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것인가, 견딜 것인가, 타협할 것인가: 핍박 속에서 빛을 발하는 성경적 지혜

데니스 P. 페트리 박사. ©petri.phd

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데니스 패트리 박사의 기고글인 '박해받는 이들에게 영웅이 되기를 바라는 잘못된 기대':(On the false expectation that the persecuted be heroes)를 10월 19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데니스 P. 페트리 박사는 국제종교자유연구소(International Institute for Religious Freedom)의 국제 책임자이며, 라틴아메리카 종교자유 관측소(Observatory of Religious Freedom in Latin America)의 설립자이자 상임 연구위원이다. 그는 라틴아메리카 과학기술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여러 저서의 저자이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우리는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이 ‘영웅’이기를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서구 교회에 전해지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자리를 지킨 신자들의 이야기는 사실이며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은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말하지 않은 부담을 지우기도 했다. 박해에 대한 신실한 반응은 오직 견디는 것이며, 다른 선택은 용기가 부족해서 내리는 결정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이것이 2022년 로널드 맥밀란(Ronald MacMillan) 박사와 필자가 《복음주의 신학 리뷰》(Evangelical Review of Theology)에 발표한 글의 핵심 주장이다. 맥밀란 박사는 35년 동안 박해받는 공동체들 가운데서 사역해 왔다. 이 글은 그가 풀러신학교에서 가르쳤던 수업의 학생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다.

박해는 그리스도인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박해했듯 제자들도 박해하리라고 경고하셨다(요 15:20). 그러나 성경은 박해받는 이들에게 견디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이 문제를 두 방향에서 바라보게 한다. 예수님은 다른 뺨을 돌려대며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마 5:39). 한편 아모스는 정의를 물같이 흐르게 하라고 촉구했고(암 5:24), 성경은 거듭 약자를 보호하라고 명한다.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고난받는 태도와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단호함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중요한 질문은 박해에 대응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이다.

견디는 것만이 신실함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박해 대응을 세계적으로 체계화해 연구한 ‘가이사의 칼 아래서’(Under Caesar’s Sword) 프로젝트는 대응 전략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 공동체의 생명을 보존하는 ‘생존’, 다른 교회와 기관의 협력을 통해 버틸 힘을 기르는 ‘연대’, 박해자에게 공개적으로 맞서는 ‘대항’이다.

각각의 전략에는 저마다의 역할이 있다. 영웅적으로 견디는 것은 가능한 여러 반응 가운데 하나이며, 모든 사람에게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다.

이러한 영웅적 기대를 가장 크게 흔드는 선택은 피신이다. 피신에는 분명한 성경적 근거가 있다. 예수님은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마 10:23)고 말씀하셨다.

엘리야는 아합을 피해 숨었고, 요셉은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했다. 예수님도 자신의 때가 이르기 전에는 위협을 피해 물러나셨다. 바울은 광주리를 타고 다메섹 성벽을 내려와 탈출했으며, 박해가 일어날 때 다른 도시로 피하기도 했다. 사도행전 8장에서는 박해로 흩어진 신자들을 통해 복음이 새로운 지역으로 전해졌다.

찰스 스펄전은 ‘사자들 틈에서’(Among Lions)라는 설교에서 마태복음 10장 23절을 다루며, 그리스도인이 피할 수 있는 박해까지 굳이 견뎌야 할 의무는 없다고 설명했다. 피신은 비겁함과 같지 않다. 목표는 영웅이 되는 데 있지 않다. 살아남아 사역을 이어가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일 수 있다.

떠나는 선택에도 분별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피신이 쉬운 결정이라는 뜻은 아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교회를 떠나야 할 수도 있다. 때로는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남았던 것처럼 공동체를 지키는 것이 소명일 수도 있다.

조나단 앤드류스(Jonathan Andrews)의 조언을 빌리자면, 피신을 고려할 때는 현실적인 질문들을 함께 살펴야 한다. 얼마나 오래 떠나 있어야 하는가. 어디로 갈 것인가. 생계는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국경을 넘는 과정이 오히려 더 위험하지는 않은가.

앤드류스는 조국을 떠나는 일을 최후의 수단으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남아 있는 것이 생명이나 자유, 자녀 양육권까지 위협한다면 떠나는 것만이 가능한 길일 수 있다. 핵심은 피신 역시 기도와 분별을 거쳐 내릴 수 있는 정당한 선택이라는 사실이다. 이를 신앙이나 공동체에 대한 배신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영웅적인 간증을 기대하는 태도에는 또 다른 위험도 있다. 박해를 명예의 훈장처럼 여기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필자와 맥밀란 박사는 한 단기선교팀이 걸프 지역 국가에서 공개적으로 전도지를 나눠주다가 체포돼 추방된 사례를 다뤘다. 이들은 귀국한 뒤 자신들이 받은 박해를 자랑했지만, 정작 현지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이웃을 향해 지옥에 갈 이교도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 적대감을 키우고 소금과 빛으로 살아갈 기회를 잃게 하는 행동일 수 있다.

‘가이사의 칼 아래서’ 프로젝트는 예배 소음을 줄이고, 다른 종교의 축제일과 행사가 겹치지 않도록 조정하며, 현지 지도자들의 판단을 존중하고, 다른 신앙을 모욕하는 발언을 삼가는 등의 현실적인 대응을 권한다. 이런 배려를 곧 복음에 대한 타협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순교 자체가 신앙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신앙의 본질과 관습을 구분해야 한다

물론 신자가 결코 넘어서서는 안 되는 선도 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질 위험 앞에서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의 친구들은 느부갓네살의 신상 앞에 절하기를 거부했다. 어려운 과제는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 할 신앙의 본질과, 반드시 충돌할 필요는 없는 관습을 구분하는 일이다.

필자는 멕시코 원주민 공동체에서 이러한 문제가 고통스러운 갈등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곳에서 접한 종교적 박해 가운데 상당수는 복음주의로 개종한 신자들이 공동체의 전통 축제 기부금을 거부한 일과 깊이 관련돼 있었다. 이러한 태도에는 현지 문화와 사역 환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서구 선교사들의 영향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 축제에 비기독교적 종교 요소가 포함돼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해당 공동체에서 기부금 납부를 거부하는 행위는 종교 의식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으로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동체를 지원하고 구성원으로서 책임을 나누는 일까지 거부한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갈등은 적대감으로 번졌고, 때로는 폭행과 마을 추방으로 이어졌다.

필자와 동료들이 제시한 대안은 기부금을 납부하는 것이었다. 가족의 삶의 터전과 생계를 잃는 대신 공동체에 남아, 그곳에서 신앙을 지키며 빛으로 살아가는 길을 택하도록 권한 것이다.

필자들은 이를 세금의 모든 사용처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세금을 납부하는 일에 비유했다. 이 선택은 극적인 간증으로 들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해당 상황에서는 공동체 안에 머물며 신앙을 실천하는 더 지혜롭고 신실한 길이 될 수 있었다.

권리를 행사할 때도 결과를 살펴야 한다

이러한 현실적인 분별은 법적·정치적 대응에도 필요하다. 바울은 로마 시민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알았고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빌립보에서는 부당한 처우에 대한 책임을 물었고, 예루살렘에서는 시민권을 밝혀 채찍질을 피했으며, 황제에게 상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권리를 행사한 것은 아니었다. 상황과 시기를 살피는 판단이 중요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주의점이 있다. 먼저 박해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법적·정치적 판단을 구분해야 한다. 사회적 배제가 신학적으로는 박해에 해당하더라도, 모든 경우에 법적 범죄나 소송 가능한 인권 침해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법적·정치적 옹호 활동의 효과는 해당 사회에서 법치가 얼마나 존중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권위주의 체제에서는 기대한 성과를 얻지 못하거나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

필자와 맥밀란 박사는 구금된 신자의 석방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가, 몇 달 뒤 체류 연장을 거부당해 출국해야 했던 외국인 부부의 사례를 확인했다. 박해받는 이들을 옹호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실제로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물어야 한다. 이 대응이 당사자에게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그를 더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하는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데서 함께 기도하는 자리로

마지막으로 기도가 있다. 구금과 고문을 견딘 이집트 그리스도인들의 요청이 필자의 마음에 오래 남아 있다. 그들은 해외 신자들에게 자신들을 ‘위해’ 기도하는 데서 나아가 자신들과 ‘함께’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외부의 신자들은 대개 안전과 박해의 종식을 구했다. 반면 당사자들은 동포들이 참된 믿음을 갖게 되기를, 자신들이 박해 속에서도 신실함을 지킬 용기를 얻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이 글의 핵심을 드러낸다. 박해받는 이들에게는 우리의 기대에 맞는 영웅이 되어줄 의무가 없다.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 놓은 신앙의 각본을 그들의 삶에 강요해서는 안 된다.

때로 신실함은 그 자리에 굳게 서서 견디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때로는 공동체의 책임을 나누며 삶의 터전을 지키는 선택으로, 또 때로는 짐을 싸서 떠나는 결단으로 나타날 수 있다. 성경은 박해에 대한 대응을 하나의 모습으로만 제한하지 않는다.

우리의 역할은 박해 한가운데 있는 이들의 목소리에 겸손히 귀 기울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고심하며 내리는 선택을 존중하고,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며, 그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 #기독일보 #기독일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