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내의 이성과 도덕성의 위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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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숙 목사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이성이 주 안에서 거듭난 영성에 속하느냐 하는 것이다. 동양적 범신론적 이성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부인하고 신과 자연을 동일시 하지만 이들의 사고가 정통 보수 기독교 신학사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바도 많이 있다.

범신론은 비인격적 신성(神性)에 대한 개념을 단편적인 것이 아닌 모든 것을 포용하는 총체적 개념으로 보여주고(all embracing view of total reality) 일치와 조화를 강조하는 강점이 있다.

이들은 신(神)에 대한 생각을 사람의 사고와 언어로 제한하지 않으면서 자기라는 자아에 대한 의식을 지워나감으로써(by way of negation) 신(神)을 깨닫게 하는 방법 등을 탐구했다.

또한 과거 보수 신학이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위임명령(창1:28)으로 지구의 생태계를 파괴해 온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들은 지구를 신성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지구를 보존하고 극진히 돌보는 사회생태학(ecology)에 큰 관심을 가지게 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한편 문제점을 살펴보면, 범신론의 이론상의 큰 문제는 선과 악에 대한 구분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신(神)은 모든 것의 근원이면서 모든 것을 초월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이 모든 것 안에는 선과 악의 구분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의 속성이 선악의 구분을 초월한다면 이 세상에 선악에 대한 정의나 구분이 모호하게 되어 신에게는 선한 것도 없고 악한 것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올과 같은 이가 노자에 대해 말할 때 선악의 개념을 미추의 개념으로 치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게끔 되는 것이다.

선악도 미추처럼 시간과 문화에 따라 변화하는 얼마든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고 과정적인 개념이란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엔 ‘죄’란 개념이나 용어 자체가 발붙일 틈이란 없는 셈이다. 이 시대에 이런 류의 ‘죄’에 대한 인식은 기독교계 안에서도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가고 있는 추세이다.

요새 기독교계 안에서 동성애 옹호론을 드세게 외치는 이들이 그 이론적 배경으로 근거를 삼는 것이 김근주 교수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란 책같다. 또 동성애를 페미니즘과 빗대어 저들이 반동성애 진영을 질타하는데 사용하는 “배제와 혐오의 대상”이란 상투적인 표현도 단골로 등장한다.

그러면 “동성애는 죄지만 사람은 사랑한다”라는 제하의 지난 김 교수의 인터뷰 기사에 실린(뉴스앤조이 2020.01.17) 동성 성행위 구절 분석에 대한 내용을 보자. 여기서 성경이 문자적으로 명시하고 있는 ‘동성애의 죄’를 김 교수는 ‘욕망의 극대화’란 의미로 일반화시키는 해석을 적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 시대에 우리가 만나는 게이나 레즈비언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어느 순간 남과 다르다는 걸 발견하고, 결국에는 자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말고는 길이 없는 성소수자들에게 이 본문을 적용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또, “지금 우리가 만나는 게이들은 못된 마음으로 '난 남자랑 성관계할래’ 하는 사람들인가. 아니다. 어쩔 줄 몰라 괴로워하다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 사람들이다. 심지어 내가 만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구주로 고백하고 말씀대로 살아가고 싶은데, 성경은 동성애를 금지하는 듯해서 ‘내가 죄인인 건가’, ‘내가 틀린 건가’ 힘들어하는 사람들이었다”라고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동성애 옹호를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안타까운 부분들이 많다. 예를 들어 “어느 순간… 발견하고”라든지 “말고는 길이 없는”, 또 “어쩔줄 몰라 괴로워하다가”, “내가 틀린 건가” 하는 내용들이다. 왜냐하면 무릇 죄란 오랜 세월 다양한 요인에 의해 내면에 적체된 것들이 찰라적 심리적인 요인에 의해 발아되고 쑥쑥 자라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전문적인 통찰이 결여되면 김 교수뿐만 아니라 누구나 죄의 문제를 개인적이고 내적인 차원에서 보다는 사회적이고 집단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 요즈음의 추세를 따라가기가 쉬울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서, “죄는 관계의 파괴라고 했다. 그런데 성소수자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며 둘이 사랑하는 동안 무슨 관계를 파괴했나? 동성애는 존재이지 행위가 아니다. 그 간음한 여인은 '행위'가 있다. 같은 선에 올려놓고 볼 수 없다”라고 주장한다. 김 교수는 여전히 죄가 가지고 있는 내적인 힘이나 고유의 특성, 지배력을 간과한 채, 개인의 잘못된 행위 같은 외부적이고 구체적 사실에서만 죄성을 찾으려 한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간음에 대해 이 같이 말씀하셨을까?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7-28)”

인간의 행위는 생각의 산물이며 우리의 생각은 또한 우리의 존재를 결정 짓는 것이기도 하다. 김 교수는 동성애에 양자 간의 사랑이라는 미학의 옷을 입히고 이것에 하나님과 신자와의 사랑의 교제인 예배와 닮은꼴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이런 김 교수의 견해는 계명을 지키는 하나님 편의 ‘선’보다는 인간편의 ‘아름다움’이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히 도올의 노자식 미추적 주장을 뒷받침 하고도 남는다 하겠다.

생각해 보자. 동성애엔 성애적인 심리적인 요인이 수반될진대, 대상에 따라 아름다운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이성애와는 달리 동성애는 그 자체로서 본태적으로 창조주의 뜻을 거슬리는 존재적인 죄성을 배태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인식론의 다른 이름이 존재론이 아니던가?

죄는 우리의 영적인 문제이며 우리의 영적인 상황은 심리적이고 물리적 상황과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죄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우리와 타자와의 관계에까지 두루 영향력을 미친다. 동성애의 관계적 파괴성은 그 당사자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비롯해서 그들의 파트너와 그들의 가족, 또 그들이 키우는 자녀들, 그 자녀들이 관계하는 사회와 촣체적으로 미치는 국가사회와의 관계에까지 먼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이런 불행한 딜레마로부터 우리의 자녀세대인 동성애자들과 그들이 미래에 살아갈 사회를 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부모세대가 뜻을 모아, 저들로 하여금 개인적인 회심과 중생을 통한 내적인 변화를 이룰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 세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투철한 앎을 통한 크리스찬의 정체성 확립을 필요로 한다. 그 어느 때보다 크리스찬의 거듭난 이성이 필요한 때이다.

박현숙 목사(프린스턴미션, 인터넷 선교 사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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