도하는 민족운동을 이해하는 입장이 있다. 이런 사학계의 해석과 더불어 기독교계의 삼일운동 참여정도에 따라 삼일운동 성격규정이 달라 질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 글에서는 위의 세 가지 논점에 대해 유의하면서 삼일운동에 있어서 기독교의 기여 혹은 역할이 어떠했던 가에 대해 고찰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는 개별 기독교인들(Christians)과 집합적 개념으로서의 기독교회(Christian church) 양자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삼일운동과 기독교에 대해서는 이미 논구된 바 있으나, 이 글에서는 기존의 연구를 수렴하되 새로운 정보 혹은 자료를 기초로 삼일운동의 준비단계, 거사 실행단계, 그리고 피압박 민족의 현실과 독립에의 열망에 대한 국제적인 여론 형성에 있어서 기독교의 역할이 어떠했는가, 그리고 체한 선교사들은 3.1 운동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했는가 하는 점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논구하였다. 특히 국제사적 시각에서 이해한 선교사들의 견해, 특히 삼일운동에 있어서 선교사의 역할이 어떠했던가에 대해 고찰하였고, 또 필자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무엇보다도 이 글에서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논구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3.1운동 백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시의적절한 논구로 판단되며, 향후 기독교와 삼일운동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연구의 토대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2. 삼일운동의 배경과 준비과정

1910년대는 변화의 시기였다.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공화제국가인 중화민국이 출범했고, 1917년에는 러시아에서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났다. 이듬해 11월에는 독일에서 독일제국이 붕괴되고 1920년 바이마르공화국이 출범했다. 특히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1918)과 함께 세계정세의 큰 변화가 예견되고 있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1918년 1월 연두교서에서 새로운 전후 질서의 ‘14개조’(The Fourteen Points) 원칙을 제안했다. 여기에는 민족자결주의와 국제평화유지를 위한 국제연맹의 결성 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민족자결주의(self-determination) 원칙은 식민지배 하에 있던 약소국을 크게 고무하였다. 한국의 지식인들도 민족자결주의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고, 1918년 11월 미국대통령 특사 찰스 크레인(Charles R. Crane)이 중국 상하이를 방문했을 때 여운형은 그를 만나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크레인은 1919년 1월의 파리강화회의(Peace Conference at Paris)에 한국 대표 파견을 권유하고 국내외에서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피력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여운형을 비롯한 장덕수 김규식 서병호 선우혁 신석우 조동호 등은 이를 즉각 실행하기로 합의하고 이를 위한 조직으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만들었다. 이들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송하여 민족의 독립을 호소하였고, 장덕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들과 접촉하여 2.8독립선언을 준비하게 했다. 이에 1919년 2월 8일 400여명의 학생들이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이를 일본 정부와 공공기관 그리고 언론기관에 발송했다. 이 독립선언식의 주도적 인사들이 기독교신자들이었고, 조선기독교청년회(YMCA) 총무 백남훈은 2.8 독립선언 실무를 담당했던 기독교 신자였다.

반면 선우혁(鮮于爀)은 1919년 2월 조선으로 들어와 선천과 평양 정주 등지에서 기독교계의 이승훈 길선주 양전백 등 기독교 지도자들과 접촉하고 파리평화회의 소식을 알리는 한편, 서북지역 개신교세력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이들과 협력하도록 했다. 위의 신한청년당의 7인의 지도적 인사들을 포함하여 삼일운동의 추진 과정에서 활약했던 이들 대부분은 기독교신자였다. 한편 미주의 ‘대한인국민회’도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키로 했는데, 중심인물 이승만 민찬호 정한경 등은 기독교인들이었다. 비록 이들은 일본 영사관의 방해로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하지는 못했으나, 이 소식이 일본의 영자신문에 보도되어 재일 유학생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한편 국내에서도 만세운동이 준비되고 있었는데 종교적으로 두 갈래로 준비되고 있었다.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 천도교측 인사들은 일본유학생들의 독립선언 준비 소식을 접하고, 1919년 1월 중순경 만세시위 형태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했고, 이 운동의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의 3대 원칙을 정했다. 한편 평양의 기독교계는 정주교회 집사 출신으로 상하이 한인교회에서 일하던 선우혁을 통해 상하이에서의 독립운동에 대한 근황을 전해 듣고 1919년 2월 중에 기독교계 학생들과 신자들을 동원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김선두 강규찬 도인권 이덕환 윤원삼 김동원 등 교회 지도자들이 중심이었다. 천도교 측은 독자적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중 손병희 최린을 중심으로 기독교 측의 이승훈 함태영과 접촉하여 운동의 일원화를 협의했다. 2월 24일의 일이었다. 기독교측과 천도교측은 연합하여 1) 독립을 선언하고, 2) 일본 미국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며, 3) 만세시위를 전개한다는 3가지 방식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최린과 함태영은 각각 양측을 대표하여 실무를 협의하였다. 이 때 서울에서는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보성전문학교 강기덕, 조선 YMCA 전국연합회 박희도, 세브란스병원구내 교회 이갑성 등 학생 중심의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들 학생들에게도 참여를 요청하였다. 불교계도 동참케 하여 성사되었으나 유림(儒林)과의 연합은 성사되지 못했다.

운동지도부는 최남선에게 독립선언서를 기초할 것을 요청했다. 최남선은 기독교인이 아니었으나 개신교인들과 교류하며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깊은 지식인이었다. 그가 기초한 선언서 속에 포함된 정의 평등 자유 무저항주의 등은 모두 기독교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후일 말했다고 한다.

또 1919년의 만세운동 추진과정에서, 종교계를 비롯하여 개별적으로 진행되던 독립운동을 결집하기 위해 각 종교계에서 추천한 인물 33인을 독립선언서 서명자로 구성했는데<표1>, 천도교측에서는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최린이 중심이 되어 15인을 선정했고, 기독교측은 26, 27일의 비밀 회합을 거쳐 장로교에서는 정주의 이승훈 김병조 이명룡, 평양의 길선주, 선천의 양전백, 의주의 유여대, 서울의 이갑성 등 7인을, 감리교에서는 평양의 신홍식, 서울의 박희도 이필주 신석구 오화영 김창준, 원산의 정춘수, 해주의 최성모, 그리고 기독신보사의 박동완 등 9인을 선정했다. 100만 명 이상의 신도를 가진 천도교계가 15인을 추천한 반면에, 20만 정도에 불과하던 기독교계 대표 16인을 선정하게 된 것은 독립운동 혹은 민족운동 과정에서 기독교계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었다(처음에는 서명자 대표로 천도교와 기독교가 각 15명씩 총 30명으로 구성하려 했으나 기독교계에서 감리교와 장로교각 각 8명씩 참여하기로 하여 16명으로 늘었고, 불교계에서 2명이 참여하여 33인으로 확정되었다).

인적 구성에서 볼 때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도 15명, 불교도는 2명에 불과했으나 기독교신자는 16명으로 50%를 점하고 있다. 33인을 포함하여 만세운동을 점화한 48인 대표로 볼 때도 기독교 대표는 24인으로 이 경우도 절반인 50%에 해당한다. 기독교는 만세운동 준비단계에서 50%의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민족대표들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고, 부정적인 평가가 없지 않지만, 당시 종교계를 대표했던 인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들은 태화관에 모여 간단한 독립선언 의식만 거행하고 곧 체포되어 그 이상의 역할을 강담하지 못했으나 이들이 만세운동세력을 조직화하고, 자금을 공급하고,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전국적으로 배포하는 등 3.1운동을 선도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기독교인사 16명은, 직업(信級)별로 보면 목사 10명, 장로 2명, 전도사 3명, 집사 1명이었는데 <표2>와 같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대로 3.1운동의 준비단계, 곧 신한청년당의 조직, 도쿄에서의 2.8독립선언, 국내에서의 만세운동 준비 등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는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일반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종언과 러시아 혁명 등 정치적 변화와 더불어 특히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가 삼일운동의 이념적 동기를 부여했다는 점이 강조되어 왔으나 이것이 삼일운동이라는 거국적 시위의 진정한 동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사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유럽에서의 패전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원칙이었을 뿐 한국민족의 독립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민족운동의 주도적 인사들은 이 점을 인식하면서도 이를 조선독립운동의 기회로 잡아 당장 독립을 쟁취하지 못할지라도 독립 쟁취의 기회로 이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삼일운동이 전적으로 민족자결론에 근거하여 발발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삼일운동의 내재적 의의를 격하 시킬 수 있다.

삼일운동의 동기와 시원은 도리어 일제하의 식민지적 상황이라는 내재적인 요인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한말 국권회복운동의 주류를 이루었던 애국계몽운동과 의병 운동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고, 일제의 무단 정치 10년을 통한 민족의식의 성장과 자유와 독립을 향한 국민의식의 성숙이 가져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전국민이 적극적인 호응을 한 것은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 정치와 수탈, 그리고 생존권마저 위협받게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분출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는 천도교 세력과 함께 가장 중요한 종교집단으로 기여하였다. 특히 전국적인 조직망을 가진 기독교회는 선언문의 배포 및 재생산 과정에서 지역거점 혹은 연락망의 역할을 감당했다. 이 점은 초기 만세운동이 거세게 일어난 평양 진남포 선천 의주 안주 원산 등지가 기독교가 강한 지역이고, 이 지역에서 기독교인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기타 지역에서도 지역교회나 선교학교가 독립선언서의 복사와 배포 만세시위의 거점에 되었다. 이 점은 정보의 유통이라는 측면에서 기독교회는 만세운동의 확산에 기여한 것임을 보여준다.

3. 삼일운동의 전개과정

삼일운동의 전개과정은 흔히 2 혹은 3단계로 구분하는데, 제1단계는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이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을 선언하면서 만세운동을 점화한 단계를 의미한다. 이들은 선언식을 마친 후 곧 바로 경찰에 연행되었고 탑골공원에 모인 군중들은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을 갖는데 그쳤고 시위현장에서 대중을 지도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으나 만세운동을 촉발함으로써 주어진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천도교 대표 15, 기독교 대표16, 불교 대표 2인으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은 종교계 대표로 되어 있지만, 실제 한민족의 각계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의 운동 방법은 이전의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서’에서 볼 수 있듯이 폭력이나 혈전을 불사하겠다는 것과는 달리 비폭력 비무장 평화주의를 지향했다. 비폭력적 저항은 소극적 저항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일제의 감시하에 있는 한인으로서는 무기를 얻을 방책도 기회도 없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결국, 민족대표는 제1단계, 곧 거족적인 항일민족운동을 유발시키는 선구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제2단계는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에 이어 3월 중순 거족적 민중운동으로 확산된 단계를 의미한다.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같은 시각 평남의 평양 진남포 안주, 평북의 정주 선천 의주 선천, 함남의 원산 등 주요 도시에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들 지역은 기독교세가 상대적으로 강한 지역이었다. 3월 2일에는 황해의 황주, 평남의 중화 상원 강서 와산, 평북의 선천 가물남, 그리고 함남의 함흥 진남포 안주에서 2차 궐기가 일어났고, 3월 3일에는 경기의 계성, 황해의 수안 봉산 사리원, 평남의 중화, 평북의 의주, 충남의 예산에서, 그리고 상원 평양 선천 의주 함흥에서 2차 궐기가 일어났다. 그 후 전북은 4일 옥천 시위 이후로, 경북은 8일 대구 시위 이후로, 전남은 10일 광주 시위 이후로, 강원은 10일 철원 시위 이후로, 함북은 10일 성진 시위 이후로, 경남은 11일 부산진 시위 이후로 각각 도내 각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제주도에서는 3월 21일 이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래서 만세운동은 3월 10일을 전후하여 남한 각 지역으로 전파된다.

이렇게 볼 때 만세시위는 서울을 비롯한 경기 충남 황해 평남 평북 함남에서는 일찍부터 시위가 일어났으나 그 외 지역은 3월 중순 이후 확산되었는데, 전국적인 파급은 민중의 자발적 운동이나 상경했던 지방인이나 학생들의 귀향을 통한 정보의 교류, 혹은 인근지방 만세운동의 영향이 없지 않았으나 기독교회 조직을 통한 전파가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참여 계층의 폭도 넓어져 청년 학생 교사 등 지식인, 도시노동자 및 상인층에 의해 전국 소도시까지 확산되었고, 학생 교사 종교지도자들만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들 양반 유생, 그리고 천민 기생에 이르기까지 참여하여, 운동의 양상도 계급 혹은 계층간, 종교간 연대가 이루어졌고 시위가 보다 조직화되었다.

제3단계는 3월 하순부터 4월 말까지 시위가 적극화되고 격화된 단계를 의미한다. 4월 10일경에는 일본 본토로부터 증원부대가 파견되어 배치가 완료되었다. 시위가 5일마다 열리는 정기적인 장시(場市)가 시위운동 장소로 활용될 수 있었고, 한말 이래로 설립된 사립학교가 정보의 교환은 물론 학생의 조직화와 동원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전국 규모의 기독교조직은 이 시기에도 만세운동의 동력원이 되었다. 3월 하순 이후 시위가 적극화되고 격화되는 양상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일본 경찰의 폭압적인 시위진압에 대한 일종의 정당방위였다. 만세시위는 4월 10일을 고비로 점차 수그러들게 되지만 5월 말까지 계속된다. 만세시위의 발생 횟수나 참집인원에 대해서는 상이한 통계가 있지만 국사편찬위원회가 집계한 3.1운동의 규모는 아래 <표3>과 같다.

이 표가 보여주듯이 시위회수가 많기로는 경기 황해 경남 평북 순이며, 참여인원은 경기 평북 경남 황해 순이다. 만세운동의 전개과정을 2단계 혹은 3단계 구분하지만 단계적 구분과 상관없이 만세운동은 교통이 편리한 대도시에서 시작하여 중소도시로, 면 사무소 소재지로 그리고 소도시로 전파되었고, 이런 전파과정에서 기독교회 혹은 선교학교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독교 혹은 천도교 세력이 강한 경기 및 서북부 지역이 초기 시위의 중심이 되었고, 박찬승의 지적처럼 서울을 비롯하여 강원도,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함경남도, 함경북도, 충청도와 호남지방과 영남지방에서 만세시위는 기독교와 천도교 조직과 인물이 주도하였고, 평안북도의 경우 기독교와 천도교가 관여하지 않는 시위는 용천에서 일어난 2회의 시위뿐이었다. 전국의 각 지역에서 기독교회나 선교학교는 만세운동의 거점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평안남도, 특히 평양에서의 시위는 3월 1일 기독교세력을 중심으로 시작되었고 이후 각지로 전파되는데, 장로교측은 장대현숭덕학교 교정에서, 감리교측은 남산현교회당에서 거행되었다. 당시 장로교측의 주도적인 인물은 191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한 서문밖교회 김선두 목사와 산정현교회 강규찬 목사였다. 숭실학교 학생이었던 박형룡은 이 집회에 참여하였고 이때의 시위에 대해 증언한 바 있다. 평양교계와 사회에서 지도적 인물로 존경 받던 김선두 목사는 민중을 규합하고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이 일로 검거되었다. 강규찬은 191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산정현교회 목사로서 3.1운동에 앞장서 시위를 이끌었다. 이 때 숭실학교 학생과 교사들이 다수 참여하여 학생들이 투옥되거나 피신하여 1919년 봄 학기 수업이 불가능하여 휴교되었고, 숭실중학교 학생이었던 박형룡도 시위에 참여하여 일주일 간 구류된 바 있다. 숭실대 교수였던 모의리(E. M. Mowry)는 만세시위에 가담한 숭실전문학교 학생 몇을 은익해 준 혐의로 투옥되어 재판에 회부되어 6개월 형을 받았으나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독립선언서의 배포와 만세운동의 전개과정에서도 기독교회가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4. 일제의 탄압과 교회의 피해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일제는 일본내각 총리대신 하라 타카시(原敬)의 “이번 사건은 국내외에 대하여 경미한 문제로 보이게 할 것,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엄중한 조치를 취해 재발되지 않도록 할 것”이라는 지령에 따라 즉각 강력한 진압에 나섰다. 조선 총독 하세가와(長谷川好道, 1850-1924)는 시위가담자에 대한 엄중 처단을 선언하고 발표명령을 하달했다. 비폭력 평화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기로 방침을 세운 것이다. 당시 조선 주둔 일본군은 2개 사단 2만3천여 명에 달했는데, 이 병력으로는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4월에는 본토에서 헌병과 보병부대를 증파했다. 3월 중순 이후 시위운동에 대한 진압이 과격해졌고, 시위 도중 사망자가 크게 늘어났다. 이런 과정에서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이 발생하여 29명이 피살되었다.

삼일운동의 피해상황에 대한 자료를 통해서도 기독교의 관여와 역할을 감지할 수 있다. 삼일운동 피해상황에 대한 몇 가지 통계가 있으나 신뢰성 때문에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는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1919년 3월 1일부터 5월말까지 3개월 간 독립시위에 참가한 인원은 2,023,098명, 피검자 46,948명,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가옥파괴 715동, 교회당 파괴 47개소였다. 당시 기독교 인구는 20만에서 22만 정도로 전 인구의 1-1.5%로 간주되는데, 1919년 4월말까지 투옥된 기독교인은 2,120명으로 불교 천도교 유교도의 총수 1,556명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이런 점은 기독교인들이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른 통계도 이점을 반영한다. 일본측 자료인 朝鮮總督府 官房 調査課 편, 『朝鮮の獨立思想及運動』에서는 피검자는 19,525명인데, 직업별로 보면 농업이 55.3%, 학생 9.9%, 상업 8.3%, 무직(다수의 여자가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보임) 5.8%, 노비 및 날품팔이 3.8%, 각종 기술자 3.1%순으로 나와 있다. 연령별로는 20세까지가 23.1%, 21-30세가 37.4%, 31-40세가 23.1%, 41-50세가 13.9%, 51-60세가 7.3%, 60세 이상이 3.2%로 되어 있다. 특히 종교별로는 기독교 신자는 3,373명(천주교인 55명)으로 17.7%, 천도교도는 2,283명으로 11.7%였고, 유교 1.8%, 불교 1.1% 순이고 나머지 47.6%는 무종교였다. 개신교 피소자 가운데 244명은 목회자였다. 당시 기독교 신자는 천도교인의 5분지 1에 불과했으나 피체된 종교인의 60%이상을 차지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여성 피소자 가운데 기독교인이 471명으로 전체의 65.6%를 차지했다. 이들 여성은 대부분이 기독교 학교 교사나 학생, 전도부인들이었다. 이들 다수의 기독교신앙을 가진 여성들이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기독교회의 여성교육과 그 결과로 근대적 민주의식을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 한 가지 사례가 부산에서 일어난 최초의 만세운동이 일신여학교 교사와 학생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간행한 『일제침략 하 한국 36년사』에는 만세운동에 참여한 이들에 대한 직업 혹은 계층별 통계가 나와 있는데, 농민 58%, 지식인 21%, 상인 11%, 자본가 3%, 노동자 4% 기타 3%였다. 종교별로는 기독교(개신교) 22%, 천도교 15%, 기타종교 2%, 무종교 61%로 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기독교는 타 종교보다 월등하게 만세운동에 가담했음을 보여주고 있고, 만세운동의 준비단계, 거사 실행단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피해 또한 컸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은 1919년 10월 4일 평양서문밖교회에서 회집한 장로교 제8회 총회에 보고된 12개 노회의 ‘노회상황보고’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총회록(1919)에는 각 노회 상황보고가 수록되어 있는데, ‘특별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삼일운동과 관련된 노회 휘하의 교회와 기관의 피해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남한 지역 노회들도 피해를 입었지만 이북, 특히 서북지방 노회의 피해가 훨씬 심각했다.

함남노회는, “성진 함흥 원산 세 구역 교회 남녀 교우가 만세사건을 인하여 시험당한 자와 고생한자와 미죄히 피착(被捉)되었다가 몽방(蒙放)된 자와 애매히 악형 받은 자 많사오니”라고 한 후 피해 상황을 유형별로 소개하고 있다. 또 “각 학교는 독립만세 사건으로 몇 달 동안 휴학하였다가 지금은 다시 개학하였사오며”라고 보고하고 있다. 교회당 피해에 대해서도 보고하고 있는데, “차호예배당은 훼파를 당하였다가 벌금 500원을 받아 중수하였사오며, 단천읍 교인은 무한한 고난을 받는 중 예배당은 억지로 빼앗아 몇 달 동안 학교로 소용한 일이 있사옵나이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또 함북노회의 피해 상황 보고는 다음과 같다.

“금년 봄 독립만세사건으로 교인 중에 총과 창에 별세한 이가 9인인데, 그중 교사와 학생들이 있고, 중상자가 10여인이요, 일 년 반 이하 징역으로 선고를 받아 복무 중에 있는 이와 금옥(禁獄) 중에 있는 이가 30인인데, 그 중 명동 김약연 장로는 국자가에, 회령 최경재 장로는 청진 감옥에 있사옵고, 청진 집사 윤병후, 우석구 씨도 청진에서 현금 복무 중이요, 경흥 군 내 김뎡원은 회령학교 여교사로 청진에서 복무 중이요, 얼마동안 감금되었다가 태형을 받고 노인 자가 용정, 회령, 청진 등지에서 여러 사람이요 설유(說諭)만 받고 노인자도 경흥, 경셩, 청진, 회령, 용정, 두도구, 국자가 등지에 백명 가량 되오며, 교회 직원 급 신도와 학교 임원급 교사가 사처로 해산되어서 정지된 학교와 퇴보된 교회는 많사온데, 그 중 명동 남중학교와 남녀 소학교는 아직 폐문 중에 있사옵고...”

황해노회의 피해는 보다 심각했다. 80여명이 태형(笞刑)을 받았고, 17세의 학생이 가혹한 고문으로 죽음에 이르렀음을 보고하고 있다.

“독립사건으로 인하여 교회가 피해된 현황을 조사한바 태형 받은 자가 80인 중에 장로 3인, 조사 2인, 영수 3인, 집사 16인, 남교원 2인, 여교원 1인, 남교인 50인, 여교인 4인이오며, 6개월부터 이년 이상까지 처역(處役)된 이가 85인 중에 장로 5인, 조사 5인, 영수 6인, 집사 13인, 남교원 12인, 여교원 1인, 남교인 42인 중에 17세 된 학생 윤택(?)진은 평양감옥에서 치명(致命)되었사오며, 여교인 5인이오며, 미결수가 27명 중에 목사 1인, 조사 1인, 장로3인, 영수 4인, 남교원 3인, 남교인 15인이오며, 총 맞은 이가 10인 중에 사망자가 집사 4인, 부상자가 6인이오며, 별 형벌 받은 이가 9인이오며, 욕만 보고 백방(白放)된 자가 남녀 합 112인이오며, 피착시 수용자가 남녀 합 50인이오며, 심문시 수욕자 128인이오며, 몇 주일씩 예배 못 본 교회도 있사오며, 여성경학교는 공부 중 지식(止息)힘을 당하였사오며, 이상 사건으로 인하여 허위(虛位)된 교회 안악 신천 지경 16개 소를 위하여 노회 당석에서 180여원 연보금으로 조사 2인을 택하여 6개월 간 시무케 하였사오며,..”

황해도와 평안도에 산재한 노회의 피해가 가장 심했는데, 평양을 비롯한 인근 지역을 관장하던 평남노회의 피해상황은 심각했고, 교회의 피해 상황에 대한 기록도 보다 상세하다. 자세한 피해 상황은 별지로 첨부되어 있어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금반 독립만세 사(事)로 각 교회가 비상한 환란을 당한바 예배당에 모이기를 금함으로 얼마동안 회집치 못한 교회도 있고 병정과 경관의 손에 모든 기구의 파상된 손해도 많사옵고, 감옥에 갇혀 있는 수는 208인이오 감옥에서 90도 태형 맞은 이는 47인이요, 경찰서에서나 주제소에서 29도 퇴벌 당한 이는 68인이요, 속박에서 놓인 이는 7인이요, 총과 칼에 상한이나 난당으로 악형을 당한 이는 80인이요, 총에나 나무에 상하여 죽은 이는 12인이온데, 이러한 사람의 시명(示命)과 사실상 참혹한 정형(情形)은 대강 별지에 첨부함,”

삼일운동에 대한 평남노회의 보고는 3월 1일부터 6월 12일까지의 피해상황에 대한 보고인데, 평양서면시찰지경, 대동남중화서시찰 지경, 평양동면시찰 지경, 평양부시찰지경, 덕천 영원맹산시찰 지경, 강동 셩천 순천 시찰 지경, 안주시찰 지경, 중화동명시찰지경, 황주시찰 지경, 수안곡산시찰 지경 등 10개 시찰 지역별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평북노회의 보고는 태형 및 구류된 자가 500여 명에 이르고, 교회 및 선교학교가 소화되었음을 보고하고 있고, 경남노회는 총살자 옥사자 및 16의 여학생도 복역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고, 칠원읍교회의 경우 제직전원이 복역 중이라고 보고했다. 경북노회의 보고와 경충노회 또한 교회 지도자들의 피살 혹은 복역을 기록하고 있다. 의산노회는 교인 4사람이 피살되고 교회당이 소화되는 등 구류와 태형 당한 자가 심히 많다고 보고하고 있다. 전북노회와 전남노회의 보고도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의 피해 상황을 보여준다.

산서노회의 보고는 보다 구체적이다. 교회 조사를 총살하고, 어린 중학생이 태형 90도를 맞고 사망한 사건, 부녀와 유아들에 대한 무차별 난타, 그리고 예배를 방해한 일 등에 대해 보고했다.

“독립만세운동에 대하여. 강계읍교회 조사 사병준 씨와 한시원 씨는 당장에 총살이 되었고, 중학생 탁창국 김명하 양인은 의주 감옥에서 태 90도씩 맞고 선천읍 미동병원에서 장독(杖毒)으로 사형을 당하옵고, 조사 김창욱 중학생 최중원 김우식 김성길 4인은 신의주 감옥에 구류하였다가 태 90도씩 맞고 방한이오며, 장로 명운행 최광혜 양인과 집사 한봉민 지병순 김룡준 강학수 4인은 평양감옥에서 복역하는 중이오며, 조사 김경하 집사 긴관순 양인은 평양 감옥에서 병이 나서 보석 치료 중이옵고, 영수 김태희 씨는 태 29도를 맞고 중학생 강성문도 태 29대를 맞고, 영수 김병하 씨는 10일 규류를 당하고, 여교우 10인도 10일 간 구류를 당하였다가 방한되었사오며, 강계음교회당 종(鐘)은 만세운동을 시작한고로 지금까지 그 종을 치지 못하오며, 초산읍교회 목사 송윤단 씨도 평양감옥에서 방금 복역 중이오며, 장로 안성준 양익준 양씨와 교인 도태영 이의겸 4인은 신의주 감옥에서 태 90도씩 맞고 방한되었사오며 본분대에서 태형을 당한 자 40여 인이요, 5일 동안 구류를 당한 여교우도 40여인이오며, 장성군 중강교회 영수 이재영 김인형 조사 김종선 3인은 평양감옥에서 방금 복역 중이오며, 교인 김응식 김응현 김용삼 3인은 신의주 감옥에서 태 90대를 맞고 방한이오며, 집사 최용환 교인 강은태 양인은 2일간 규류를 당하였사오며, 예배당에 모이는 것을 금함으로 2개월 동안 예배를 못 보았사오며, 자성읍교회에서 소학생 2인도 여러날 동안 구류를 당하였사오며 서간도 왕청문 시푸교회에서 교인 15인을 15일 동안 감옥에 구류하였다가 방한이옵고, 또한 군인이 부녀와 유아들을 무수히 난타한 일도 있었사오며, 광청누 두거우교회에서 교인들이 예배당에 들어와 공연이 도벽(塗壁)하는 사람을 난타한 일과, 예배당에서 예배 보지 못하게 하는 고로 일주일 간 예배를 보지 못한 일도 있사오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8회 회록』, 117-118).

이런 보고가 보여주듯이 1910년 10월 4일 장로교 총회가 개최되었을 당시까지도 교회 지도자들의 피살 혹은 구금, 교회당의 파괴 등으로 교회 운영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총회장이었던 김선두 목사는 투옥 중에 있어 총회에 참석하지 못했고 부총회장인 마포삼열 목사가 개회 예배를 인도했다. 이때까지 수감된 교인은 1,642명이었고,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자가 2,162명, 사살되거나 맞아 죽은 사람이 47명, 교회당 파괴 12개 처였다. 이것은 공식적인 집계였음으로 실제 피해는 이 보다 더 컸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교회와 교회기관, 지도자와 교인들의 피해상황에 대한 기록은 한국교회, 특히 한국의 장로교회가 만세운동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가에 대한 사실적인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의 자료를 통해서도 체포된 신자가 3,804명이었고, 체포된 목사 장로는 134명, 기독교관계 지도자는 202명에 달한다는 기록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정보를 종합해 볼 때, 전 인구의 1-1.5%에 불과했던 기독교회가 삼일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음을 알 수 있다.

5. 주한 선교사들과 삼일운동

삼일운동 당시(1919.4) 국내에는 387명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그해 말에는 로마 가톨릭의 54명의 선교사를 포함하여 433명의 외국인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나, 심정적 동조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중립적 입장을 취했다. 감리교의 웰치(Herbert Welch) 감독이나 스미스(Frank Herron Smith) 선교사 같은 일본에 동정적인 친일적 인사들이 없지 않았으나, 피선교지에서의 정치적 중립은 정교분리론에 익숙한 선교사들의 일반적 처신이었다. 이런 점은 1901년 장로교공의회에서 확인된 바 있다. 따라서 주한 선교사들은 매쿤(George S. McCune)이나 모우리(E. M. Mowry)의 경우처럼 만세시위자들을 숨겨주거나 보호해 준 일은 있으나, 만세운동에 직접적으로 관계하거나 가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건 발생 후 일제의 폭력이 심해지자 이에 의분하였고 조선에서 발생한 독립운동을 해외로 전파하여 국제여론 형상에 기여하였다. 선교사들이 ‘중립’의 경계를 넘게 만든 것은 그들이 목격한 만행이었다. 날조된 105인 사건 이후 선교사들은 “만행 앞에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No neutrality for brutality)”고 인식했고, 제암리학살 사건에서 이런 인식은 심화된다.

도날드 클락은 삼일운동에 대한 선교사들의 태도 혹은 관여를, 가담자들에 대한 보호(sheltering), 부상자에 대한 치료(treating the wounded), 제암리학살사건에 대한 조사(investigating the Che'am-ni massacre), 영사관 및 본국 위정자들을 통한 항의(protests to Consuls and constituencies at home), 그리고 여론형성을 통한 항의(protests in the press) 등 5가지 유형으로 정리한 바 있는데, 가장 중요한 활동이 언론을 통한 일제의 만행에 대한 고발이었다.

만세운동에 대한 정보의 해외 유출은 크게 3가지 통로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나 ‘AP통신’ 혹은 ‘재팬 어드버타이저’(The Japan Advertiser) 같은 언론기관을 통해서였다. 둘째는 서울주재 미국총영사나 영국 혹은 프랑스 영사관 등 재한(在韓) 해외공관을 통해서였다. 세 번째 통로가 주한 선교사들을 통한 유출이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사신이나 공식적인 보고서를 통해 조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만세운동에 대해 본국교회에 보고하였고, 안식년이나 기타 이유로 본국으로 돌아간 선교사들을 통해 식민지배 하에서의 조선에서의 정치적 상황은 구미 사회에 공표되었다. 이런 일련의 활동은 일본의 폭압적인 식민지배와 조선의 독립에 대한 국제적 여론형성에 기여하게 된 것이다.

1919년 4월 초 장로교의 어드만(W.C.Erdman), 홀드크로프트(J.G.Holdcroft), 감리교의 웰치(H.Welch) 등 선교사 대표들은 일본 주제 미국 대사 모리스(R.S.Morris)에게 조선의 현실에 대해 보고하고 도움을 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이를 북장로교선교부 총무 브라운(A.J.Brown)에게 보고하여 여론을 환기 시켰다. 특히 제암리학살사건이 발생하자 선교사들은 조선에서의 일제의 폭압적인 학살에 대해 심각하게 인식했다.

제암리 학살현장을 처음 방문한 선교사는 원한경(H.H.Underwood)이었다. 학살사건 발생 다음날인 4월 16일 원한경은 미국 영사 커티스(Raymond Curtice), AP통신의 서울특파원 테일러(A.W.Taylor)와 함께 학살 현장을 방문하고 타이프지 7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작성하였는데, 커티스 영사의 보고서에 첨부되어 미국무성에 보고되었고, 동일한 보고서가 미국북장로교해외선교부에도 보고되었다. 또 이 보고서는 일본영자신문 재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에도 보도되었다. 특히 스코필드(Dr Frank W. Schofield)의 현장답사와 학살 현장에 대한 사진은 구미 사회에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4월 18일 제암리를 방문했던 스코필드는 “수촌리에서의 잔악한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였다. 특히 이 글에서, 조선에 주둔한 지 얼마 안 되어 현지 사정에 익숙지 못한 일부의 군인이 흥분한 상태에서 일으킨 ‘우발적인’ 사건이라는 일본 측의 주장은 거짓이라고 지적했다. 신용하에 의하면 평안남도 강서(江西)의 옥천(沃川)과 원장(院場) 양 교회 교인을 중심으로 49명이 사망하고 50명이 부상당한 강서학살 사건, 평안남도 맹산(孟山)에서 기독교인 60여명을 학살한 맹사학살 사건 등 이와 유사한 사건이 1919년 3월과 4월 여러 곳에서 발생했으므로 학살 사건은 제암리에서의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스코필드의 보고서는 후에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able Fire)’이란 소책자로 편집되어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원문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4월 19일에는 영국 영사와 함께 하디(R. Hardie), 게일(J. Gale), 노블(Noble), 케이블(Cable), 빌링즈(Billings), 베크(Beck), 헤론 스미스(Herron Smith) 등이 현장을 방문하였고, 그 외 30여 명의 주한 선교사들의 일제의 만행에 대한 보고는 미국기독교연합회 동양문제연구회(The Commission on Relations with Orient of the Feder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America)에 의해 취합되어 『한국의 상황』(The Korean Situation, 1919) 이라는 보고서로 출판되었다. 이 보고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3월초(1919)에 들어서자 상해와 천진에서부터 조선에 전국적인 독립운동이 폭발하고 일본 정부는 여기 대하여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잔인하게 억압한다는 전문이 전달되기 시작했다. 4월에 들어서서 긴 서신이 도착하기 시작하자 전문의 내용들이 사실이라는 것이 입증되기 시작했다. 몇 가지 구체적인 내용들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이들 서신과 보고서들은 대게 간접적인 통신을 통해서 입수되었다. 물론 엄격한 검열을 피하고 또 직접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해외선교본부의 간사들에게 보내주기 위해서였다. 선교사들이 개인적으로 친지나 가족들에게 보낸 서신의 사본들도 이 선교본부들의 간사들 손에 입수되었다. 미국 내 모든 인사들은 지금 야만적이고도 비인도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무자비하게 희생을 당하고 있는 한국인들을 구해 낼 무슨 대책을 마련하라고 호소하고 있다.

한국에 있는 선교사들을 통해 조선의 독립운동에 대한 실상과 일제의 만행에 대한 정보를 수득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한국의 상황』이라는 긴 보고서 서문은 이 점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또 이 보고서의 출판 의도를 밝히고 있다.

다음의 문서들은 철두철미 신뢰할만한 것이라는 점을 본 위원회는 확신한다. 한국에 있는 영미인 30명 이상이 이 글의 출판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이 문서는 조심스럽게 마련한 보고문이며, 어떤 것은 사사로운 편지요, 어떤 것은 목격한 자의 증언이다. 만일 취합한 자료를 다 출판한다면 천 쪽이 훨씬 넘었을 것이다. 보고문 중 어떤 것은 촘촘히 쓴 114매나 된다. ... 이 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이 자료들을 세상에 공표한다. 첫째, 한국인을 모든 비인도적 학대와 불의에서 보호하고, 둘째, 미국 내에서 건전한 여론을 형성하여 일본 내에서 한국에 대한 정의와 공정한 대립을 하도록 노력하고 있는 진취적이고 반군사적인 운동을 강화시키려는 데 있다.

주한 선교사들은 독립운동 혹은 만세운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으나, 만세운동에 대한 실상과 일제의 만행을 고발함으로서 한국의 독립에 대한 국제적 여론 형성에 기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대구나 부산과 경남지방에서 활동했던 호주 선교사들의 경우도 동일했다. 3월 11일 부산진 일신여학교에서 부산지방 최초의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일신여학교 교장이었던 마가렛 데이비스(Margaret Davies)와 동료교사였던 호킹(D. Hocking)은 학생 시위 배우 조정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풀려났다. 이 사실이 호주 교계에 보고되면서 한국에서의 독립운동에 대한 사실이 호주사회에 보고되기 시작했다.

스코필드는 일본의 무자비한 만행을 폭로했을 뿐만 아니라, 수감자들이 고문을 당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형무소를 방문한 바 있다. 특히 세브란스병원 간호사 노순경 면회를 기회로 서대문형무소 8호실에 수감된 노순경과 유관순 어윤희, 이애주를 면회하여 실상을 파악하였고, 우선 유치장에서 조선인과 일본인 간의 차별을 철폐해 주도록 요구하였다. 또 스코필드는 1919년 9월 일본에서 극동지역 선교사 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한국에서의 만세운동과 일경의 만행에 대해 고발하고 하라 다카시(原敬) 총리대신 등 일본정부 지도자들을 만나 일본의 비인도적 처사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한 바 있다. 조선총독부 내무 침 경무 국장을 역임하고 경시총감으로 일했던 아카이케 아츠시(赤池 濃, 1879-1945)는 스코필드가 일했던 세브란스병원을 ‘배일의 소굴’로, 스코필드를 ‘배일사상의 중심인물’로 간주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이런 일련의 반일 활동으로 스코필드는 1920년 4월 11일 한국을 떠나야 했다. 그는 미국에서도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기는 흔히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기도 한다. 그가 한국에서의 공창제도 폐지론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린튼가의 제2대 선교사 윌리엄 린튼(William Alderman Linton, 1891-1960) 또한 조선의 현실과 일제의 만행을 고발한 인물이었다. 1919년 3.1만세운동을 목격했던 그는 첫 안식년으로 본국으로 돌아갔고 그해 8월 애틀란타에서 열린 남부지역 평신도 대회에서 3.1운동의 실상을 보고하며 평화적 시위가 일제의 만행으로 좌절되었음을 말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도 했다.

일본은 10년 동안 조직적인 방법으로 5천 년 간 존재해 온 한국인의 민족적 정체성과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려 합니다. ... 삼일운동은 비폭력적 항거였습니다. 감옥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많은 군중으로 가득 찼고, 일본은 행진하는 사람들을 기병대의 말발굽으로 짖밟았습니다. ... 총검으로 찔렀습니다. 한국인은 평화로운 방법으로,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시위로 세계를 향해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는 애틀란타 신문에도 3.1 만세운동에 대한 기사를 송고하고 민주주의와 독립 국가를 염원하는 한국인들의 마음과 그것을 위해 주변국가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이 일로 그는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그런가하면 1920년 5월, 사무엘 마펫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북장로교 총회에서 조선에서의 비폭력적인 독립운동과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대해 보고하면서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다.

1892년 내한하여 1934년 한국에서 은퇴할 때까지 42년간 일했던 매티 노블의 일기(The Journals of Mattie Wilcox Noble), 특히 1919년 3월 1일부터 5월 15일까지 삼일운동이 적극적으로 전개되던 약 3개월 간의 일기는 삼일만세운동의 실상과 일제의 만행, 그리고 선교사들의 역할 혹은 활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이 ‘역사적’ 기록 자체만으로도 이 일기는 소중한 기여가 아닐 수 없다.

6. 종합과 결론: 기독교는 어떻게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었을까?

이상에서 삼일운동의 배경과 동기, 시위 및 전개과정에서의 기독교의 참여와 역할이 어떠했던가에 대해 고찰하였다. 중국에서의 만세운동 준비를 위한 신한청년단의 조직, 국내의 서울과 평양에서의 독립운동을 위한 조직, 일본에서의 2.8 독립선언 등은 기독교인 중심이었고, 천도교와의 합작이나 민족대표 33인, 혹은 48인의 구성에서도 기독교는 인적 구성에서 50%의 역할을 감당했다. 또 삼일운동의 거사 및 전국적 전개과정에서도 기독교회와 선교학교는 만세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감당했다. 3월 1일의 만세운동의 경우, 서울 이외의 8개 지역은 전부 기독교계 중심이었고, 평양과 의주 만세시위의 주동자는 김선두 강규찬 유여대 등 목사들이었다. 또 만세운동 초기의 1,200여회의 시위 중 주동세력이 뚜렷한 340회를 지역별로 정리하면 311개 지역이 되는데, 이중 기독교가 주도한 지역은 78개 지역이었으나 천도교가 주도한 지역 66개 지역이었고, 42개 지역은 기독교와 천도교가 공동으로 주도한 지역이었다. 이 점은 삼일운동의 전개 과정에서도 다수 지역에서 기독교회나 선교학교가 주도적 역할을 했음을 보여 준다. 당시 기독교 인구는 20-22만으로 전 국민의 1-1.5%에 불과했으나 신도 100만 이상의 천도교 보다 더 많은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기독교회나 선교학교가 없는 지역에서는 천도교와 협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회가 삼일운동의 준비 동원 거사 등 전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고, 기독교권의 참여가 없었다면 삼일운동은 사실상 전 민족적 운동으로 전개되지 못했을 것이다.

삼일운동의 발발 배경에는 1910년대의 국제정치질서의 변화, 곧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만세운동의 전국적 혹은 거국적 전개는 내부적 요인, 곧 1910년 이래의 무단통치와 식민지배에 대한 거부, 민족의식의 형성 등 내부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민족대표 33인은 만세운동을 선도하고 촉발시켰다는 점에서 제한적 역할을 감당했다고 볼 수 있고, 운동의 전국적 전개에는 종교적으로 볼 때 기독교계와 천도교계가 지도적 역할을 감당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신앙이라는 연대로 맺어진 전국 규모의 교회조직과 통신망은 만세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기독교계의 만세운동에 대한 관여 혹은 참여는 ‘기독교회’라는 교단적 합의나 결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개인의 결단에 의한 참여였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사이에 경계를 지키면서도 그리스도인의 민족적 혹은 사회적 책임을 실현하려는 의지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은, 삼일운동에 대한 기독교권의 적극적 참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킨 요인이 무엇일까? 적어도 3가지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폭압적인 식민통치에 대한 반발이었다. 1910년 이래 10여 년 간의 식민통치에 대한 경험적 현실이 시민적 저항을 불러일으킨 배경이 된다. 1876년 운양호 사건을 계기로 강화도 조약을 채결한 이래 일제는 점진적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임오군란(1882)을 계기로 일본군의 조선 주둔권을 획득하고 청일전쟁(1894-5)으로 청나라 세력을, 러일전쟁(1894-5)으로 러시아 세력을 물리치고 1905년 11월에는 을사조약을 채결하고 외교권을 강탈하고, 이듬해 2월 통감부를 설치하고, 행정권 사법권 경찰권을 강탈하고, 1907년에는 조선 군대를 해산했다. 헤이그밀사사건의 책임을 묻는 형식으로 고종을 폐위하고 1910년 8월 합방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을 강탈하여 1392년 창건된 조선왕조는 27대 순종을 끝으로 518년의 역사를 마감하게 된다. 통감부는 총독부로 승격되고, 3대 통감 데라우찌가 초대 총독으로 취임하여 입법 사법 행정 및 군사에 대한 전권을 행사하며 무단정치를 감행했다. 집회 취체령 공포하여 모든 사회단체를 해산하고, 헌병과 경찰제도를 일원화하여 조선주차헌병조례를 발표했다(1911. 9). 1911년 당시 헌병대 935개 처, 7749명의 헌병, 경찰관서 677, 경찰수 6,222명에 달했다.

1910년 12월에는 ‘범죄즉결례’을 공표한 이래 4대 악법으로 불리는 ‘경찰법처벌규칙’ ‘조선태형령’ ‘민사소송조정령’을 바탕으로 폭압정치를 강화하였고, 토지조사사업(1910.3-1918.11)을 실시하여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아 경제구조를 식민지 수탈구조로 재편했다. 또 회사령(1910) 어업령(1911) 광업령(1915)을 공포하여 민족 자본 발전을 방해하고, 조선교육령 사립학교규칙(1911) 개정 사립학교 규칙(1915)을 제정하여 민족교육 혹은 종교교육을 봉쇄했다. 이와 같은 폭압적인 무단정치 10년이 조선민족의 생존에 위협했다. 자본가 농민 노동자 등 사회 구성원 각계각층이 식민통치의 피해를 입음으로 그들의 정치의식과 사회의식이 높아졌고, 지식인 종교인들이에 대한 반발이 거국적인 만세운동의 동기가 된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땅에 사는 시민으로서 시민적 각성에서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둘째, 기독교계의 민족의식 혹은 민족운동 전통은 3.1운동에의 적극적인 참여의 동기였다. 한국교회는 1900년대 이후의 역사적 환경 때문에 민족의 현실과 함께하는 교회였고, 반일(反日) 충군애국적(忠君愛國的)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민족독립운동에 무심하지 않았다. 안악사건에 이어 105인 사건은 한국기독교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바로 이점 때문에 일제는 105인 사건을 조작하고 서북지방 중심의 한국기독교의 민족운동을 차단하고자 했다. 기독교인들을 반일세력으로, 선교사들은 반일적 기독교의 배후세력으로 간주하여 고문과 거짓증거로 사건화 했다. 그런데 민족대표 33인 중 장로교 대표 이승훈 양전백 이명룡은 105인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이들이 다시 3.1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105인 사건으로 기소되었던 이들 다수가 3.1운동에도 앞장섰다는 사실은 3.1운동은 105인 사건 연루자들의 민족운동의 연장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민족운동의 전통이 만세운동에 대한 한국교회의 적극적인 참여의 배경이 된다.

아시아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이 기독교 국가의 식민지배 하에 있었던 사례와는 달리 한국은 비(非) 혹은 반(反) 기독교 국가인 일본의 식민 통치 하에 있었고, 한국에서의 기독교와 민족주의는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기독교적 민족주의’(Christian nationalism)를 형성하게 된다. 김세윤 교수는 이를 “기독교와 민족주의의 결혼”이라고 불렀다. 바로 이런 특수한 상황이 한국교회의 민족 혹은 독립운동에의 적극적 참여의 배경이 된 것이다.

셋째, 기독교 신앙과 신교(信敎) 자유에 대한 탄압이 저항이 이유였고, 식민지배에 대한 거부운동을 통해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기독교는 일제 통치기간 중 가장 강력한 종교였고 한국사회와 국가, 그리고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 당시 조선의 기독교회는 20만의 신도와 3백 개 이상의 학교, 3만이 넘는 학생, 1,900여개의 집회소, 외국인 선교사 270여명, 조선인 교직자 2천 3백여 명을 거느린 무시할 수 없는 집단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밖에도 많은 병원과 자선기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앙이라는 견고한 유대로 결합되어 있었고, 외국인 선교를 통해 세계 여론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처음부터 한국 기독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조선통치에 이용하든지 아니면 한국 기독교를 탄압하여 그 영향력을 약화시키든지 양자택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회유정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일제는 한국기독교 탄압과 분열을 시도하여 각종 제재를 가했다. 종교활동을 규제하려는 ‘포교규칙(布敎規則, 1915)’은 첫 법적 규제였다. 이후 기독교교육을 통제하기 위해 ‘사립하교 규칙’을 재정하거나(1911), 개정하고(1915), 안악사건이나 105인 사건을 통해 기독교를 탄압했다. 안창호가 기독교계 인사들 중심으로 조직한 신민회(新民會)도 105인 사건으로 해체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심리적 저항은 만세운동을 통해 표출된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독립운동을 통해 신앙의 자유, 신교의 자유를 누리며 자유와 공의 등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고자했던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 이유가 어우러진 상호연쇄는 상당한 저항의 힘이었고 기독교계의 적극적 참여를 가져온 배경이 된다. 비록 기독교의 지도적 인물 가운데 일부가 후일 훼절하고 친일의 길을 간 경우가 없지 않으나, 이점을 이유로 삼일운동에 기여한 한국교회의 역할마저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정당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고려할 점은 식민지배에 대한 기독교계의 저항, 삼일운동에 있어서의 기독교권의 참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만열은 한국교회의 참여가 교단적 차원이 아니었다는 점을 유감으로 여기고 있으나, 삼일운동에 참여했던 교계 인사들은 소속 교파 혹은 교단을 대표하는 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단적 차원의 참여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리스도인 개인으로 참여한 일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개인적 참여를 두고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행동인가에 대해 고심했던 신석구, 혹은 길선주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교파 혹은 교단 조직체로서의 기독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언제 어떤 경우에 국가권력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가? 서구기독교 전통에서의 저항권 사상을 한국의 교회는 언제부터 인식하게 되었을까? 이런 문제가 토론의 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이상규 교수가 지난 2019년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총무단 세미나에서 특강한 자료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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