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오 칼럼] 종교개혁 500주년 루터에게 듣는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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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 하이델베르크 논쟁(1518)

논제 13: 타락 이후 “자유의지”는 단지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며, 자유의지의 능력범위 안에 서 행하고 있는 한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죄”(mortal sin)를 범하는 것이다.

정진오 목사(미국 시온루터교회 한인 담당목사)

“첫 번째 부분은 명확하다. 의지는 죄에 사로 잡혀있고 속박되어 있다. 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것 외에는 자유가 없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8장에 의하면,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 … 그래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 34, 36).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영과 문자』에서 “은혜가 없는 자유의지는 죄 이외에는 어떤 것을 행할 힘이 없다.”고 말한다(Chap. 8, par 5). 또한 그의 두 번째 저서 『율리안에 반대하여』와 그 외 다른 많은 저서들에서 “당신은 의지를 자유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노예로 사로잡힌 의지이다”(Chap. 8, par 23)고 설명한다.

두 번째 부분은 위에서 말한 것들과 “이스라엘아! 너에게 불행이 닥쳤으니, 너의 구원은 오직 나와 함께 있다”(호 13: 9, 이 구절은 ‘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 이는 너를 도와 주는 나를 대적함이니라’의 자유로운 번역이다-필자 주)와 다른 유사한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루터는 논제 13에서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에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일 뿐이며, 설령 인간이 자유의지라는 이름으로 행한 모든 것들도 “죽음에 이르는 죄”일 뿐이라고 말한다. 종교개혁 당시 루터의 이러한 주장은 실로 대담하고 가히 혁명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실제로 1520년 2월 로마에서는 루터의 가르침에 대한 조사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6월 15일에는 교황 교서 'Exsurge Domine'(주여 일어나소서)가 반포되어 루터의 이단교리 41개항을 나열하여 단죄하였다. 여기서 논제 13은 루터를 파면에 이르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만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자유의지”에 관한 루터의 이 같은 주장은 루터 자신의 개인적인 신학적 사유라기 보다는 루터가 논제 13의 부연 설명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도리어 초대 교부 어거스틴(Augustine)에 의해서도 이미 제시되어온 논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제 13에 나타난 자유의지에 대한 루터의 주장이 종교개혁 당시 교황이 그를 파면에 이르게 할 만큼 큰 논쟁으로 번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스 문화를 수용·발전시킨 이슬람 문화는 11세기부터 이베리아 반도(the lberia Peninsula)내 코르도바(Cordoba)와 톨레도(Toledo)등지에서 라틴어와 로망스어(Romance) 로 번역되어 유럽 전역의 문명 개화를 일으키며 12세기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이 시기에 자연 과학과 철학 수학 등 그리스어와 아랍으로 된 중요한 저술들이 번역되기 시작했다. 특별히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저술들의 번역은 다른 무엇보다도 중세 신학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저작들이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전통적 체계에 대항한 새로운 강력한 체계로서 ‘전성기 스콜라 철학’이 시작되었다. 그 중 중세 신학을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플라톤(Platon)이나 어거스틴으로 부터 떠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아퀴나스의 필생의 과업은 성서와 아리스토텔레스를 결합하여 이성과 신앙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호보완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런 종합의 산물은 그의 방대한 저서 〈신학대전, Summa theologiae〉로 저술되어 중세 스콜라 신학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성과 신앙을 동일시 하는 아퀴나스 신학은 중세 교회와 신학의 핵심이 되었다. 이를 보여주기 위하여, 아퀴나스는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 또한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타락과 모순되지 않는 본래적 특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을 소위 “신테르시스”(synteresis)라고 부른다. 라게에 의하면, “synteresis는 창조 때에 인간에게 부여된 능력으로, 선한 행위들을 수행하기 위한 본래적 능력뿐만 아니라 동시에 타고난 기질(disposition)이다” (Lage, Martin Luther's Christology and Ethics, p. 13).

아퀴나스는 ‘synteresis’를 ‘이성적 영혼’(rational soul)으로 구성된 정신(mind) 또는 이성(reason)이 지닌 지적이고 인식적 기능과 동일시한다 (Aquinas, Summa Theologica, Ⅰ-Ⅱ, quest. 94, art. 2). 여기에 기초해서 아퀴나스는 타락 이후에도 인간 안에 남아있는 ‘synteresis’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선한 행위를 깨달아 수행할 수 있다고 본다.

‘synteresis’를 정신(mind) 또는 이성(reason)과 동일시 했던 아퀴나스의 견해는 중세 후기 들어서는 ‘의지’(voluntas)로 보는 흐름으로 바뀌었다. 일례로 중세 후기 대표적인 스콜라 신학자 윌리엄 옥캄(William of Ockham)은 타락 이후 인간에 남아있는 ‘synteresis’는 이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응하는 ‘의지’(will)라고 보았다.

아퀴나스가 인간의 상태는 선에 대한 지식의 결핍이라고 보았다면, 옥캄은 선을 완성하기 위한 의지가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의지를 강조하는 옥캄의 신학은 중세 후기에 크게 영향을 끼쳐, 중세 후기 스콜라 신학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며,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자발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facere quod in se est) 보상으로 주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루터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영향을 받은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에 영향을 받은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과 그 신학 전통을 날카롭게 반대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연습이 완전하게 한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토마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마치 하프 연주자가 오랜 연습을 통해 훌륭한 하프 연주자가 되듯이 이 바보들은 사랑, 자비, 그리고 겸손의 덕목들이 연습을 통해 성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진실이 아니다.” (WA 10 Ⅲ, 29f.)

루터는 1515/16년 로마서 강해에서 중세 스콜라 신학을 거부하고, 타락 이후 인간의 의지는 노예의지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전적으로 악에 기울어져 있어서, ‘synteresis’에서 분명해진 선을 향하게 하는 그 어떤 부분이 우리 안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LW 25, 262; WA 56, 275)

그리고 루터는 1518년 하이델베르크 논제 13에서 “타락 이후 ‘자유의지’는 단지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며, 자유 의지의 능력범위 안에 있는 것을 행하고 있는 한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죄”(mortal sin)를 범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로마 교황과 교회는 루터의 이러한 주장이 중세 교회와 신학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이단적인 것으로 여겨 루터를 파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사실 루터의 주장은 교회와 신학을 혼란에 빠뜨리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기초로 한 중세 신학 방법론을 거부한 것이다. 그리고 교회와 신학은 초대 교회와 교부들이 그랬듯이 성서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주장한다:

“스콜라 신학자들은 죄와 은총에 대해 충분하고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원죄가 완전하게 제거될 수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 고대 교부들이 …… 성서가 행한 방법을 따라 전적으로 다르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람들(스콜라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을 따라 말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행한 사역의 정도에 기초해서 죄와 은총을 논한다.” (LW 25, 262)

루터는 논제 13에서 말하는 자신의 신학적 주장 역시 성서에 기초하고 있음을 부연 설명에서 밝히고 있다. 루터는 요한복음 8장 34절과 36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니 …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 하리라”에 근거해서 인간은 죄의 노예이기 때문에 인간 안에는 그 죄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어떤 의지가 없으며, 다만 오직 인간 밖으로부터 오는 은혜,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자유케 하실 수 있다고 주장한다.

루터는 초대 교부 어거스틴의 저술들을 인용하여, 어거스틴 역시 “은혜가 없는 자유의지는 죄 이외에는 어떤 것을 행할 수 없고”, 인간이 자유의지라고 부르는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노예의지라고 주장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견해로부터 논제의 두 번째 부분이 자연스럽게 입증된다. 인간의 의지는 죄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의지 안에서 행하는 한 ‘죽음에 이르는 죄’가 된다. 여기서 루터는 다시 호세아 13장 9절을 인용한다: “이스라엘아! 너에게 불행이 닥쳤으니, 너의 구원은 오직 나와 함께 있다”(루터의 번역).

논제 13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신학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기초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신학이 성서 이외에 철학이나 기타 학문으로 눈을 돌릴 때 신학은 그 방향성을 잃어버리게 되고, 교리적인 혼란만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는 곧 교회의 타락으로 이어지게 된다. 논제 13은 이러한 예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죄의 타락 이후 자유의지는 “그저 이름뿐” 이라는 논제 13의 이러한 담대한 신학적 주장은 논제 14에서 보다 더 구체적으로 진술된다.

■ 정진오 목사는

필자인 정진오 목사는 루터 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를 취득했다.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 Research Fellow와 예일 신학대학원 Visiting Scholar를 거쳐 현재 미국 시온루터교회 (LCMS) 한인부 담임목사로 재직중이다. 연락은 전화 618-920-9311 또는 jjeong@zionbelleville.org 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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