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코로나와 한국교회의 과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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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교회의 과제 6: 교회 다시 회복하기

 

박동식 교수

산책하는 동네에 이런 팻말이 있습니다. "DRIVE LIKE YOUR KIDS lIVE HERE." "당신의 아이들이 여기 산다고 생각하고 운전하십시오"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문구입니다. 이 문구의 핵심은 '조심히 운전하세요'일 겁니다. 그러나 때로는 부차적이거나 숨겨진 이면의 표현이 더 깊은 메시지를 줄 때가 있죠. 이 팻말은 '여기서 뿐만 아니라 어디서나' 당신의 자녀가 산다는 생각으로 조심히 운전하세요라는 의미를 전해 주는 듯합니다.

 

이 말을 교회에 가지 못하거나 가는 것이 제한적인 코로나 19 상황에 적용해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것처럼 여러분의 삶에서 신앙생활 하십시오. 그리고 더 나아가 여러분이 가는 곳 어디서든지 참 그리스도인으로 사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삶의 터전에서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것이 쉽지 않음을 우리 모두가 알지요. 수시로 넘어집니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 자신의 신앙을 잡아 줄 공동체가 있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본질상 공동체를 지향하는 관계적 존재이기에 그렇습니다.

또한 약한 인간인지라 공동체와 떨어져 있으면 쉽게 무너지고 게을러지기 때문에 교회가 필요합니다. 당장 온라인으로 예배드릴 때 주일날 교회 가듯 준비하지 않은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느 트로트 노래 가사를 이렇게 바꾸어 보면 어떨까요. '목사도, 성도도 꽃이랍니다~ 혼자 두지 말아요~' 혼자 신앙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속에서 함께 신앙 생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지 싶습니다.

우리는 암몬 사람 도비야가 유다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벽을 재건할 때 말했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느4:3) 라는 조롱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한국 교회를 이렇게 두면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을 것 같습니다. 모여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모일 날이 있겠지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이들의 마음가짐이 달랐던 것처럼, 코로나 19로 인해 흩어졌다 모인 교인들은 분명 이전 모습과 다를 것입니다. 마음가짐도, 교회를 바라보는 관점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말이죠. '교회가 정말로 소중한 곳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세상도 무시하고 외면할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곳'이기에 잘 가꾸어 가야 할 공간임을 깨달았으니 말입니다.

교회를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여우가 아닌 코끼리가 올라가서 흔들어도 든든히 설 수 있도록 교회를 회복해야 합니다. 조롱에 맞서는 방법은 조롱이 아닙니다. 그 조롱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기만 하면 됩니다. 든든히 서 있으면 되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라도 교회가 세상과 막역한 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에 무슨 목소리라도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교회의 목소리를 세상이 듣지 않으려 한다면, 세상에 대한 교회의 자세를 고쳐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이 들으려 하겠지요.

최근에 미국 경찰들이 한쪽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셨을 겁니다. 저는 어떤 설명 없이 사진으로만 그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어떤 거룩한 의식을 치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 자세는 용서를 구하는 측면과 시민들과 함께하겠다는 연대의 의미를 지니는 몸짓이라 하더군요. 무릎 꿇는 문화가 없는 그들에게 그 정도 자세만으로 상당히 낮아진 모습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 모습을 보면서 이들은 우리 한국인들에게 무릎 꿇는 문화를 배워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고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두 무릎을 꿇어야죠. 상징은 의미를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한쪽 무릎 꿇으며 여전히 폼나게 자신을 포장하는 용서 구함이 아니라 두 무릎을 꿇어 시민들의 마음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세상에 보여야 하는 자세는 진정으로 무릎 꿇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물론 정치인들이나 종교인들이 무릎 꿇는 이벤트를 하긴 합니다만 진정성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무슨 잘못을 했냐고요? 세상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세상을 바르게 인도하지 못했음을 시인하는 차원에서 무릎 꿇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개혁교회 전통 안에 '행하지 않은 죄'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신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렇게 말합니다. "행하지 않음으로써 짓는 죄 또는 태만의 죄 역시 행함으로써 짓는 죄만큼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에서 그리스도는 왼편에 있는 사람들이 태만의 죄 때문에 정죄 받아 영원한 불로 들어가도록 저주를 받는다"고 말입니다. 에드워즈는 도둑, 포악자, 사기꾼, 술주정뱅이, 중상하는 자, 거짓말쟁이가 아니라 해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헌신적이고, 겸손하고, 화평하고, 사랑이 많으며,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법을 순종하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이 본문은 민중 신학, 해방 신학, 흑인 신학만이 인용하는 본문이 아니라 성경 말씀이기에 그 어떤 신학이라도 수용해야 하는 본문일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말을 지금 상황으로 풀면 우리가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와 약자와 창조질서(생태)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만나기 위해 이 일부터 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행한 태만의 죄가 있음을 고백하며 세상으로 나간다면 세상이 그래도 교회의 목소리를 좀 듣지 않겠습니까. (계속)

박동식(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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