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가 침묵할 때, 양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대의 아픔 앞에서 깨어있는 제자도

살림 J. 무나이어 교수. ©reconciledworld.net

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살림 J. 무나이어 교수의 기고글인 '목자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양들의 도덕적 책임'(The moral responsibility of the sheep when shepherds fail)을 10월 9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살림 J. 무나이어 교수는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인, 그리고 중동 지역의 다른 분열된 공동체들 사이의 화해를 증진하는 데 헌신해 온 단체 ‘무살라하’의 설립자다. 현재 세계복음주의연맹(WEA) 산하 평화와화해네트워크(PRN)의 중동·북아프리카 지역 코디네이터로 섬기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필자는 사역의 대부분을 도덕적 위기 앞에서 교회의 가장 큰 책임은 목자들에게 있다는 믿음으로 감당해 왔다. 30년 넘게 인간의 존엄이 위협받을 때마다 기독교 지도자와 기관들이 용기 있게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적 지도자들은 복음을 선포할 뿐 아니라 교회가 진리와 거짓, 정의와 불의, 신실함과 타협을 분별하도록 도울 부르심을 받았다. 필자는 여전히 그렇게 믿는다. 교회에는 용기 있는 목자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또 다른 질문이 필자의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목자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는 어떻게 되는가. 영적 지도력을 맡은 이들이 침묵하면 교회의 도덕적 책임도 사라지는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도 맡기셨는가.

가자지구의 전쟁과 그로 인한 고통은 이러한 질문을 더욱 절실하게 만든다. 파괴된 마을과 슬픔에 잠긴 가족, 삶의 터전을 잃은 공동체의 모습이 텔레비전과 소셜미디어를 채우는 동안 필자는 스스로 물었다. 왜 이토록 많은 기독교 지도자가 도덕적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지 못하거나 발언을 주저하는 듯 보이는가.

어떤 이들은 정치적 논쟁에 휘말리거나 편향적이라는 비판, 반유대주의라는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한다. 다른 이들은 교회의 분열을 염려한다. 고통의 현실은 인정하면서도 무엇이 불의인지 구체적으로 지적하거나 책임을 묻는 일은 피하는 신중한 성명을 택하기도 한다. 교회사에서 이러한 주저함은 낯선 일이 아니다. 두려움과 제도에 대한 충성, 정치적 압력과 자기 보존의 욕구는 교회의 예언자적 목소리를 약화시켜 왔다.

이 질문과 씨름하면서 필자는 그동안 성경이 제기하는 문제의 절반에만 주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관심이 거의 전적으로 목자들에게 집중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이 목자뿐 아니라 양들의 책임에도 깊은 관심을 두고 있다면 어떠한가.

예수님은 자신의 양을 찾으신다

이러한 깨달음은 필자를 다시 요한복음으로 이끌었다. 많은 그리스도인과 마찬가지로 필자도 요한복음 10장을 목회적 지도력에 관한 중요한 본문으로 읽어왔다. 예수님은 자신의 양을 알고 보호하며, 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이 말씀은 여러 세대에 걸쳐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의 사역을 형성해 왔다.

그러나 본문을 다시 읽으며 그동안 충분히 주목하지 못했던 사실을 발견했다. 요한복음 10장은 목자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양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여러 목소리 가운데 그것을 분별하며, 낯선 이를 따르지 않고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묘사하신다. 양들은 지도자의 돌봄을 수동적으로 받는 존재가 아니다. 궁극적인 충성을 선한 목자에게 바치며 분별하고 행동하는 제자들이다. 예수님은 신실한 지도력과 함께 성숙한 제자도를 가르치신다.

더 주목해야 할 사실은 요한복음 10장이 앞선 이야기와 분리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 말씀은 9장에 기록된,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의 이야기와 이어진다. 예수님은 목자와 양에 관해 가르치시기에 앞서 자신의 양이 어떤 모습인지 한 사람의 삶을 통해 보여주신다.

치유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점차 알아가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확신하면서도 눈앞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공동체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을 위험을 감수하며 진실을 증언한다. 지도자들이 그를 쫓아냈을 때 예수님은 그를 찾아오신다. 선한 목자는 다른 이들이 배척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목자들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머물지 않는다. “양들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도 제기한다. 영적 지도자들이 분명한 도덕적 입장을 밝히지 못하더라도 신실하게 증언할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 필자는 요한복음 9장과 10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음성을 아는 모든 제자에게 그 책임을 맡기신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교회의 도덕적 증언에는 용기 있는 목자뿐 아니라 용기 있는 양들도 필요하다.

눈을 뜬 사람의 증언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의 이야기는 육체적 치유의 기록을 넘어 영적 시각과 맹목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점차 알아가는 반면, 영적 권위를 확신하던 지도자들은 눈앞의 현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날 때부터 보지 못했던 사람이 이제 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의 회복을 기뻐하거나 그 사건이 하나님에 관해 무엇을 보여주는지 묻기보다 그를 거듭 심문한다. 진리를 발견하는 일보다 자신들의 해석과 권위를 지키는 일이 앞선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정한 경계 밖에서도 일하실 수 있다는 가능성은 기쁨보다 위협으로 다가온다.

그의 부모는 또 다른 반응을 보인다. 그들은 그가 자신들의 아들이며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어떻게 보게 됐는지를 묻는 질문에는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라며 답을 피한다. 요한은 그 이유를 설명한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사람을 출교하기로 한 종교 지도자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요 9:22).

그들의 두려움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회당에서 쫓겨나는 일은 종교 예식에 참석할 자격을 잃는 데 그치지 않았다. 소속과 관계, 정체성을 위협하고 경우에 따라 경제적 안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이었다. 부모는 아들의 상태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더 나아가 말할 때 감당해야 할 대가를 염려했다. 그들의 침묵에는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들은 다른 길을 선택한다. 그에게는 자신을 보호할 지위나 권위, 전문적인 신학 지식이 없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완전히 이해했던 것도 아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의 인식은 “예수라 하는 그 사람”에서 “선지자”로, 나아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으로 깊어진다. 지도자들이 그를 쫓아낸 뒤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을 때 그는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이러한 과정은 중요하다. 그는 완전한 신학적 이해를 갖출 때까지 증언을 미루지 않았다.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규정하라는 압박 속에서도 자신이 아는 사실을 분명히 말했다.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요 9:25). 그의 용기는 모든 질문의 답을 알고 있다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자신이 경험한 진실을 부인하지 않겠다는 태도에서 나왔다.

요한은 같은 현실 앞에서 나타나는 세 가지 반응을 보여준다.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권위를 보호하고, 부모는 자신의 안전을 지키려 하며, 치유받은 사람은 진실을 증언한다.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지에 따라 각자의 선택이 달라진다.

결국 지도자들은 그를 쫓아낸다. 그러나 패배처럼 보이는 이 사건은 이야기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요 9:35).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아야 할 이들이 그를 배척했지만 예수님은 그를 찾아오신다.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시기 전에 선한 목자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여주신다. 동시에 이 사람의 삶은 진실을 부인하지 않고 대가를 감수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모습을 드러낸다.

양들에게도 분별과 순종의 책임이 있다

요한복음 10장은 완전히 새로운 주제가 시작되는 본문으로 읽히기 쉽다. 그러나 앞선 사건과 연결해 보면 목자와 양에 관한 말씀은 방금 일어난 일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종교 지도자들은 잘못된 목양의 모습을 보여줬다. 회복을 기뻐하기보다 위협했고, 품기보다 배척했으며, 사람을 돌보기보다 자신의 권위를 지키려 했다. 반면 예수님은 배척당한 사람을 찾아오시고 그와 관계를 맺으신다. 이어 자신이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신다.

이 본문을 영적 지도력의 모범으로 읽는 것은 마땅하다. 예수님은 양을 알고 보호하며 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다. 그러나 목자에게만 초점을 맞추면 양들의 성품과 책임에 관한 가르침을 놓치게 된다. 요한복음 9장은 신실한 양이 어떤 모습인지 미리 보여준다. 제자도는 수동적으로 믿는 데 머물지 않고, 목자와의 관계 안에서 분별하고 행동하는 삶으로 나타난다.

1. 양은 목자를 안다

예수님은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요 10:14)라고 말씀하신다. 기독교 제자도는 규칙이나 제도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양들은 목자의 성품과 긍휼, 진실함과 정의,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알아가며 그분을 신뢰한다.

2.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소리를 듣는 것 이상이다.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는 많다. 그 가운데 그리스도의 성품과 가르침에 부합하는 목소리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그분을 깊이 알아가는 일이 필요하다.

3. 양은 여러 목소리를 분별한다

예수님은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 10:5)고 말씀하신다. 제자는 목자의 음성과 그에 어긋나는 목소리를 구별해야 한다. 종교적 권위를 내세우는 말이라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비추어 분별할 책임이 있다.

4. 양은 거짓 목자를 거부한다

예수님은 양들이 자신의 음성을 듣는다고만 말씀하지 않으신다. 낯선 이를 따르지 않는다고도 하신다. 신실한 제자도는 때로 거절을 요구한다. 사람을 조종하는 행위와 성경의 오용, 종교적 민족주의와 이념적 목적, 그리스도의 성품에서 벗어난 지도자의 말과 행동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거절은 권위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더 높은 권위이신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선택이다.

5. 양은 목자를 따른다

알아듣고 분별하는 일은 순종으로 이어져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에 감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길을 걷도록 제자들을 부르셨다. 그 길에는 용기와 희생이 필요하며, 때로는 다수와 다른 자리에 서야 할 수도 있다. 치유받은 사람은 자신의 이해가 깊어지는 과정에서도 이미 알게 된 진실에 충실했다.

6. 양은 증언한다

그는 마음속으로 믿는 데 그치지 않았다. 심문과 위협을 받고 쫓겨나는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증언했다. 그의 이해가 깊어질수록 증언도 분명해졌다. 이 이야기는 제자가 진실을 말하기 위해 모든 신학적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자신이 아는 바를 정직하게 증언하며 계속해서 목자를 따라가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요한복음 10장은 지도력에 관한 가르침과 함께 성숙한 제자도의 모습을 제시한다. 예수님은 종교적 권위에 양심을 맡기고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람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분을 알고 음성을 분별하며, 거짓을 거부하고 신실하게 따르며 용기 있게 증언하는 제자들을 빚어가신다. 교회의 도덕적 증언은 목자들의 신실함뿐 아니라 양들의 성숙함에도 달려 있다.

왜 선한 사람들은 침묵하는가

그리스도께서 모든 제자에게 자신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를 책임을 맡기셨다면 또 다른 질문이 뒤따른다: "왜 많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인간의 고통과 불의를 마주하고도 침묵하는가?"

요한복음 9장의 부모는 이 질문을 생각하게 한다. 그들은 아들이 치유됐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들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지점까지 나아가 말하기를 주저했다.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면 공동체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두려움이 그들의 말을 제한했다.

비슷한 두려움은 오늘날 기독교 공동체에도 존재한다. 신자들은 잘못된 상황을 알아차리고 불의를 목격하면서도 목소리를 내기 전에 대가를 생각한다. 우정을 잃지는 않을지, 존경하는 사람을 실망시키지는 않을지, 교회 안에서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지지는 않을지 염려한다.

공동체의 수용은 안전감을 주지만 배제는 소속감과 정체성을 위협한다. 양심이 말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순간에도 침묵을 선택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러한 배제의 두려움이다. 교회 역시 이 압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충성을 무조건적인 동의로, 연합을 침묵으로 오해할 수 있다. 불편한 질문을 억누르고 진실에 충실하기보다 다수에 순응하는 편이 안전하다고 느끼게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한다.

의도적으로 양심을 억압하지 않더라도, 공동체의 문화가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에게 큰 부담을 줄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무엇을 가르치는지만 아니라 어떤 질문을 허용하고, 다른 의견을 말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도 돌아봐야 한다.

요한복음은 다른 길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단순한 내면의 감각에 머물지 않는다. 선한 목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성숙한다. 그리스도의 음성을 분별하는 법을 배울 때, 기독교적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그분의 긍휼과 진리, 정의와 희생적인 사랑에서 멀어지게 하는 목소리를 구별할 수 있다.

치유받은 사람은 이를 보여준다. 그는 전문적인 신학 지식이나 종교적 권위를 갖고 있지 않았다. 자신이 마주한 진실에 충실했다. 그의 용기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확신보다 자신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을 향한 신뢰 속에서 자라났다.

지도자의 침묵이 성도의 면책 사유가 될 수는 없다

오늘날 교회에는 용기 있는 목자들이 필요하다. 동시에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양심을 성숙시킨 양들도 필요하다. 신실한 지도자를 격려하고, 잘못된 방향에는 문제를 제기하며, 자신의 도덕적 책임을 강단에만 맡기지 않는 성도들이다.

필자는 가자지구의 고통이 기독교 지도력뿐 아니라 제자도의 문제도 드러냈다고 본다. 질문은 왜 많은 목자가 침묵했는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왜 많은 양이 그 침묵을 받아들였는지도 물어야 한다. 마을이 파괴되고 가족이 삶의 터전을 잃으며 아이들이 죽어가는 현실 앞에서 침묵을 도덕적 중립으로만 볼 수는 없다. 침묵은 결과적으로 권력을 보호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9장과 10장은 성도들에게도 분별과 행동의 책임이 있음을 일깨운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다른 목소리를 분별하며, 낯선 이를 따르지 않는다. 신실함에 대가가 따르더라도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주일에는 선한 목자를 찬양하면서 일상에서는 두려움과 민족주의, 제도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이나 정치적 편의에 이끌린다면 자신의 신앙을 돌아봐야 한다.

목자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더라도 성도 개인과 공동체의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여전히 자신의 백성을 분별하고, 거짓을 거부하며, 참된 목자를 따르고 진실을 증언하는 삶으로 부르신다. 지도자에게 실망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부르심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우리 앞에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고통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선한 목자의 음성을 분별했는가. 그리고 그 음성을 따를 용기가 있었는가?"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 #기독일보 #기독일간지