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북한 짝사랑, 국민이 느낄 굴욕감은 상관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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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하나원에 입소한 탈북민을 대상으로 북한 인권 실태를 조사해 백서를 발간해 온 (사)북한인권정보센터가 최근 ‘2020 북한인권백서’ 발간 세미나를 개최하고 생생한 북한의 인권 침해 실태를 공개했다. 그런데 올해는 예년과 다르게 이미 국내에 거주하는 탈북민의 증언을 기초로 백서를 발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통일부가 하나원에 입소한 탈북민 조사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인권정보센터는 지난 2007년부터 14년 간 한 해도 빠짐없이 ‘북한인권백서’를 발간해 왔다. 하나원에 입소한 탈북민의 생생한 증언이 뒷받침되었다. 그런데 올 초에 통일부가 갑자기 북한 인권 실태조사 대상자 규모를 기존보다 30% 축소하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그 이유가 조사 참여자 중복 문제와 마감 기한 때문이라는 데 최근 통일부의 행보를 볼 때 석연치가 않다.

그러나 센터 측은 통일부의 이 같은 일방적인 요구를 수용할 경우 조사의 정확도가 현저히 떨어진다고 판단해 받아들이기 곤란하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그러자 통일부는 올 3월에 “고위관계자가 결정한 사항”이라며 하나원 입소 북한이탈주민 대상으로 한 ‘북한 인권 실태조사’ 협조 중단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센터 측의 재고 요청도 끝내 묵살했다.

통일부는 그 후 북한인권정보센터를 아예 조사용역 수행기관에서 제외해 버렸다. 센터 측이 정부의 조사규모 축소 방침을 수용하지 않고 조사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기 때문이라는데 센터 측의 입장과는 너무도 다르다. 센터 측은 “기존과 같은 규모로 하나원 조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허용해달라고 입장을 표명했을 뿐, 단 한 차례도 ‘조사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적이 없다”고 했다.

매년 북한인권정보센터가 북한 인권백서를 발간하며 축적한 방대한 데이터는 북한 인권의 시대적 변화를 추적하고 북한 정부를 상대로 인권 개선을 압박하는 증거 자료로 활용돼 왔다. 따라서 통일부의 조치는 민간영역의 북한 인권 실태조사에 대한 정부의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정부가 유독 북한 문제에 있어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은 이 뿐만이 아니다. 통일부 산하에 있는 북한인권기록센터는 지난 2016년 북한인권법에 따라 출범했다. 그런데 지난 4년 간 북한 인권과 관련된 공개 보고서를 단 한 번도 발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통일부가 ‘북한 눈치보기’를 하느라 예산을 낭비하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통일부는 지난 18일 기자간담회에서 “북한 인권 실태를 다룬 보고서를 준비하고 있으며 준비가 완료되는 시점에 어떤 방식으로 발간할지 검토할 시기를 가질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보고서의 발간 시점에 대해서는 “올해 안이 될 수도 있고 더 늦어질 수도 있다”는 식으로 뒤를 흐렸다. “올해 보고서 발간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던 하루 전 공식 입장을 스스로 뒤집은 것이다. 통일부가 과연 북한 인권 보고서를 발간할 의지가 있기나 한지, 이인영 장관 취임 이후 북한 ‘눈치보기’가 더욱 심해지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외교부도 통일부 못지않다. 유엔 인권이사회가 지난 6월 2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총회에서 북한의 인권침해와 인권범죄를 비난하고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하는 북한 인권 결의안을 표결없이 채택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결의안 초안 공동제안국 명단에서 빠졌다.

북한 인권결의안은 2003년 유엔 인권이사회의 전신인 인권위원회에서 처음 채택된 뒤 올해까지 18년 연속 채택되었다. 우리 정부가 명단에서 빠진 이유에 대해 외교부는 “현재의 한반도 정세 등 제반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고 했다. 이 같은 설명은 정부가 국제사회가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는 최악의 북한 내 인권 개선보다는 김정은 체제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에 대한 정부의 노골적인 ‘눈치보기’가 국내에서 활동하는 북한 인권단체들에 대한 압박과 정치적 박해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점은 더욱 심각하다. 통일부는 지난 7월 17일 대북전단 살포를 주도해 온 탈북민단체 ‘자유북한운동연합’과 ‘큰샘’의 법인 설립 허가를 전격 취소했다. 이들이 “정부의 통일 정책과 통일 추진 노력을 심대하게 저해하는 등 설립 허가 조건을 위배했다”는 이유에서다.

비닐 풍선에 남한 실상을 알리는 전단지와 달러, 성경 등을 넣어 북으로 띄워 보내는 일이 실정법상 위법한 일인지 아닌지는 앞으로 사법적 판단에 따를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토록 정부의 통일 추진 노력을 저해했다면 왜 정부가 이제까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지, 북한 권력 2인자 김여정이 개성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등 광기에 가까운 반응을 한 후에야 부랴부랴 이런 조치를 취했는지 주권국가로서 도무지 설명이 안 된다.

우리 정부의 끊임없는 구애에도 북한은 초지일관 냉담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9일 “9·19 남북합의는 반드시 이행돼야 한다”며 “평양 능라도 경기장에서 15만 평양 시민을 만났다. 분단 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북녘 동포들 앞에서 연설했고, 뜨거운 박수도 받았다”고 2년 전의 감격을 회상했다. 그런데도 북한의 가슴에서 한국은 이미 한줌 재로 남은 지 오랜 듯하다. 상대가 관심도 없고 노골적으로 싫다는데 언제까지 애달픈 짝사랑을 계속 하려는지 참으로 딱하다. 국민이 느낄 굴욕감이 어떨지 생각한다면 이제 그만 할 때도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