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위에 은혜’, 정확한 번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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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욱 교수

[1] 요 1:16절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여기서 그 유명한 ‘은혜 위에 은혜러라’란 문장이 나온다. 성도라면 잘 모르는 이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유명한 구절이다. 하지만 ‘은혜 위에 은혜러라’라는 내용의 정확한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몰려온다.

[2] 보통 ‘은혜 위에 은혜러라’란 내용은 성도들이나 목회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해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고갈되지 않고 온 우주를 뒤덮고도 남을 정도로 충만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부어주실 은혜가 은혜 위에 쌓이고 또 쌓일 정도로 크고도 넓다.’ 별다른 해석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우리말 성경의 내용은 이해하기가 쉽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잘못된 생각은 없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3] 이런 오해는 잘못된 번역에서 비롯된다. 원문은 ‘은혜 위의 은혜’(grace upon grace)가 아니라, ‘은혜를 대적하는 은혜’ or ‘은혜를 대체하는 은혜’(χάριν ἀντὶ χάριτος)이다. 한글번역 뿐 아니라 영어역본들도 한 가지 외에는 모두가 ‘위에’(upon)로 잘못 번역하고 있다. 오직 YLT만이 원문대로 ‘grace over-against grace’로 번역했다.

[4] 아마도 번역가들이 ‘은혜를 대적한다’고 하려니 이상해지고 해서 그렇게 번역했으리라 생각한다. 이는 명백히 전후문맥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다. 16절 바로 다음 절을 놓쳐선 안 된다. 원래 성경원문에는 장절의 구분이 없지 않던가. 16절과 17절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자연스런 흐름의 두 구절이다. 17절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5] 그렇다. 이 두 구절을 원문과 문맥에 맞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처음 은혜(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율법)는 나중에 주어진 것(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진리의 말씀)과는 대적 될 정도로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이어지는 17절의 내용을 통해 16절의 의미가 선명해짐을 본다.

[6] 복음서의 권위자인 카슨(D. A. Carson)은 <힘써 하나님을 알자>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율법을 주심은 은혜로운 일, 하나님의 멋지고 아름다운 선물이었다. 하지만 최고의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졌다. 바위틈에 숨은 모세에게 보여주신 영광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드러났다. 율법의 언약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었지만, 이제 예수님은 새 언약, 궁극의 은혜와 진리를 가져오실 것이다. 이는 '옛 은혜를 대체하는 은혜'이며, 새 언약과 이어져 있다.”

[7] 모세는 ‘살인하지 말라’ 했지만, 주님은 형제를 능멸하고 차별하는 것만으로도 죄가 된다고 하셨다. 요컨대 교회가 말하는 ‘의’, 교회가 추구하는 ‘의’는 당연히 구약의 율법의 요구나 세상의 요구하는 정의보다 높은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8] 십계명과 율법을 넘어서는(대체하는, over-against) 그리스도의 은혜는 그분의 신부인 우리에게도 세상법과는 구별되는 의와 덕을 요구한다. 오리를 가자면 십리까지 가주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내주는 수준 높은 은혜와 사랑 베풂 말이다. ‘모세로 말미암은 은혜와는 대적이 된다고 할 만큼 족히 비교가 안 되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늘 마음에 되새기며 하나님의 은혜에 부족함 없는 삶을 오늘 나부터 잘 살아보자.

신성욱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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