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칼럼] "3.1운동과 한국교회: 개혁신학적 이해" (I)

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김영한 박사. © 기독일보DB

머리말

올해 대한민국과 한국교회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3·1운동은 백년 전인 1919년 3월 1일 한국인들이 거국(擧國)적으로 일제 강점에 저항해서 대한민국의 독립과 한국민이 자주국민임을 선언하고, 한국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다. 당시 한국인 유학생들은 영자(英字)신문을 통해서 파리강화(講和)회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같은 정보를 입수하여 3주 전인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의 YMCA회관에서 2.8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내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광수가 기초한 2.8독립선언서를 기폭제로 해서 일어난 불씨를 다듬어서 육당 최남선이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하여 민족대표 33인 이름으로 선포하고 급작스러운 서거(逝去)를 한 고종황제의 장례일(3월 3일)을 계기로 하여 거국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I. 3. 1운동의 역사적 의의

1. 3.1운동의 모태는 중국 상하이의 신한청년당의 여운형과 김규식 독립운동

3.1운동의 모태는 일제의 감시가 심한 국내보다는 활동이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국제정세에 대응이 신속한 중국 상하이에서 준비되었다. 평양신학교를 중퇴하고 장로교회에서 전도사를 지낸 여운형이 1차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는 국제 정세변화에 부응하여 독립운동의 기회가 주어져졌다고 보고 중국 상하이에서 1918년 8월에 신한청년당을 결성했다.

1918년 11월 11일 1차세계대전이 종결되자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파리 강화조약에 중국을 참여시키기 위해 중국 정부에 보낸 특사(特使) 찰스 크래인(Charles R. Crane)이 한 연설회에서 파리강화회의에서 전후 식민지 처리문제가 피억압민족의 의사를 존중해서 처리될 것이라는 내용이 전달되었다. 이 연설을 들은 신한청년당 대표인 여운형은 크레인을 방문해서 일본의 한일합방이래 일본 경찰의 한국인에 대한 잔인한 억압을 알리고,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인 대표 파견하여 한국인의 독립의사를 발표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크레인은 적극적인 협력을 약속했다, 이에 고무된 여운형은 김규식을 한국대표로 파리에 파견할 것을 결정했다. 김규식은 언더우드 선교사 가문에서 자라났으며,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언더우드가 설비한 새문안교회의 장로로 봉직하다가 105인 사건으로 중국에 망명해 있었다.

김규식은 1919년 2월 상하이에서 파리로 출발하면서 신한청년당원들에게 국내에서 일제의 학정(虐政)을 폭로하고 독립선언을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내가 파리에 파견되더라도 서구인들이 내가 누군지 알 리가 없다.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해야 한다. 파견되는 사람은 희생당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사건이 발생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다." 김규식의 이 발언은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가장 시원적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상하이의 신한청년당은 후속조치로서 국내, 만주 및 러시아에 밀사를 파견했다. 선우혁(장로교 인으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고난을 겪은 뒤 상하이로 망명), 서병호(서상윤 장로의 아들), 김순애(김규식의 아내), 김철, 백남규 등은 1919년 2월 국내에 잠입하여 국내 지사들과 접촉해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참가를 알리고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을 촉구했다. 선우혁은 귀국후 우선 105인 사건의 옛 동지인 양전백(장로교 증경 총회장), 평북 정주의 이승훈 장로를 만나고, 평양 기독교의 유력 인사인 길선주(평양 장대현교회 담임)를 만나서 당시 국제정세와 이에 따른 독립운동을 논의해서 적극적인 찬동을 얻었다. 그후 서북지방의 기독교계 지도자들인 강규찬(산정현 교회 담임목사), 김성탁(송오동 교회 담임 목사), 변린서(장대현 교회 장로) 등 여러 기독교 인사들과 논의하고 상하이로 돌아갔다.

그리고 신한청년당 내의 일본 유학생들을 일본으로 파견해 도쿄유학생들과 접촉하게 했다. 도쿄유학생들은 조선기독교 청년회(동경 조선 YMCA)와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중심으로 독립의식을 배양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에서 간행된 미국계 영자 신문 「The Japan Advertiser」을 통해 재미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이 알려지면서 크게 고무되어 있었다.

2. 3.1운동은 도쿄 2.8선언에 의해 준비됨.

1) 도쿄 유학생들 중심으로 한 2.8독립선언 운동: 국권 강탈당한 후 처음의 독립선언

3.1운동의 횃불은 일본 유학생에 의하여 조선기독교청년연합이 사용하던 도쿄기독교청년회관에서 있었던 2.8선언에 의하여 점화되었다. 1918년 11월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1919년 1월 18일에 강화회담이 파리에서 열리게 되자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W. Wilson)은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다. 당시 일본 도쿄유학생수는 592명(1918년 현재)이었는데 이들은 세계대전의 종전 소식과 함께 월슨 미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이 기회에 또 한 차례의 거국적 독립운동을 일으켜 성사시키겠다는 뜻을 다짐하는 비밀회의를 하였다. 1919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강화회의에 조선인 대표로 이승만과 민찬호, 정한경 등이 참석해 일제의 침략 행위를 알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인 유학생들 사이에 독립열망이 퍼져갔다. 이에 메이지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있던 근촌 백관수는 최원순과 정광호, 김안식, 김현준과 함께 조선 유학생들의 마음을 한데 모아 독립의사를 천명하기로 했다.

이들 일본유학생 5백여 명은 1919년 2월 8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YMCA) 대강당에서 "조선청년독립단" 발족(근촌 백관수가 단장)을 선언하고 준비된 이광수가 기초, 수정, 탈고한 2.8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쟁취한 세계만국의 앞에 독립을 기필코 이루기를 선언하노라....우리 민족은 일본의 군국주의적 야심의 사기 폭력 하에 우리 민족의 의사에 반하는 운명을 당했으니 정의로 세계를 개조하는 이 시기에 당연히 바로 잡을 것을 세계에 요구할 권리가 있으며, 또 세계 개조의 주인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과 영국은 보호와 합병을 솔선 승인하였으므로 이 시기에 구악을 대속할 의무가 있다" 이들은 1919년이라는 시점에서 민족의 자결을 일제로부터 민족 독립 선언으로 천명한 것이다: "비록 다년간 전제정치하의 해독과 좋지 않은 사정의 불행으로 오늘과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선진국의 규범에 따라 신국가를 건설한 후에는 건국 이래 문화와 정의와 평화를 애호하는 우리 민족은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문화에 공헌함에 있을 줄을 확신하노라." "최후의 1인까지 자유를 위한 뜨거운 피를 흘릴지니 어찌 동양평화의 화근이 아니리요,"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언하리라." 2.8독립선언서가 천명한 "일본 군국주의 비판," "조선의 독립 선언," "민족 자결,""정의, 자유, 평화," "민주주의," "동양평화" 등 주요 용어들은 3주 후 선언된 기미독립선언서의 기초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인유학생들은 곧 이 독립선언서를 일본국회에 제출하려고 했으나, 일본 경찰들의 난입으로 강제 해산되었다. 해산 와중에 유학생들과 이들을 경계한 경찰관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졌다. 일본경찰은 현장에서 그들 중 60여명을 체포했다. 2·8독립운동은 1910년 을사조약 이후 독립운동의 의지가 한 데 모여 민족의 등불을 밝힌 거사로 인정받고 있다. 2·8독립선언은 우리 민족이 국권을 빼앗긴 이후 처음으로 발표된 독립선언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2·8독립선언은 일제의 심장부인 일제의 수도 도쿄에서 대낮에 공개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놀랍기도 하고 장하기도 한 쾌거였다. 2·8독립운동은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3·1운동과 비교했을 때 실천적이고 혁신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2·8독립선언서에서 볼 수 있듯 2·8독립운동은 지성적이면서 활력이 넘치는 측면이 강하다.

2) 2.8독립선언서의 의의: 왕조체제 타파, 근대 민주 공화국 선포

2.8독립선언 유학생들이 꿈꿨던 민족국가의 모습은 자유주의를 뿌리로 하는 근대국가로서 과거로의 회귀(조선왕조 회복)가 아닌 희망찬 미래사회(민주공화국)를 그린 것이다. 즉 2·8 독립선언서는 한민족 전체의 완전한 자유와 평등을 기초로 한 자유주의국가 건설을 강조했다. 이들은 이를 통해 봉건질서(왕조체제) 타파와 근대이념(민주자유공화국)의 대중화를 역설했다. 이는 한국교회 초창기 선교사를 시작으로 한국교회가 이루고자 한 자유와 평등을 기본으로 하는 가치세계와 맥을 같이 한다. 도쿄 조선인 유학생들은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기독청년으로서 사회화를 도모하는 신앙 공동체를 건설했다.

100년 전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독립 선언과 주권 회복을 외쳤던 2·8 선언은 일본 제국은 물론 세계만방에 정의와 평화의 메시지를 심어주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2.8독립선언서는 일제의 심장부인 수도에서 대낮에 공개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놀라운 쾌거였으며, 독립될 국가는 왕정으로 복고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국제평화주의를 지향하겠다고 다짐했다. 도쿄 2.8거사(擧事)에 앞서 1919년 1월 초순에 송계백(보성중학교졸, YMCA 영어과 제6회 졸업생)이 국내에 밀파되어 2.8독립선언서는 여러 과정을 거쳐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에게까지 전달되었고, 선언서를 읽은 손병희는 교단 회의를 통해 3·1운동 궐기를 결의했다. 그리고 각계 대표를 만나서 국내 청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선언하자고 주장하였다.

2.8 독립선언서는 한민족이 일제의 식민통치를 거부한다는 뜻을 세계만방에 알렸으며, 무엇보다 국내 민족지도자와 학생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2·8독립선언서는 3·1운동으로 계승되어 한국민족이 이제는 식민지배의 압제에서 벗어나 일어날 것을 주문했다. 2·8독립선언서는 독립 이후 한민족이 건설해야 할 사회가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근대국가라는 것을 명확하게 짚은 민족의 나침반이라 할 수 있다. 3.1독립선언서는 2.8독립선언서의 뜻을 대체로 이어받고 있다. 2.8 독립선언은 3.1운동의 여파로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데 토대가 됐다.

3. 기독교의 결정적인 역할: 지역교회 교인들과 지역 기독교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참가

1) 오산학교 교장 이승훈의 주도로 기독교계 연합과 천도교와의 합작

국내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평양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독립운동 계획을 수립했다. 구체적으로는 평양시내의 기독교인과 기독교학교와 관립학교의 기독학생들을 총동원해 독립운동을 벌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천도교가 일찍부터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고 있었다. 1919년 1월 25일 천도교 교주 손병희에게 보고하고 기독교 등의 종교계와 사회명망가 등을 망라한 민족대연합의 운동으로 추진할 것을 결정했다. 기독교와의 교섭은 평북의 정주의 오산학교 교장 이승훈과 접촉하도록 했다. 천도교의 독립운동 계획을 알게 된 이승훈은 천도교-기독교 합착을 추진했다. 이승훈 장로는 선천의 자방 사경회에 참석하고 있었던 양전백 목사, 유여태 목사, 김병조 목사, 이명룡 장로 등과 긴급회합해 독립만세운동 거사(擧事)를 알렸다.

이에 평양을 중심으로 추진하고 있던 기독교계 독자적인 독립만세 운동은 수정되어 서울의 감리교, 천도교와 연합하는 민족대연합의 독립운동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기독교, 천도교, 불교가 연합해 3.1독립선언서를 작성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데 서명자 순서로 갈등을 빚을 때 남강 이승훈은 "순서는 무슨 순서야, 이건 죽는 순서인데 누굴 먼저 쓰면 어때? 손병희를 먼저 써"라며 양보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 서명자들(33명 가운데 29명, 길선주, 유여대, 정춘수, 김병조 미참)이 모인 가운데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본래 독립선언 예정 장소는 탑골공원이었으나, 일제 군경이 행사를 강제 진압시킬 것을 경계한 민족대표 중 한 분 박희도(종로감리교회 전도사로 YMCA 간사)의 건의에 따라 장소를 바꾼 것이다. 기독교계의 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는 미참하였다. 천도교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는 이미 교회 조직망을 통해 전국에 배포되었고, 선교사들과 일본 정부의 관계 요로에도 배포되었다. 참석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을 한 후에 자진해서 경찰 당국에 신고하고 연행되었다. 이는 독립선언서에 담긴 비폭력적 저항 정신에 따른 것이었다. 민족대표를 기다렸으나 이들이 나타나지 않자, 파고다공원에서도 학생들 중심의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에 들어갔다.

시가행진이 종로거리를 지나갈 때 이를 지켜보았던 윤치호(尹致昊)는 그날의 광경을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기술했다. "거리를 메운 학생들과 시민들이 '만세'를 외치며 종로광장(지금의 종각 앞 사거리)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창문을 통해 눈에 들어왔다. 소년들은 모자와 수건을 흔들었다. 이 순진한 젊은이들이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불을 보듯 뻔한 위험 속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는 이 시위와 연루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회관(YMCA)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곧바로 군인, 기마경찰, 형사, 헌병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김상태 역,『윤치호일기』(1916-1943), 77-78쪽). 윤치호를 포함한 국내 지도급 인사들(한규설, 박영효, 윤치호)의 당시 상황인식은 한마디로 독립 무망론(無望論) 혹은 독립운동 무용론(無用論)이었다. 따라서 윤치호는 3․1만세운동은 '어리석은 행동'에 불과하다고 인식했던 것이다. 구한말 대신으로 존경을 받고 있던 한규설(韓圭卨)과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등으로 명성이 높았던 개화파 인물 박영효(朴泳孝) 그리고 구한말 대신 윤웅렬(尹雄烈)의 아들로 당대 최고의 개화 지식인으로 인정받던 윤치호(尹致昊)등은 민족대표 자리를 하나같이 고사(固辭)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윤치호를 비롯한 지도급 인사들의 현실주의적 인식은 민족사적 미래를 통찰하지 못한 좁은 식견에 불과했다. 저들이 달걀로 바위를 치는 부질없는 행위에 불과하다고 본 3.1시위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민족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것이다. 3.1운동은 한국민족의 자존감을 일깨우고 하나라는 연대감을 배양했으며, 국제적으로 한국이라는 존재를 알렸으며, 본격적인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도록 하여, 실제적으로 상하이 임시정부를 설립하도록 만든 것이다.

다른 7개 지역에서 독립선언문이 낭독됐다. 무단통치로 억눌렸던 백성들은 복부에서 끌어올리는 외침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팔이 빠져라 태극기를 흔들었다. 3.1운동은 같은 날 거의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교회조직을 통하여 전국적인 거사 계획이 실천되었기 때문이다. 만세 운동이 터졌을 때 일제는 즉각적으로 기독교 주축의 운동이라 판단하였다. 그러나 평화와 인도주의 정신에 따라서 아무런 폭력이나 만행이나 약탈이 없었다. 여기에 3.1운동의 평화주의적 시위의 성격이 있다. "교회는 이번 만세 운동의 배후에 있는 주력이란 단정을 받고 있다."

독립선언문이 발표되고 3.1 만세시위가 시작되자 그 중심에는 기독교인들이 한마음으로 뭉쳤다. 4월말까지 격렬한 시위가 전국적으로 전개됐고 거점은 교회와 기독교학교이었다. 1919년 4월 15일에는 경기도 화성에서 만세시위 참가자와 기독교인들이 제암리교회 예배당에 갇혀 학살되는 만행도 자행됐다. 엄청난 핍박에도 교회는 다시 거세게 저항했다. 당시 총인구에서 천도교인은 3백만으로 추정되며 기독교인은 1.5%밖에 되지 않은 26만 명 정도였다. 하지만 3.1운동 전체 구속자 가운데 기독교인이 1/3을 상회하는 결과는 기독교가 3.1운동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2) 경신학교, 이화학당, 숭실학교 등 기독교학교 주도로 만세 시위를 전국으로 학산

지역교회 교인들과 함께 기독교학교가 주축이 되어 당시 전국적으로 설립되어 있던 기독교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각 지역마다 3.1운동을 확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서울에서는 경신학교, 배재학당,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등의 기독교학교 학생들과 교사들, 그리고 졸업생들이 3.1운동을 주도하였다. 탑골공원에서 기미독립선언문을 읽어 내려간 정재용은 경신학교 졸업생이었다. 3.1운동의 주역으로서 파리 강화회의에 참여했던 김규식도 경신학교 졸업생이었다. 경신학교 졸업생들과 재학생 1백여 명이 3.1운동에 참여했다. 조선총독부는 이 때문에 경신학교를 "혁명자 양성소"로 낙인찍어 수업과 신입생 선발을 불허하는 등 탄압을 하게된다. 배재학당 기숙사는 3.1만세운동의 모의장소로 사용되었고, 교사 김진호의 지시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각국 공,영사관에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화학당은 유관순 열사의 모교로 3.1운동 당시 이화학당 여학생들은 소복을 입고 대한문으로 행진했다. 유관순을 포함한 5인 여성 결사대는 기숙사 뒷담을 넘어 남대문쪽으로 달려가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이화학당에 이로 인하여 3월 10일 휴교령이 내려진다. 정신여학교 기숙사 여학생 70명이 고종 황제의 죽음을 애도하며 검은 댕기에 상복을 입고 대한문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정신학교 졸업생 김마리아는 일본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서언서 낭독에 깊이 참여했다. 그녀는 2.8 독립선언서를 국내로 전달해서 3.1운동을 점화시키는 불씨가 되었다.

총독부가 서울의 각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자 지방 출신학생들이 귀향하면서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화학당 김애사는 이화학생 20명을 이끌고 3월 3일 평양의 만세 시위에 가세했고, 유관순(당시 16세)은 4월 1일 고향인 충남 천안으로 내려가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마침내 총독부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게 되고 그녀의 부모도 죽임을 당했다.

평양에서는 숭실학교, 숭의여학교, 숭덕학교, 광선학교 등이 연합하여 3월 1일, 3월 4일 만세운동을 하였다. 평안남도 선천에서는 보성여학교 학생들이 신성학교 학생들과 연합하여 3월 1일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정주에서는 남강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는 3.1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3월 2일에는 오산학교 교정에 교직원, 졸업생, 학생, 교인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운동을 하였는데 시위행렬이 1천3백여 명이나 되었다. 3월 31일에는 일본 헌병들이 오산학교에 참입하여 교사를 불태우고 오산학교는 1년동안 폐교되었다.

대구에서는 계성학교와 신명여학교가 연합하여 3월 8일 대구서문 밖에서 만세 시위를 하였다. 계성학교 학생들은 "혜성단"이라는 비밀결사체를 만들어 일제에 항거하였다. 목포에서는 4월 9일 영흥학교, 정명여학교 등의 기독교 학교 학생들이 주도하여 만세 시위를 하였고, 전주에서는 3월 12일 기전여학교와 신흥학교 학생들이 연합하여 만세 시위를 하였고 이로 인하여 남녀 학생 70여 명이 체포되었다. 광주에서도 수피아여학교와 숭일학교 학생들이 주도하여 만세 시위를 하였고 이로 인하여 남녀학생 71명이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총독부는 기독교학교가 일제 통치에 큰 장애물이라는 것을 알고 다양한 방식으로 기독교학교를 탄압하였다.

3.1운동이 일단락 된 후에도 기독교학생들은 상하이 임시정부 발행의 독립신문 등 민족주의적 각종 유인물의 비밀 배표, 시험거부, 수업거부 등의 집단 행동시위 활동을 지속하였다. 당시 아주 작은 규모의 외래종교에 불과했던 기독교가 3.1운동을 통하여 민족 사회 안으로 스며들어가는 민족종교가 된 기초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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