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이라는 이름의 가면을 벗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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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휘문 연구원

신문 기사를 읽다보면 ‘유리천장(glass ceiling)’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여성과 소수민족 출신자들의 고위직 승진을 막는 조직 내의 보이지 않는 장벽.”(두산백과) 여성에게는 임신, 육아 등으로 인해 경력단절과 같은 어려움이 분명 존재한다. 또한 여성을 겨냥한 범죄가 언론을 타고나면 평등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시위, 집회가 기승을 부린다.

그러나 남녀차별을 다룬 기사의 댓글이나 커뮤니티를 보면 남녀갈등은 갈수록 심화되는 양상이다. 특히 2~30대를 중심으로 남녀 간의 적대감정이 누적되어 서로를 향한 혐오 표현까지 표출되고 있다. 평등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왜 갈등은 점차 심화되는 것일까?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긴 것일까?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평등을 위한 여성들의 투쟁은 150년 이상 지속되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많은 여성들에게 고등교육, 투표권, 은행계좌 개설, 대부분의 직업 영역에의 참여, 공무원 혹은 경영진 지위 획득, 사회적 장벽 없이 예술적 소명을 따를 자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이들은 정당한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투쟁해왔다.

그러나 남녀평등을 위한 여성들의 투쟁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다루기 시작하면서 점차 계급투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에서 엥겔스는 가족제도의 폐지, 남녀 고용 평등, 국가 주도의 집단 보육을 주장했다. 또한 시몬느 드 보봐르는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말로 급진적 페미니스트 운동의 문을 열었다. 그 결과 피임과 낙태 합법화를 통해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이름으로 서구 사회의 기독교적 토대는 허물어지고 말았다.

급기야 급진적 페미니즘 운동은 결혼, 가족과 같은 전통적 가치들을 벗어던지고 모성으로서의 여성을 파괴하려는 시도에까지 이른다. 진정한 남녀평등은 남자도 여자도 없는, 자연적 성의 구분을 없애버리는 것을 통해 구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언어는 현실을 반영하는 동시에 현실을 창조한다’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고 아래 뉴질랜드 태생의 학자 존 머니는 ‘젠더(gender)’라는 용어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젠더는 ‘생물학적 성(sex)’과 무관한 ‘사회적 성(gender)’을 지칭하는 용어로 역사적⸳사회적⸳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을 뜻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사회적으로 규정되어 우리 속에 내재된 남성다움, 여성다움이 남녀평등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으며 이를 해체시켜야 진정한 의미의 여성 해방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는 주디스 버틀러의 ‘성주류화(gender mainstreaming)’ 이론에 의해 날개를 달고 UN, EU와 같은 국제기구에까지 침투하게 되었다. 지금도 UN과 EU는 수백만 달러를 LGBTI 단체에 지원하며 젠더 이념을 각 국가에 확산시키는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페미니즘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주변 지인들과 대화를 해보면 주로 이런 말들을 한다. “페미니즘은 단지 그런 이념이 아니야” “일부 극단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지만 다수는 그렇지 않아” “그들은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이야” 그러나 정작 이들이 생각하는 정확한 의미에서의 페미니즘이 무엇인지는 들어본 적은 없다. 그리고 마르크시즘 등 여성해방단체를 이끄는 지도부들은 대부분 그 ‘일부 극단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또한 이들은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고자 한다고 하지만 무엇이 평등한 것이며 어느 선에서 만족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답을 하지 못한다.

교회 안에도 ‘기독페미니즘’을 외치는 분들이 있다. 하나님은 남녀를 모두 평등하게 사랑하시는데 왜 사회는 여성을 차별하고 있냐는 것이다. 물론 처음 평등권을 요구하던 목소리도 기독여성연맹의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때의 평등운동과 지금의 평등운동은 전혀 성격이 다르다. 가족을 해체하고 남성과 여성을 부정하며 LGBTI와 동맹을 맺고 ‘양성평등’이 아닌 모든 종류의 성적 지향을 옹호하는 ‘성평등’을 주장하는 것이 지금의 페미니즘이다. 기독페미니즘을 주장하는 분들은 성경이 옹호하지 않는 이 모든 것을 옹호하는 것일까?

평등에는 두 가지 종류의 평등이 있다. 첫째로 결과의 평등이다. 결과의 평등은 과정을 보지 않는다. 획일적으로 남자와 여자가 직업, 승진, 가정 안에서의 역할 등 모든 영역에서 동일할 것을 주장한다. 둘째로 질서 안에서의 평등이다. 질서 안에서의 평등은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 안에서 성경이 규정한 남성과 여성의 역할과 책무를 다하되 상하관계가 아닌 다름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된 평등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만연한 사회 속에서 가족 해체, 성 역할 해체, 교회 해체를 부르짖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다. 잠들어있던 교회는 이제 깨어나야 한다. 우리의 기준은 세상이 아닌 성경이다. 세상 모두가 해체를 부르짖을 때 교회는 그 속에서 질서와 사랑을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어두워져 가고 부패해가는 이 시대 앞에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역할을 감당하는 한국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김휘문(한국성과학연구협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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